땡추

9. 엇갈린 운명(運命)

by 김수현

가까운 산과 들에는 녹색의 푸른 숲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지만 여름의 날씨는 무척 더웠다. 바람이 햇볕에 시들시들 골아있는 풀잎을 흔들고 지나갔다. 나뭇가지에서는 매미가 자지러지듯 울어 대고 있었다.

이런 날에는 어디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풀 바람을 쐬며 휴식을 취하면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풀릴 것이다.

그동안 높은 사람들이 광호에게 쓸데없이 설치고 다니지 말라고 여러 차례 경고를 했지만 광호는 개의치 않고 차분하게 용천사에 관련된 사건에 대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오늘은 감독관 기주를 불러 조사를 하고 있었다.

“수용실 환자들 방은 어떻게 배치합니까?”

“보통 환자들은 상태가 심한 사람 순으로 배치되는데......”

“당신들 임의로 배치했지요? 예쁜 미주가 탐이 나니까 다른 생각으로 당신들 바로 옆에 둔 것이지요?”

광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환자들 배치는 우리가 못합니다.”

“그럼 누가 합니까?”

“환자들은 큰 스님이 직접 합니다. 만약 배치가 되었는데 심하게 행패를 부리면 바꿔 달라고 우리가 건의만 할 뿐입니다.”

“그런데 조용하게 있는 미주는 왜 101호에 수용했나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거기에 수용할 대상도 아닌 것 같았는데......”

기주는 잡혀 오기 전에 조사관에게 말을 조심하라는 주지의 말이 생각나서 말끝을 흐렸다. 기주의 진술을 들은 광호는 감독관실 바로 옆에 미주를 배정한 주지에게 의심이 갔다.

광호는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왜 그랬을까? 왜 미주를 감독관들의 눈에 잘 띄게 뒀을까? 미주 아버지는 죽었고, 미주는 금순이가 낳은 자식이 아니다, 미주 아버지가 죽음으로서 그 많은 유산은 금순과 미주, 그리고 금순의 아들이 물려받을 것이고, 금순은 한참 젊고, 그렇다면 혹? 금순과 용천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았을까? 그녀가 미주에게 돌아갈 유산이 탐이 났다면? 미주가 죽으면 죽은 아버지의 유산이 당연히 금순과 그의 아들에게 넘어간다? 그렇다면 정신병자인 미주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미주를 없애려면? 방법은? 용천사를 이용한다? 미주를 죽이려고 계획했다면 금순과 나이 차이가 많은 미주 아버지를 죽이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야 여자 혼자서는 가능하지 않아, 우선 수사를 미주 집안부터 차근차근 다시 시작해야겠지?”

조금 뒤에 박 수사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미주 집안에 대한 정보였다. 우선 미주의 계모인 권 금순 여인의 내력이었다.

금순은 가난한 집안에 셋째 딸로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금순은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처녀 시절부터 남자관계가 복잡했다. 집안에서는 아예 내어놓은 딸자식이었다. 이런 와중에 돈 많은 미주 아버지 변 재수를 만나자 그녀의 집안에서는 앞뒤를 재보지도 않고 얼씨구나 하면서 얼른 결혼을 시키게 된 것이다. 결혼 당시 둘의 나이 차이가 이십 년이나 되었으니 변 재수로는 딸과 같은 나이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들 관계에서 아들이 태어나자 변 재수는 안심하고 금순을 집안 밖의 모든 일을 믿고 맡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변 재수는 월남해서 배운 직업이 쇠를 깎는 선반공이었다. 일가친척 하나 없고 배운 것도 없는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10여 년을 선반 일에만 열중했다. 그의 사장도 오직 한 길에만 매달리는 재수를 눈여겨보다가 차츰 그를 신임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회사가 큰 공장으로 성장하게 되자 재수가 일하고 있는 공장 전부를 재수에게 맡기고 사장은 새로 지은 회사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공장을 맡은 재수는 자신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부품을 그의 사장이 운영하는 회사로 고정 납품하게 되어 다시 이 공장을 일으켜 세워 작금에는 직원 수십 명을 두고 운전기사까지 둔 사장이 된 것이었다.

그는 등산을 즐겼으며 재작년 여름 관악산 등산을 가서 그만 실족하여 절벽에 떨어져 죽고 만 것이었다.

실족 당시 새벽 5시경 운전기사 임정호가 관악산 밑까지 승용차로 사장 변재수를 데려주었다. 변재수가 산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운전기사 임정호는 평상시와 같이 사장 변재수 집에 도착하여 아침을 먹고 정원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당일 변 재수가 하산할 오후 5시 무렵 관악산에 사장인 변 재수를 데리러 갔다. 그러나 2시간이나 기다렸으나 변 재수는 내려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운전기사 임정호는 무슨 사고가 나지 않았나 싶어서 연주암까지 찾으러 갔었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사장 변 재수의 집으로 돌아와 사장 부인 권금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사장 부인 금순은 혹 사장인 변 재수가 무슨 볼일이 있어서 하산하자마자 회사로 갔거나 사람을 만나러 갔을 거라며 임정호를 안심시키고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이튿날 임정호는 차를 몰고 평상시와 같이 사장을 모시러 사장 변 재수 씨 집에 갔으나 그때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어 사장 부인 금순과 함께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하게 된 것이다.

신고를 받은 경찰에서 등산 과정을 확인해 봤으나 특별히 다른 의심이 가는 것이 없어 실족사한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었다.

운전기사 임정호,

2년 전에 변재수의 운전기사로 채용된 28세인 임정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건강하고 잘생긴 젊은 청년이다. 얼굴 생김새와는 달리 무척 성실한 젊은이여서 사장 변 재수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다.

임 정호는 평소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사장 변재수를 보필했다. 사장 변 재수는 일요일마다 등산했는데 재수가 실족사한 당일도 그를 태워줬다. 그런 다음 스스로 변 재수의 집에 들러 하루 종일 정원을 만진다든가 집안일을 도와 변 재수는 그를 가족처럼 대하는 사람이었다.

사장 변 재수가 실족사하고 난 후에 금순이가 너무 젊어 혹 운전기사 임정호와 불륜 관계로 인한 변 재수의 살인 가능성에 대해 그의 행적을 조사한 담당 형사는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갖고 한동안 조사를 착수했던 것으로 정황이 확인됐다.

인상착의에서 그가 아무리 새벽에 산행을 하였다지만 변 재수가 관악산을 오르는 것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같이 등반 계획을 하고 올라온 그의 등반 친구들도 그날은 등산을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비록 그날 등산을 오는 도중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관악산과 가까운 정비소에서 수리한 사실이 확인은 되었지만 그날은 맑은 날씨였는데 아무리 이른 새벽 산행이라 해도 제법 많은 등산객이 다녔을 것이다. 이런 등산로에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은 변재수가 어떤 경로든 여기까지 누군가에 의해 사람이 아무도 다니지 않는 시간에 왔을 것이라는 추측이 선다는 것이다.

둘째는 변재수가 사망한 주변이나 연주암 근처 어디를 찾아봐도 변 재수가 소지한 등산용 가방이 없다는 것이다. 금순이나 정호의 진술에 의하면 재수가 등산용 지팡이를 꽂은 가방을 분명히 등에 메고 승용차에서 내렸다고 말했는데 비록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사방 어느 곳을 찾아도 그의 소지품은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자주 다니는 곳이라면 소지품이 탐이 나서 다른 사람이 가져갈 수도 있었겠지만 높은 절벽 밑이라 사람이 다니지 못하는 곳이기 때문에 설령 탐이 나는 물건이라도 도저히 가져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셋째로는 변재수가 죽었을 당시 입고 있던 옷을 보고 금순과 정호가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다가 부검 결과가 변재수라고 나오자 그제야 어물쩍하고 넘어갔다는 것이다.

넷째는 변 재수와 권금순과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변재수와 아내의 나이 차이가 20살이나 난다는 것이다. 권금순은 한창인 젊은 나이인데 비해 변 재수는 시들어 가는 50대 후반이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운전기사 임정호는 잘생긴 권금순 또래의 나이다. 그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년 가까이 일요일마다 사장 변 재수가 없는 그의 집안에 하루 종일 일을 거든다고 보면 서로 정분이 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의심 나는 여러 가능성을 가지고 그들의 주변을 일여 년이나 조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수십 미터에서 떨어지면서 바위에 여러 차례 부딪쳐서 시신의 두개골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파손되었다는 점, 뼈와 장기의 심한 파손 등은 물론이고 두 사람의 알리바이가 일치한다는 점 등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변 재수가 사망한 후 금순과 정호 두 사람을 일여 년 동안 추적해 보았지만 서로 만나지도 않았고 두 사람의 관계에서 별다른 의심 나는 점을 발견하지 못해 결국 수사를 종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호가 조사한 바로는 운전기사 임정호가 금순의 차를 타고 오다가 양수리를 막 지나 용천사로 오는 도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추측해 본다면 두 사람의 관계가 보통 관계가 아니었을 거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금순과 임정호가 서로 정을 통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변 재수를 살해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광호는 판단했다.

여기까지 추측한 광호는 우선 병원에 있을 미주에게로 갔다. 미주는 점차 원기를 회복하고 있었고 모든 행동이 절제되어 있었다. 광호는 미주에게 말을 걸었다.

“어떠세요?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하고 묻자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그리고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면서 미주는 자신이 왜 여기에 누워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했다.

“아, 예, 나는 최 광호라고 미주 씨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형사입니다.”

“예, 제게 무슨 일이?”

광호는 미주의 흐트러짐 없는 말에 죽음의 충격에서 정상적인 정신 상태로 돌아왔다는 것을 느꼈다. 조용하고 짤막한 질문이었지만 또박또박하고 명확했다.

“미주 씨가 정신병으로 요양원에 입원해 있다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여기 병원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미주는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비록 자신이 정신 이상이 되어 걸어온 지난 세월이었지만 그의 뇌리에 희미하게나마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를 몇 차례 반복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꼭 다문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집에 가고 싶어요.”

“예, 아직은 몸이 완쾌되지 않아서, 그리고 집에서는 미주 씨가 죽은 줄 알고 장례까지 치른 상태입니다. 그러니,”

“뭐라고요 내가 죽어요?”

깜짝 놀라는 미주에게 광호는 지나온 이야기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미주는 한편으로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면서 광호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듣고 있더니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흑, 우리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흐흑,”

광호는 미주로부터 그녀의 아버지 말을 하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을 보자 얼마 전에 수사관이 한 말이 생각났다.

“네? 아버지라니요?”

“네, 아버지가 머리를 맞고...... 흐흐흑, 지금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나요? 흐흑,”

“예, 미주 씨 아버지는 등산 중에 절벽에 떨어져서 돌아가셨어요.”

“아니에요, 그럴 턱이 없어요, 아버지는 그날 맞아서 돌아가신 거예요, 흐흐흑.”

“그럼, 무슨 증거라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요, 골프채에 머리를 맞고, 흐흐흐.”

그녀는 그날 운전기사 임정호가 휘두른 골프채에 맞아 쓰러진 아버지를 생각해 낸 것이었다.

“그날 아버지가 맞은 그 골프채가 있을 거예요, 저의 방 책장 옆에, 누가 일부러 치우지 않았다면 분명 거기에 있을 거예요.”

이 말을 듣자 광호는 빨리 서울에 가서 미주의 방을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장도 없이 금순의 집을 어떻게 수색할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장례를 끝낸 금순은 점순이에게 장례식 동안 잠시 이웃에 맡겨 놓은 아들 훈이를 데려오라 이르고 혼자서 집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는 길에 마음 같아서는 용천을 며칠 동안이라도 붙잡아 두고 싶었지만 주위의 눈총이 있는지라 억지로 참고 용천사 식구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집안에 들어서자 벌써 땅거미가 져서 제법 날씨는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금순은 현관 옆 정원에 있는 사철나무들을 손으로 만지면서 현관문을 열었다. 불빛이 없는 거실 내부는 캄캄했다. 그녀는 너무 피곤해서 쓰러질 듯 거실 스위치가 있는 곳으로 손길을 더듬었다.

“딸깍!”

하는 스위치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 순간 시커먼 물체가 금순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녀는 그 물체에 대해 이상하게도 섬찟한 예감이 들었다.

“누구야! 아니?”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옛날 등산복을 그대로 입고 금순의 앞에 서 있는 남편 변 재수였다. 땅속에 묻혀 썩어서 뼈만 남았어야 할 바로 그 변 재수의 얼굴이었다.

“누구야, 당신은?”

“나쁜 년!”

분명히 남편의 음성이었다. 동시에 금순은 눈에 별이 번쩍였다. 금순은 기상천외한 일에 그만 정신을 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딩동,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훈이를 데리러 갔던 점순이 었다. 초인종 소리를 들은 재수는 얼른 몸을 피했다.

점순이가 들어와 찬물에 적신 수건을 얼굴에 얹고서야 정신을 수습한 금순은 그 순간부터 이 밤이 무서워 어떻게 보내야 할지 겁이 났다. 금순은 점순이를 단 한 발자국도 그녀의 곁에 떨어지지 않게 두고는 아들 훈에게 전화기를 가져오라 일렀다. 용천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서였다.

때마침 전깃불이 나갔다. 놀란 금순은

“점순아, 불 켜! 불을 켜란 말이야!”

금순은 얼른 불을 켜라고 점순에게 소리소리 지르며 난리를 쳤다. 방안이나 거실 할 것 없이 촛불을 켜고 한전에 전화를 한 것은 그래도 심덕이 있는 점순이뿐이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식모살이를 하면서 겪어보지 않는 것이 없었던 그녀였다.

한편 용천이 사찰에 도착하자마자 금순의 연락을 받은 김 처사의 말에 바로 돌아서서 금순의 집에 온 것은 밤늦은 시간이었다.

용천이 문을 들어설 때쯤에서 문 앞에서 작업복을 입은 낯선 두 사람이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누구신가?”

하고 용천이 묻자 초인종을 누르던 사내 하나가 용천을 돌아봤다. 어두운 데도 용천을 본 그는 다시 모자를 푹 눌려 쓰고 얼굴을 숙였고 옆에 선 다른 사내가

“예, 한전에서 나왔습니다, 정전이 됐다고 신고가 들어와서요, 주인아저씨입니까?”

“나도 손님입니다, 허허허.”

그때 문이 열리면서 점순이가 용천을 향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그래, 사모님 계시냐?”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들어가셔요.”

“자, 그럼 같이 들어갑시다.”

모자를 눌러쓴 사람은 한전 직원으로 변장한 형사 광호였고 다른 한 사람 역시 변장한 박 형사였다. 그들은 금순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 한전에 연락해서 일부러 전기를 차단했고 그 틈을 이용해서 집안에 침투해 미주가 가져다 놓았다는 골프채를 찾으려고 온 것이었다.

“네가 신고했니?”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현관문을 열고 있는 점순에게 박 형사가 물었다.

“네, 갑자기 집 안에 있는 전기가 나가서요, 사모님이 무섭다고 난리를 치셨어요, 집안에 촛불을 몇 개나 켰잖아요.”

“점순아, 전기 고치는 손님에게 차 한 잔 대접해라, 오빠, 방으로 들어오세요.”

하면서 금순은 이제 안심이 된다는 듯이 반쯤 몸을 일으키며 용천을 맞이했다.

박형사는 거실에 들어서자

“애야, 여기 의자 좀 가져다줄래?”

하자 점순이는 식탁 의자를 들고 현관 앞에 가져다 놓았다. 광호가 의자 위에 올라가 신발장 위에 있는 전기 박스를 열고 스위치를 내렸고 박 형사는 안방부터 스위치를 점검하는 척하면서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금순과 용천은 안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점순은 부엌에서 찻물을 끓이고 있었다.

그사이 작은 방에 들어간 박 형사가 문을 열고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얼른 밖으로 나왔다. 그의 손에는 들어갈 때와는 달리 긴 막대기 같은 것을 보자기에 싸서 한쪽 옆에 감추고선 급히 문밖으로 나갔다. 방안에서는 두 사람이 아무런 의심 없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흘러나왔고 광호는 일하는 척하면서도 귀는 그들 쪽을 향하고 있었다.

“오빠? 이게 무슨 일이에요? 죽은 그이가 또 나타났어요, 무서워서 죽겠어요, 어떡하면 좋아요, 네?”

“무슨 얼토당토 한 이야기를......”

“내 얼굴을 보세요, 그이가 따귀를 때린 자국 이에요.”

“허 참, 안 믿을 수도 없고.”

용천은 손자국이 난 금순의 볼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말했던 금순의 말이 이제는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금순의 남편은 죽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면 경찰에서 넘겨받은 재수의 시신은 누구란 말인가? 당시 검시관들이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분명히 변 재수의 시신이 맞다 고 판단하지 않았던가? 아니야, 죽었어, 검시관의 검시가 절대 잘못될 수 없어, 그렇다면 금순이가 본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한 번을 봤다면 환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따귀를 맞았다는 자국도 선명하게 있으니 이거야말로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 아닌가?”

용천의 머리로는 아무리 추리해도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랬다. 변 재수가 금순에게 나타난 것은 결코 귀신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금순이가 본 변 재수는 결코 환상을 본 것도 아닌 바로 변 재수 자신이었다.

연주암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은 육이오 때 함께 월남하다가 헤어진 변 재수의 형 변 진수였고, 운전기사 정호가 그날 밤 벽돌지게에다 지고 연주암에 가서 떨어뜨렸던 변 재수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었다.

두 형제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면서도 일사후퇴 이후 헤어져 서로 수십 년간 만나지 못하다가 형이 세상을 비관해서 자살한 장소에서 우연하게도 동생 또한 두 간부(姦夫)에 의해 골프채로 맞아 기절한 상태에서 끌려와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된 것이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진 변 재수가 한참 후에 정신을 차려서 그곳을 떠난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자살한 변 진수의 시신은 등산객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부검하는 과정에서 변 재수가 같은 장소에 등산을 왔다가 실종되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그런데 부검과정에서 자살한 변진수의 혈액검사 결과 변재수의 그것과 동일했음은 물론 여타 조건이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에 변진수의 시신을 변재수로 오판한 것이었다.

그날 변 재수는 기절한 채로 정호와 금순에 의해서 관악산 연주암까지 끌려왔다. 금순과 정호는 변 재수가 깨어나게 된다면 둘이 한 짓이 두려워 계획적으로 여기까지 변 재수를 끌고 와서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실족사한 것처럼 꾸며 놓았던 것이었다.

재수가 그 높은 절벽 위에서 떨어졌어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된 것은 그날은 밤이었고 정호와 금순이는 살아 있는 재수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놓고 완전히 죽은 줄만 알고 생사를 재확인하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행히 재수는 절벽 가운데 있는 툭 불거져 나온 나뭇가지에 걸렸다가 부러진 그 나무와 함께 다시 떨어졌다. 재수는 살 운명이었다. 그가 다시 떨어진 곳은 바닥도 아닌 맨 아래 울창한 나무숲 위였다.

두 차례나 나무가 그의 떨어지는 가속도를 줄였기 때문에 충격에 의해 기절했을 뿐 재수의 생명은 구할 수가 있었다.

재수가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아직 캄캄한 밤중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재수는 갑자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리가 허공에 붕 떠서 비어 있는 듯한 느낌만 있을 뿐 도대체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팔에 힘을 주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머리에는 무거운 통증과 함께 온몸에도 통증이 왔다. 그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나무뿌리든 풀뿌리든 손에 잡히는 대로 잡아서 당겼다. 온몸이 돌부리에 끌리고 나무뿌리에도 끌려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가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살아야 한다는 각오로 기어가고 있었다.

재수가 마을까지 내려왔을 때는 날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온몸에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눈앞에 인가를 발견하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재수가 기억을 상실한 채 정신을 잃은 곳은 정육점 앞이었다.

그날 두 형제가 같은 날 아침에, 형 진수가 동생 재수를 만나려고 관악산 연주암에 왔다가 만나지 못하게 되자 아내의 냉대와 미향의 배신으로 갈 곳을 잃고 연주암 절벽 아래로 스스로 투신자살을 택하게 되었고, 동생 재수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운전기사 임정호와 아내 권 금순의 불륜을 목격하게 되고 간부(奸夫) 임정호에 의해 골프채로 머리를 맞아 기절한 채 그날 밤에 두 간부(奸婦, 夫)에 의해 여기까지 끌려 와서 절벽 아래로 던져지게 된 것이었다.

형은 동생을 만나려고 왔다가 쉽게 목숨을 끊었고 동생은 죽으라고 두 간부(奸婦,夫)들이 그 높은 절벽에 던졌는데도 살아나게 되었으니 우리 인간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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