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권력(權力)
내일은 초하루였다.
용천사는 매월 초하루에는 법회가 열렸다. 초하루에 치러지는 법회는 주로 기도와 축원의 시간이었다. 이날은 새로운 신도들도 오기 때문에 주지인 용천이 빠질 수가 없는 날이었다.
용천은 금순을 만나지 못한 채 사찰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사찰에 들어와서도 아침부터 보이지 않던 금순이가 걱정도 되었고 뒤에 있는 지하실도 무척 궁금했다. 지하실문을 억지로라도 따고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 후회도 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밖에서 문을 잠근 흔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두드려도 대답도 없고 문도 열리지 않았지만 금순이의 식구가 모두 보이지 않는 것은 지하실 문 안에는 분명히 누군가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총재의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이번 총선에 용천이 국회의원 비례대표로 선출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비록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감격했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돈, 돈,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돈만이 옥황상제이고 부처였다. 그는 어느덧 하늘을 오르는 용이 되어 있었다.
내일은 신도들에게 자신이 국회의원이 된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신도들에게 어떻게든 더 많은 돈을 뜯어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바람에 금순의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용천사에는 아침이 되자 너도나도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려고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용천은 예나 다름없이 일도를 법당에 앉혀서 기도를 드리게 하고 자신은 주지실에서 돈이 많이 있는 신도들을 접견하면서 그들이 묻는 대로 이달의 신수를 찬찬히 봐주고 있었다. 어느 신도는 사업 운이 이달부터 트였다고 이야기해 주었고 어느 신도는 액운이 끼었으니 어느 방향으로 가지 말라고 경고도 해 주었다.
그 많은 신도들의 신수를 시와 때를 봐서 하나같이 다르게 해석하니 용천의 신수 보는 법에 모두들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역시 시주 통에는 용천이 찬사를 받는 만큼만 원권 지폐가 가득했다.
한낮이 되자 어느덧 신도들 입에서는 용천이 국회로 나갈 것이라는 말이 퍼졌고 모두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용천을 향하여 경배를 드리려고 몰려들었다.
“스님,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점심 공양을 마친 용천이 공양실을 막 나서려는데 일도가 쫓아와서 옷깃을 잡았다. 꽤 신중하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무슨 심각한 일인가 하여 용천은 일도를 바라봤다.
“저....... 병일이라는 처사님을 아시죠?”
“아, 그래, 알지요, 왜?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마침 그때 공양주 보살인 일도 부인이 지나치면서 용천과 일도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스님, 권 보살이 미국으로 간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권 보살? 권 보살이라니 누구 말이요?”
“왜 우리 사찰에 시주를 제일 많이 한 금순 씨 말입니다.”
“아~ 그런데 권 보살이 미국을 간다니 무슨 소리요?”
“재산을 전부 정리해서 운전수를 했던 애와 미국으로 뜬답니다.”
“허, 무슨 마른하늘에 날 벼락같은 소리요? 좀 자세히 이야기해 보세요.”
둘의 이야기는 예전에 금순의 남편 재수의 차를 운전했던 운전수와 금순의 이야기였다. 두 사람의 이야기 중에는 병일 이를 시켜 미국으로 자금을 보낸다는 이야기며, 그 돈은 보살 금순의 돈이고, 또 운전수와 금순이가 함께 미국으로 도피한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사실을 주지는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주지 용천은 기가 막히는지 그저 허허하고 웃음만 짓고 있는 것을 본 것이었다.
공양주 보살은 무슨 일인지 잘은 몰라도 남편 일도와 용천이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 남편인 일도가 자신이 낳은 아들조차도 꼽추라고 스스로 목을 조여 죽이는 일까지 서슴없이 하는 잔인성을 잘 아는 터였다. 거기다가 첫날밤을 제외하고 평생을 남편이라고 변변히 밤을 함께 보낸 적이 없는 일도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또 일도가 총무승이기 때문에 사찰에 돈은 혼자서 관리했다. 주지가 돈에 대해서는 매사가 분명한지라 공양주 월급을 주지 말라고 할 턱이 없었다. 분명 일도가 남편이라고 월급을 받아 챙기는 것이 틀림없었으나 오갈 곳이 없는 그녀로서는 입 한번 벙긋 못하고 일만 하고 있는 처지였다. 순자의 생각으로는 일도가 아내 순자에게 밥만 먹여줘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녀는 지금 꼽추 아들이라도 곁에 있었으면 재롱이라도 보련마는 그마저 몰래 친정으로 보내버렸으니 지금껏 원한에 사무친 마음이 오죽했겠나 마는 그녀는 그저 꾹꾹 눌러 참고 살았다. 그러자니 벙어리 아닌 벙어리로 말없이 밥만 하면서 살고 있었다.
지금껏 십수 년 가까이 말없이 밥만 해 주다 보니 말 한마디 없는 그녀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지 아니면 사람을 믿기 때문인지 그녀가 있거나 말거나 사찰 식구들은 별말들을 다 했다. 하다못해 감독관들은 자기 아내와 밤 일을 했던 말까지도 스스럼없이 그녀 옆에서 말하곤 했다.
그렇다고 순자가 바보는 아니었다. 금순이가 사찰의 요양원을 짓는데 돈을 거의 전부를 기부한 것도 알고 있었고 요양원 내부에서 세부적인 일들은 알 수 없었지만 사람이 죽고 매를 맞고 하는 일은 눈으로 보고 또는 이야기를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금순이가 같은 동향인 안동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고향 까마귀라고 금순이가 안동사람이라 반가워서 말이라도 붙여 보고 싶었지만 귀부인 같아 아직 감히 말을 붙여 보지 못했다.
신도들 중에 병일이란 신도가 있었다. 일도와는 가까운 친구사이였지만 용천은 언 듯 그 신도의 상을 봤을 때 음흉한 기운이 흘러 좋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속으로는 크게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도와 어릴 때부터 다정했던 친구라 딱 잘라서 평범한 신도처럼 대하기도 머쓱해서 겉으로는 반가운 척 대해주고 있었다.
신도 몇이 공양을 하려고 들어오자 일도는 하던 말을 멈추고 점잔을 빼면서
“병일 처사님이 스님께 꼭 할 말이 있답니다요.”
“무슨?”
“소승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중요한 이야기인가 봅니다.”
“그럼, 내 방 옆 요사채로 오라고 하세요.”
점심 공양을 마치고 사찰을 배회하고 있던 병일에게 일도는 총총걸음으로 가서 무엇이라 말하자 병일은 바로 용천을 향해 따라왔다. 신도들도 저마다 식사 후라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용천과 병일이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던 병일 이 가 용천을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스님, 우리 신도중에 권 금순이란 보살님이 계시잖습니까, 우리 요양원 건립에 대단한 공헌을 한 보살님 말입니다.”
용천은 조금 전에 일도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처음 듣는 것처럼 놀라는 척하면서
“아니, 처사님이 어떻게?”
“별일은 아니고요, 그 보살님이 저희 회사에 여권을 의뢰해서......”
“여권이라니요?”
“제가 잘 아는 불알친구를 거쳐 부탁한 사람이 있는데, 권 보살 집에서 운전을 했던 정호라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와 함께 여권을 부탁한 여자가 권 보살이지 멉니까, 그래서 무슨 일인가 하고 스님께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정호라고요? 임정호 말입니까?”
얼마 전에 금순이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함께 타고 오다가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그때 사고로 운전자인 금순은 살아났지만 바로 옆에 탑승했던 임정호는 한강에 빠져 죽었던 것이었다. 그때 죽은 바로 그 사람을 병일 이 가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예, 맞습니다, 얼마 전에 사망신고가 된 친구이지요, 그 친구가 저희에게 가짜 여권을 부탁하러 왔더군요.”
“정호라는 사람은 교통사고로 죽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살아 있다고요?”
“예, 정호의 말에 의하면 두물머리 수초더미에 걸려 살아났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모르고 잠수부들은 시체를 못 찾았으니 어디 멀리 떠내려가서 고기밥이 되었다고 생각했겠죠, 며칠째 못 찾았으니 경찰에서는 죽은 것으로 판단하여 처리한 것이겠지요.”
“그럼 그동안 어데 갔다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까?”
“글쎄요, 그 이야기는 아무리 물어봐도 입을 꼭 닫고 대답을 하지 않으니 저도 알 수가 없네요.”
이야기가 그쯤 되고 보면 대충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을 용천은 감을 잡았다. 우선 금순을 만나보고 다음 이야기를 잇는 것이 옳을 듯싶었다.
“처사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아들었습니다, 후에 일도스님에게 연락드리겠습니다.”
하고 정중이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하려는데
“그보다도 아마 권 보살이 재산을 정리해서 정호와 함께 외국으로 뜨려는가 봅니다, 우리 회사를 통해 미국으로 돈을 송금할 수 있느냐고도 물어 왔습니다.”
“허어!”
용천은 입을 떡 벌렸다. 설마 하니 자기를 버리고 전 재산을 외국으로 빼돌린다는 것은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금순과 정호는 재수가 남긴 부동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재수를 지하실에 감금해 놓고 버젓이 복덕방을 들락거리는 한편, 만약 팔리지 않을 것을 대비하여 제1 제2 은행권 대출까지 신청해 놓았다.
금순은 지하실로 내려왔다. 십수 년을 데리고 살았던 점순이는 이 시점에 오히려 거추장스러웠겠지만 자기가 낳은 아들은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금순이는 재수를 바라보았다. 그날 도자기로 머리를 얼마나 심하게 맞았던지 재수의 머리카락에는 핏자국이 엉켜서 말라붙어 있었다. 손목 주위에는 묶인 손목을 빼내려고 무던히 애쓴 표식이 시커먼 멍과 상처로 남아 있었다.
재수는 금순을 보자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이를 갈고 또 갈았다. 입가에도 붉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훈이는 어디로 데려갔어요?”
금순은 미친 사람 같은 재수의 불붙은 눈빛을 보자 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재수의 눈동자를 피하면서 훈이의 행방을 물었다.
“네년을 바로 죽이지 못한 것이 천추에 한이 된다, 이년, 죽일 년!”
대답은 고사하고 피 묻은 입으로 얼마나 독을 품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지 금순은 겁이 나서 더 이상은 도저히 물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재수를 그대로 둔 채 문을 닫아걸고 지하실을 나왔다.
“그래, 지새끼니 어련히 알아서 하려고......”
훈이가 자기 새끼지만 재수의 새끼도 되니 이 마당에 더는 재수에게 묻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금순이가 지하실을 나오자 마침 거실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얼른 거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정호가 소파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서 방금 울렸던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아, 예, 고맙습니다, 곧 가라고 하겠습니다.”
수화기를 올려놓는 정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마을금고인데 돈이 나왔다는 군, 찾아가래!”
변 재수가 남긴 부동산이 더러는 팔리고 팔리지 않는 부동산 대다수는 제1 금융권에 저당을 설정해서 돈을 대출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대출한 물건을 상대로 다시 제2금융권에 대출 신청을 해놓았던 것이 돈이 나왔다는 통고였다. 금순과 정호는 대단한 배짱들이었다.
금순은 이렇게 빨리 일이 처리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는 듯이 주먹을 불끈 쥐면서
“나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어? 잘 되었어?”
다리에 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자리를 고쳐 앉는 정호를 향해 물었다.
단 며칠 사이에 둘은 무척 가까운 사이로 발전해 있었다.
“선배 병일 이를 만났는데, 잘 될 것 같아, 우리 돈을 미국에 있는 자기 회사로 송금하는 방법을 써서 미국에 가서 찾아 준다고 하더군.”
“그 회사는 잘 아는 회사야?”
“그~럼, 친구 병일 이 가 다니는 회산데 수출하는 회사야, 천에 염색을 해서 수출하는 회산데 사장이 일본 제일 교포야, 초창기에는 구미에 공장을 차려놓고 일본서 나염기술을 들여와 시작한 회산데 지금은 미국지사까지 두고 있는 제법 규모가 큰 중소기업이야.”
정호는 자신이 다니는 회사처럼 자신 있게 대답하자 금순은 그래도 미심쩍다는 듯이
“명동에 있는 회사는 무슨 회산데?”
“아, 거기는 그 회사가 수출을 하기 위해 만든 무역회사야, 법인을 따로 내서 만든 자회사야.”
“친구 병일이라는 사람은 믿을 수가 있어? 그 많은 돈을 맡기는데......”
“어쩌겠어, 믿을 사람이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잖아? 그러고 회사에서 하는 일이라 미국서 돈을 찾게 되면 수고비 조로 꽤 많은 돈을 달라고 말하더군,”
“들어가는 경비야 어쩔 수는 없는 것이고...... 아, 그런데 무슨 놈의 나라가 자기 돈도 제멋대로 가지고 나가지 못한데? 참 더러워서......”
“그러게 말이야.”
“잘해요, 잘못되면 우리는 완전히 쪽박 찬다는 걸 알고 있지? 미국까지 가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면 어떡해.”
“잘 알지, 우리 일인데 내가 왜 흐리멍덩하게 처리하겠어,”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고 했어, 다리가 아프더라도 다시 한번 가서 확인해 봐.”
“걱정 마, 그놈은 내 불알친구야, 믿을 수 있는 친구야,”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갔다.
며칠 걸릴 것이라던 지방에 있는 몇몇 땅덩어리가 다행스럽게도 다음 날 오후가 되자 매매 계약을 하자고 부동산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매수자 입장에서 융자가 되어 있는 땅덩어리고 급히 매도하는 물건인지라 돈도 몇 푼 안 드니 쉽게 매도된 것이었다.
금순은 명동에 가 있는 정호를 급히 부동산 사무실로 나오라 이르고 자신도 장식장 서랍에 넣어 둔 토지 문서와 미리 발급받은 인감증명서, 그리고 가죽케이스에 든 인감도장을 챙겨서 외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금순의 마음은 벅차올라 가슴이 두근거리며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모두 잠든 야밤에 숨도 채 끊어지지 않는 남편인 재수를 정호와 어렵게 끌고 가서 절벽에 떨어뜨렸던 그가 다시 살아나 지하실에 진을 치고 있다가 금순이 나타나자 잡아다가 손가락 마디를 식칼로 자르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재수를 바로 밑 지하실에 잡아 두고 있었으니 금순인들 어찌 편하게 잠들 수 있었겠는가. 또 정신병을 앓고는 있었지만 뻔히 살아 있는 미주를 요양원에 보내놓고 주지를 이용해서 간접적으로 살해하게 만들었으니 어찌 사람으로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가 있다고 하겠는가.
금순은 그래도 인간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이나마 바람 소리만 들려도, 초인종 소리만 들려도, 누가 자기를 잡으러 오지 않나 노심초사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일이 주마등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제 며칠만 있으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불안한 마음이 아주 영원히 사라진다고 생각을 하니 뛸 듯이 기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며칠만 참자, 며칠만......”
며칠만 있으면 돈을 가지고 이 땅에서 영원히 떠나 아무도 간섭받지 않는 외국에서 새 삶을 시작할 것이라는 꿈 속에 그녀는 혼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폈다 하면서 기쁨의 희열을 만끽하고 있었다.
등기 서류를 전부 넘겨주고 거액의 수표 한 장을 받아 쥔 금순은 정호에게 바로 건네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원했다. 재산을 전부 정리했으니 너무 홀가분했다.
집은 지하실에 갇혀 있는 남편 재수가 있으니 팔기도 거북했다. 그렇다고 재수를 전처럼 갖다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니 정호의 묘안대로 제1금융권과 제2금융권에 저당을 잡히고 융자를 받는 방법을 택했다.
결국 집은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까지 받았기 때문에 시세대로 팔린다 해도 몇 푼 더 건지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재수가 만들어 놓은 그 많은 부동산이 당시에는 언제 정리될지 예측할 수도 없었고 부동산이 정리될 동안만 살면 되는 집이기 때문에 팔 걱정 없이 날짜만 되면 집을 버리고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하려면 오히려 시세와 가장 가깝게 대출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정호가 짜낸 생각이었다.
이로써 변재수가 남긴 재산은 일 원 한 푼도 없었고 다만 팔지 않는 집에 부채만 동그라니 자산으로 남게 되었다.
정호는 돈을 받자마자 바로 친구에게 연락해서 돈을 건네주러 갔다. 돈을 받아 회사 경리 직원에게 잠시 건네준 병일은 정호에게 소곤거리는 말로
“야, 정호야, 너 정말 그 여자와 같이 살려고 하냐?”
하자 정호는 시침을 뚝 떼고
“그럼, 어쩌겠냐, 돈이 전부 그 여자 건데...... 나도 다 생각이 있다, 기다려 봐라.”
하고 의미 있는 대꾸를 하자 병일은 빙긋이 웃으면서
“무슨 계획이라도 있냐?”
“미국 가보면 알 거다, 그리고 너 미국에 잘 아는 여행사 있지?”
“그래, 있다만 왜?”
“그 직원 소개 좀 해주라, 내 사례는 톡톡히 하마.”
“그래? 너 똥 누러 갈 때와 나올 때 다른 건 아니지?”
“이 사람 나를 어떻게 보고?”
“농담이야, 농담, 하하하”
“하하하”
참 세상은 요지경 속이었다. 서로 같이 웃는 마음속에는 생각이 각각이었다.
정호와 금순이 재수를 죽이고 가로챈 돈을 이제는 정호가 혼자 차지하려고 금순을 미국 땅으로 데려가서 때 내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정호의 마음속에는 금순이가 미국 땅에서 혼자 죽든 살든 그의 인생에 대해서는 미련도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자신을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차버린 금순이였다.
“두고 봐라, 이제 곧 내가 칼자루를 쥐게 될 것이니 그때는 네년의 운명도 내 손에 의해서 끝날 것이다.”
하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딴에는 제법 똑똑하다고 생각한 순진한 정호였다. 그는 병일 이에게 미국에서 돈만 받고 나면 수고비를 두둑하게 찔러주고 그 돈을 받아 혼자 시애틀을 거쳐 국경을 넘어 캐나다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병일에게 미국에 있는 여행사 직원을 소개해 달라고 한 것이었다.
금순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애초부터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정호와 한배를 탔을 뿐이지 정호에게 돈 한 푼 건넨다는 것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미국 땅에서 돈만 찾아 쥐면 어떤 궁리를 하던 정호를 헌신짝 버리듯이 떨쳐 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있었다.
금순은 국내에서 수시로 여행사를 다니면서 미국 주변국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가 캐나다라는 것과 캐나다에서도 밴쿠버를 생각했다.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주는 정원 있는 집과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공원, 평온한 바다, 여유를 느끼는 사람들, 이 모두 자연과 환경이 잘 조화된 도시여서 너무나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도시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여행사 직원에게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행사를 통해서 캐나다 밴쿠버에 자신이 살 집까지 알아보라고 일러두기까지 해놓았다. 그런 다음 용천을 불러들일 생각이었다.
한편 병일은 정호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이 마음속으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병일이도 초하룻날 사찰에서 용천과 만나 약조한 일이 있었다. 금순이가 송금하라고 맡긴 돈은 정호와 금순을 미국으로 떠나보내는 즉시 찾아서 병일 이 가 그 돈의 삼 한을 자신의 몫으로 갖고 나머지는 용천에게 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뒤를 봐주기로 약조한 것이었다.
병일의 회사에는 미국지사가 있지도 않았으니 있을 수도 없고 돈은 고스란히 병일이의 개인 통장에 입금되어 있으니 병일이도 역시 그 돈으로 해외에 도피하면 그만이었다.
재수가 어렵게 사업으로 번 돈을 세 사람이 먹이를 놓고 서로 낚아채려고 머리를 짜내고 있었다. 아니 용천까지 모두 네 사람이었다.
이미 출국 준비를 철저하게 했던 정호와 금순은 이틀 뒤에 떠날 미국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한편 수사관으로부터 권금순과 임정호가 재산을 정리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해 들은 광호는 이들이 부동산을 정리하는 대로 국외로 뜰 것이라 판단되자 일이 다급해졌다. 그들을 구속시키려면 당시 정신병 환자였던 미주의 진술로는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미주 진술을 뒷받침할 유일한 증거물인 국과수에 감정 의뢰한 골프채에 대한 결과가 빨리 나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다음 날 국과수에서 연락이 왔다. 골프채에서 혈흔이 발견되었는데 변 재수의 혈흔과 동일 혈액형으로 추정된다는 통보였다. 다행히 권금순과 임정호를 구속할 증거물이 나온 것이었다. 광호 일행은 급히 두 남녀를 잡으려고 공항으로 향했다.
같은 시간에 금순과 임정호도 김포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임정호의 친구인 오병일은 금순과 정호와 같이 미국으로 출국해서 지사에서 돈을 찾아 건네준다고 했으나 무슨 일인지 병일 이로부터 하루 먼저 출국한다는 연락을 받았었다. 먼저 가서 돈을 준비해서 공항에 마중을 나오겠다는 것이었다.
금순은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정호와는 이미 마음속으로는 작별할 사람인데 자신을 믿도록 마지막으로 오붓하게 새로운 자유를 만끽하는 것처럼 즐기는 것이 오히려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호와 금순은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출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금순은 몇 번인가 뒤를 힐끔힐끔 돌아봤다. 혹 누군가 자기를 잡으려고 등 뒤를 두드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 손이라도 잡아 줄 아들 훈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사히 심사대를 통과하고 탑승구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좌석을 찾아 정호 뒤를 따라 비행기 통로로 들어갔다.
“후유!”
자신의 좌석번호를 찾아서 의자에 앉은 금순은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2여 년 동안이나 아무 일 없었던 것이 당장 무슨 일이 생기겠나 만 막상 나라를 영원히 떠난다고 생각하니 누군가 잡으러 오지 않을까 온통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안심이다. 몇 분 후면 비행기가 이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임정호 씨, 권금순 씨 맞죠?”
순간 금순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점퍼 차림의 키 큰 두 사람이 금순과 정호가 앉은자리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임정호 씨, 권 금순 씨를 변 재수 씨 살인혐의로 채포 하겠습니다. 변호....”
그 뒤에 하는 말은 금순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저 멍한 공동상태였다. 잠시동안 주위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있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렸다. 분명 현실이었다.
“찰칵!”
그녀의 양 손목에 차가운 쇠붙이가 감쌌다.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하고 말았다.
그녀는 무서울 정도로 침착하게 탑승구를 거쳐 심사대를 나오고 있었다. 탑승을 기다리며 줄을 선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두 사람을 주시하고 쳐다보고 있었으나 금순은 이를 앙 물고 앞을 향해 걸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눈앞에 이미 죽어서 묻어 버렸던 미주가 탑승구 앞에 서 있지 않는가. 그녀는 깜짝 놀랐다. 다시 한번 주위를 돌아봤다. 분명 차갑고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미주였다. 그는 끌려가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수없이 뒤를 돌아봤다.
“미주는 죽었는데...... 분명히 장례까지 치렀는데......”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끌려 나오던 정호는 미주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곧장 경찰서로 가서 조사를 받았다.
처음에는 임정호가 변 재수의 살해사건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극구 부인했다.
“등산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은 변 사장을 사장 집에서 일을 거들고 있었던 내가 어떻게 죽일 수 있습니까? 그날 내가 사장님 집에 있었다는 건 사모님께 물어보면 잘 알 것 아닙니까?”
하고 오히려 당당하게 반문했다.
형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당신이 골프채로 변 사장 머리를 친 사실을 본 사람이 있어요,”
골프채라는 말에 움찔하고 놀라기는 했지만 바로 시침을 뚝 떼고선
“골프채요? 갑자기 무슨 골프 챕니까?”
“이 양반이 우리 경찰을 허수아비로 아나 보군!”
그 말에 정호는 할 말이 없었다. 그날 변 사장을 쳤던 골프채를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지금 생각해도 어디에 두었는지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언제 때 이야기인가. 설마 하니 그 사실을 경찰이 어찌 알겠나 싶어 자신 있게 부인했다.
“그래, 누가 봤다고 그러세요? 귀신이 봤다는 겁니까? 있으면 데려와 보세요,”
하면서 자신 있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럼 사장 딸 미주를 한번 만나 볼까요?”
정호는 미주의 이야기가 나오자 또 한 번 놀랐다. 그러나 그는 금방 태연한 척 얼굴을 고쳤다. 미주를 분명히 장례까지 치른 사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번 코웃음을 쳤다.
“허허 참, 아니 그 여자는 미친 여자예요, 형사님도 잘 알잖아요, 여기 용천사 요양원에 입원한 사실을요, 형사님은 그런 미친 여자가 한 말을 믿으세요?”
하고 자신은 미주가 죽은 사실조차 모르는 척 대답했다.
“이봐요, 이게 뭔지 알아요?”
광호는 골프채를 보여 주면서
“그건?...”
그는 낯익은 골프채를 보자 약간 당황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골프채는 왜요?”
하고 다시 시치미를 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보시오, 정호 씨, 며칠 전에 당신이 모시던 변 사장 집에서 가져온 미주 씨가 숨겨 둔 골프채요, 이게 당신이 휘둘러서 변 사장을 쓰러뜨린 골프채란 말이요.”
“내가 변 사장을 골프채로 쓰러뜨렸다는 증거가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그 골프채에 내가 쳤다는 이름이라도 적혀 있습니까?”
“이 골프채 손잡이에 당신의 지문과 변 사장의 혈흔이 발견되었어요, 이래도 잡아떼겠소,”
“그것은......”
그때야 정호의 말문이 막혔다. 제법 침착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했지만 결국 그는 골프채 때문에 모든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그때 골프채를 치우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는 그만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권금순 와 당신이 변재수 씨의 유산이 미주 씨에게 넘어갈 것을 두려워해 서로 공모해서 미주 씨를 용천사에 맡기고 없애 달라고 한 것이 당신이지요?”
“나는 미주를 절에 맡긴 사실조차도 모릅니다.”
정호가 강하게 부인했다.
한편 방에서는 권금순도 심문을 받고 있었다.
“당신과 임정호 씨는 내연의 관계 아닙니까?”
“.......”
“남편인 변 재수 씨가 등산을 가고 난 후 두 사람이 관계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등산 갔다가 볼일이 있어 등산도 하지 않고 집으로 되돌아온 남편인 변 재수 씨에게 두 사람의 관계가 탄로 난 것 아닙니까?”
“.......”
“변 재수 씨가 두 사람을 질책하자 임정호가 엉겁결에 골프채를 잡고 변 재수를 내려쳤고 골프채를 맞고 죽은......”
“아니에요, 죽지는 않았어요.”
엉겁결에 금순은 재수가 죽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실토하고 말았다.
“그러면 왜 골프채를 맞고 쓰러진 변 재수 씨를 밤이 되기를 기다려 두 사람이 차에 태워 관악산으로 싣고 갔습니까? 그리고 왜 연주암까지 끌고 올라가서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실족사한 것처럼 만들고 달아났습니까? 그렇다면 권금순 씨도 재수 씨의 살인에 가담한 셈이 군요,”
“그런 게 아니라......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그 후 경찰에서 실족사한 것으로 판명되자 유산이 탐이 난 권금순 씨와 임정호 씨는 다음 차례인 미주 씨를 없애기로 마음먹고 정신병자인 미주 씨를 용천사로 보낸 것 아닙니까? 그리고는 주지에게 돈을 주고 없애 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지요?”
“남편은 죽지 않았어요, 살아 있단 말이에요.”
“뭐라고요? 변 재수 씨가 살아 있다고요?”
금순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광호는 잠시 동안 심문을 멈추고 담배 한 대를 빼 물고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흐느끼던 금순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남편은 지금 지하실에 갇혀 있어요.”
“어느 지하실 말입니까?”
“우리 집 지하실입니다, 바로 뒤편에 있는 지하실입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어 나갔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내가 눈이 어두워 정호와 관계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날따라 무슨 일인지 남편이 등산을 하지 않고 집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들키고 말았지요, 남편이 눈을 부릅뜨고 이를 용서하지 않을 자세를 취하자 엉겁결에 겁에 질린 정호가 거실 진열대 한쪽 구석에 있는 골프 가방에 골프채를 꺼내 들고 머리를 쳤습니다...... 물 한 컵만......”
금순은 입안이 바짝 타들어 가자 광호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이야기를 하는 금순의 마음 한구석에는 지금 이 어려운 순간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용천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용천에게 연락을 취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광호는 박 형사에게 금순의 집 지하실을 수색하라 이르면서 물을 따라주자 금순은 물 한 컵을 다 마시고 다시 한 컵을 달라고 하면서 금순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순간 나는 겁이 났지만 정호는 쓰러진 남편의 맥을 짚어보고 살아 있다고 하면서 밤을 틈타 등산 간 곳에 가져다가 버리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우선 남편이 깨어나면 정호와 관계한 사실이 들어 나고 그렇게 되면 남편의 질책이 끔찍할 정도로 무섭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사실이 어찌나 무섭던지 그 제안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의 일방적이었습니다, 그는 기절한 남편의 손과 발을 묶었고 입에는 테이프를 감았습니다, 결국 동의한 셈이지요? ”
광호는 그녀가 하는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냉정을 돼찾았어야 하는데......”
그녀는 계속 말했다.
“그런 후에 정호는 동내 건재상으로 갔습니다, 그는 건재상에서 건축공사장에 사용하는 벽돌을 지고 나르는 지게를 사서 승용차 트렁크에 함께 넣어 뒀습니다, 그리고는 밤이 되기를 기다렸고 10시가 넘어서야 정호는 승용차에 남편을 싣고 관악산 입구까지 갔습니다, 입구에 도착한 정호는 승용차에서 내려 트렁크에다 넣어 둔 벽돌지게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그 지게 뒷좌석에다 차 트렁크에 눕혀놓은 남편을 꺼내서 앉히고 쓰러지지 않게 지게에다 끈으로 묶은 다음 지게를 짊어지고 연주암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금순 씨도 같이 따라갔었지요?”
“...... 정호는 차분하게 지게를 내려놓고 남편을 묶은 끈을 다 푼 뒤에 연주암 아래로 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연주암의 높이가 수십 미터나 되는데 거기서 변 사장이 살아났다는 것은 기적 같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나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 날 남편의 시신을 경찰이 발견했을 뿐 아니라 경찰에서도 남편의 시신이 틀림없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죽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귀신입니까?”
“좋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잠깐만, 사람을 좀 만날 수 있을까요?”
“누굴?”
“용천사에 있는 주지 스님께 연락을 취해주셨으면 하는데......”
금순의 이야기가 여기까지면 구속하기에 충분했다. 정호의 생각으로는 용천을 만나게 해 주어도 금순은 빠져나갈 재주가 없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래서 큰 인심을 쓰듯이 쾌히 승낙을 해주고 말았다.
“알았습니다, 수사에 협조해 주셔서 부탁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다음 날은 변 재수가 초췌한 모습으로 경찰서에 잡혀서 들어왔다.
어제저녁에 이미 수사과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또 광호로부터도 연락을 받자 용천은 사전에 모든 사실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관계기관에 연락을 취한 후 경찰서에 들어왔다. 그리고 용천은 경찰서장을 만난 지 한 시간쯤 지났다. 그러자 상부 기관으로부터 서장에게 금순을 풀어 주라는 직접적인 지시가 있자 바로 금순이 풀려나왔다. 금순이 풀려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광호는 서장실로 뛰어 올라갔다.
“서장님, 이게 어찌 된 영문입니까?”
서장은 그 말에 대한 답변도 없이
“자네, 수고했네, 상부의 지시로 내부 인사이동이 있었네, 자네는 고향에서 가까운 의성으로 발령이 났네,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발령이라니요?”
“그렇게 됐네. 하던 수사는 박 형사에게 인수인계하게.”
참으로 기가 막히는 현실이었다. 오늘 하루만 조사하면 모든 진실이 완전하게 밝혀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발령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광호는 그만 서장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서장은 뒷짐을 지고 창문 쪽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바로 그때 창문 아래에서는 방금 전에 서장실에서 나갔던 용천이 금순을 만나는 모습이 서장의 눈에 들어왔다.
“최 형사, 그만 일어서 가보게.”
용천을 만난 금순은 너무 반갑고 고마워서 눈물이 핑 돌았다. 용천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걸기는 했었지만 하룻밤을 지나 바로 이렇게 감옥에서 풀려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금순은 정호의 도움을 받아 재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났고 정호와 함께 자산을 빼돌려 용천이 모르게 외국으로 달아날 궁리를 했으니 그를 대하기가 부끄럽고 죄송해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사실 용천은 병일 이로부터 이야기를 들어서 금순과 정호의 도피 과정을 손금 보듯이 알고 있었다. 용천은 한술 더 떠서 정호를 시켜 해외로 빼돌리려던 자금을 이미 자신의 손에 넣었고 병일이 까지도 미국으로 도피시켜 놓고 있었다.
그런 용천이 시침을 뚝 떼고서는
“자네 말이 옳아, 재수 그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 있더군, 물에 빠져 죽은 줄 알았던 정호라는 양반도 살아 있고 말이야, 정호 그 양반이 재수를 절벽으로 던진 장본인이라며? 재수는 그 젊은 양반을 자네 집의 지하실에 잡아 감금하고 다리 껍질을 벗겼다더군.”
용천은 말을 잠시 멈추고 차에서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꺼냈다.
“자, 이거 먹게, 그래야 이곳에는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지!”
두부였다. 금순은 쑥스럽지만 용천이 주는 두부를 받아먹었다.
“자, 가세.”
차 문안에 발을 들여놓자 금순은 우선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손톱 밑에 가시 같은 최 광호라는 형사부터 멀리 쫓아 버렸네, 그리고 정호라는 청년은 자네를 겁탈하려다 재수에게 들켰고, 이를 본 재수가 무기를 들고 달려들자 엉겁결에 골프채로 재수를 때려 혼절시켰고, 죽은 줄만 안 정호는 뒤가 두려운 나머지 재수를 승용차에 싣고 절벽에다 떨어뜨렸다, 그러나 절벽에 떨어진 재수는 나뭇가지에 걸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자네 집의 지하실에 모든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가 정호를 납치해서 지하실로 끌고 왔다고 했지, 그리고 그 원한을 갚기 위해 정호를 살해하려고 하다가 실패해서 잡혀 들어왔다고 만들어 놓았지, 사실이 그렇고...... 정호의 다리에 포를 뜬다고 한쪽 다리에 상처를 낸 증거가 있고 자네 지하실 작은방에 칠성판과 가죽끈, 칼 등 많은 증거물이 나왔으니 재수 또한 빼도 박도 못하고 수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겠지.”
“그럼, 나는......”
“자네는?...... 흠, 그날 정호가 재수 때문에 겁탈에 실패해서 떨고 있는 자네를 혼자 두고 재수를 차에 싣고 나가서 절벽에 버렸으니 자네 잘못은 없지, 다만 그 사실을 신고하지 못한 이유가 문제였는데 그것은 정호의 공갈 협박으로 인해 겁에 질려서 지금껏 신고하지 못했다고 진술서를 만들어 놓으라고 했으니 자네는 도장만 찍으면 만사는 끝나게 되어 있어, 오히려 남편의 죽음으로 지금껏 심적으로 시달려 사찰에 와서 여러 차례 불공을 드리고 마음을 치료하고 있었다고 해 놓았어, 경찰서에서는 당연하고 검찰에도 경찰서에서 올린 조서를 그대로 하라고 일러 놓았네, 자네는 아무 걱정 안 해도 되네.”
“고마워요, 오빠.”
금순은 이렇게 자상하게 자신을 도와주는 용천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이 세상에서 누가 이런 어려움에 처해있는 자신을 도와주겠는가. 부모도 감히 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녀는 용천의 다른 한 손을 꼭 잡고 이제는 정말로 용천을 놓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금순은 몇 번이고 용천에게 해외로 자산을 빼돌린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우선 병일 이 가 다니는 회사를 찾아가서 그 결과를 알아본 다음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말을 아꼈다.
금순은 마음이 안정되는 동안 용천사에 있기로 마음먹었다. 그 사이 용천은 병일 이로부터 받아 챙긴 금순의 돈 일부를 정당 공천자금으로 넣은 후 김 총재로부터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부터 용천이 국회의원이 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알만한 지역 유지 몇몇은 인사를 하러 오는 이도 있었다.
용천은 기회를 봐서 김 총재와 술자리를 만들 계획을 생각했다. 그 자리에 금순을 단장시켜 김 총재에게 수청들 계획도 생각하고 있었다.
“계집 싫어하는 남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물며 단장시키면 어느 여성 못지않게 아름다운 여인이 금순인데....... 흐흠.”
용천은 금순의 모든 것을 다 빼앗고 거기다가 자신에게 의지하려는 마지막 순정마저도 자신의 출세를 위해 방패막이로 이용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의성 단촌 구계리 시동골,
문도는 아침 일찍부터 들에 나가서 콩밭을 매고 들어왔다. 콩밭에 풀이 수북하게 쌓였다고 아내가 며칠 전부터 매라고 다그쳤으나 차일피일 마루다가 오늘에서야 땡볕을 피해 새벽부터 반나절 동안 밭을 매고 들어왔던 것이었다. 덜 맨 콩밭은 더위를 피해 내일 아침 일찍 맬 예정이었다. 한낮에 햇살이 워낙 뜨거워 오금 밑이 땀으로 배서 달라붙는지라 해뜨기 전 시원할 때 들에 나가서 콩밭을 매고 나니 제법 마음이 홀가분했다.
문도는 찬물에 말아서 점심 한술을 뜨고 낮잠을 청하려고 목침을 베고 마루에 누웠다. 벌써 파리 몇 마리가 콧구멍과 입술 주위에 올라와서 문도를 귀찮게 굴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파리를 쫓고 난 후 셔츠를 젖가슴 위까지 올려붙였다. 마침 산들바람이 불어와 더욱 가슴을 시원하게 어루만져 준다.
그는 긴 기지개를 켜면서 잠에 취한 눈을 하고 무심코 마당을 내다봤다. 마당에는 한여름의 땡볕이 내리쪼이고 있었고 닭들도 더위에 못 이겨 건너 감나무 밑에서 쪼그리고 앉아 꼬박꼬박 졸고 있었다.
“덥긴 더운 모양이네.”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막 낮잠이 들려는 찰나였다. 밀짚모자를 쓴 건장한 사내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 누구요?”
“실례합니다.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밀짚모자를 한 손으로 벗어 들고 부채를 부치듯 얼굴에 대고 흔들면서 말쑥한 사내가 인사를 하면서 댓돌 위로 올라섰다.
“예, 올라 오이소.”
그는 얼른 뒤로 비켜서 자기가 앉았던 자리를 만들어 낯선 손님에게 권하며 맞이했다.
“뉘신지요? “
“아 예, 저는 권창수라고 합니다.”
“예, 지는 천 문도라 하니다, 어디서 오시는 분입니껴? 식사는 하셨습니 겨?”
“아직... 사실은 집도 절도 없는 신세올씨다.”
문도는 사내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생기기도 멀쑥했지만 옷 입은 태가 어디를 봐도 얻어먹을 사람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문도는 궁둥이를 쳐들고 얼른 올라 오리는 시늉을 하면서
“아이고 예, 보리밥이라도 한 끼 하실랍니껴?”
“고맙습니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문도는 얼른 내려와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내가 부뚜막에 올려놓은 양푼이에 떠 놓은 밥을 그릇에 떠서 자기가 먹던 개다리상에 간단한 상을 다시 봐왔다.
“찬은 없지만 시장끼는 면할 수 있을 겁니다.”
말 그대로 찬물 한 그릇에 고추와 된장이 전부였다.
“아이고 별말씀을요, 밥만 있어도 감지덕지입니다.”
창수라는 사내는 며칠 굶은 사내처럼 허겁지겁 맛있게 밥을 한 그릇 다 비우고 냉수 한 사발을 들이켰다. 이를 지켜본 문도는
“요기는 대셨는지 몰씨더.”
“잘 먹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연신 굽실거리며 절을 한다.
“어디로 가시는 길이 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배를 채우고 나니깐 이제 좀 정신이 듭니다. 천형, 초면에 실례라는 걸 잘 압니다만 부탁 하나 드립시다.”
“부탁은 무슨?......”
“제가 여기 천형 집에 좀 머무르면 안 되겠습니까? 밥만 먹여 주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으니 젊은 사람 하나 살려 주는 셈 치고 내년 봄까지라도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우리 집은 방도 그렇고......”
하고 문도는 잘 알지도 못하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 미안하면서도 곤란한 표정을 짓자
“아 저기 뒤주가 달린 방이라도 좋으니 신세 좀 지면 어떨까요?”
마음 약한 문도는 아내 때문에 곤란하다고 말하려다가 남자의 체면도 있는지라 한참을 주저하다가
“허허 참, 내년 봄까지라고 그렀는가? 그럼 그래 보지요.”
하고 원래 남의 부탁을 거절할 줄 모르는 문도는 대충 창고로 쓰던 방을 치우고 권창수라는 사람을 기거하도록 했다.
해그늘에 들어온 천 씨의 아내는 낯 모르는 사내를 일꾼으로 들였다는 말을 듣고 문도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일부러라도 머슴을 구하려는 판국에 남편이 이미 결정하여 들여놓은 사람에게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두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사람은 자기가 처신하기 나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창수란 사내는 붙임성 있게 문도 아내에게 형수, 형수 하면서 따르니 금방 시동생처럼 가까워지게 되었다. 창수는 일도 잘하고 힘도 세서 농사일에는 적격이었다. 한 번도 돈을 달라거나 투정을 하는 일이 없었다. 우직하고 고집은 세 보였지만 보기와는 딴판으로 사람이 고분고분하고 친절했다. 또 부지런도 했다. 이웃과도 가까이 지내며 천 씨를 잘 따르니 어느덧 천 씨도 친동생처럼 아끼며 허물없이 지내게 되었다.
문도는 본래 성이 천가라 어릴 때부터 7대 상놈의 성이라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문도뿐이 아니었다. 문도의 어미 아비까지도 이웃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말을 놓았으니 문도는 기를 펴고 살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은 시절이 바뀌어 문도에게 말은 놓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말투나 행동 어디엔가는 상놈의 자손이라고 무시하는 경향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창수는 문도를 깍듯이 형님처럼 대접하고 따르니 문도로서는 다른 이웃보다 창수에게 오히려 정이 더 갈 수밖에 없었다.
창수가 오고부터는 문도네 집안이 화목하기 시작했다. 창수가 오기 전까지는 문도네 집안에서는 별로 대화도 없었고 또한 주위에 친한 친구도 없었기 때문에 집안이 무척 썰렁했다. 그러나 창수가 오고부터는 사람 사는 것 같이 집안에 이야기꽃이 피기 시작해서 문도 내외는 오랜만에 사람 사는 맛을 느낄 수가 있었다.
늦은 여름 어느 날이었다. 논도 세 벌 논을 다 매고 추수를 기다리는 막바지 여름이라 모두들 한가했다. 창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늘도 들을 한 바퀴 돌아봤다. 사실 세 벌 논을 매고 나면 할 일 없는 때라 그는 동네 정자로 내려왔다. 그날따라 정자에는 사람들도 없고 한가했다.
창수는 정자에 걸터앉아 드높은 하늘을 향해 높이 날고 있는 고추잠자리를 바라보면서
“정말 이제 가을이 오는구나!”
하며 무심코 긴 한숨을 쉰다. 그늘은 한여름이나 다름없는 땡볕도 불어오는 산들바람으로 시원하게 만들었다.
“계절을 무시할 수가 없네!”
그는 정자 마루에 누웠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정자에 누우니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기며 그만 맛있는 낮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창수가 한참 잠이 들었을 때 동네 젊은이들 여럿이 정자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정자 위로 올라와서 잠든 창수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자리를 잡았다. 창수는 어렴풋하게 청년들이 온 것을 느꼈지만 다시 잠들고 말았다. 그때 한 젊은이가
“야, 오늘 이걸 논에다 세울라는데 어떠니? 잘 만들었지?”
하고 허수아비 만든 것을 앞으로 내보이면서 정자 끝에 걸터앉았다.
“요새는 새들이 약아빠져서 허수아비를 세워도 꿈쩍도 안 한다.”
“그래서 여기 있는 허수아비 손에 새끼줄을 매서 깡통과 헝겊을 매달아 놓으려고, 허수아비가 움쩍거리면 새끼줄이 흔들려서 깡통 소리가 나도록 하려고, 그러면 헝겊도 같이 너풀거려서 새들이 놀라 달아나게 하잖나.”
하고는 창수가 자는 머리맡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털썩 정자에 걸터앉았다. 허수아비가 마룻바닥에 자빠지면서 함께 손에 묶을 새끼줄이 당겨서 그만 잠든 창수의 목 위에 걸쳐지고 말았다.
“야, 심심한데 오랜만에 한판 하자, 어때? 술내기 한판 괜찮지?”
“좋다, 한판 벌리자.”
키 작은 젊은이가 뒷발을 들고 정자 위에 걸쳐 있는 대들보 사이에서 화투를 돌돌 말은 담요를 꺼내자 모두 우르르 화투판으로 몰렸다. 화투를 꺼낸 키 작은 사내가 화투를 몇 차례 두드려 쳐서 깐 자리에 올려놓았다.
“두장 무이데이?”
“좋다, 자, 기리 하고......”
모두 둘러앉아 한참을 화투판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옆에 낮잠을 자던 창수가 땀을 뻘뻘 흘리며 무엇인가는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화투 두 장을 조르며 열중하던 이들이 모두 고개를 돌리고 창수를 바라보는데
“미주야, 내가 잘못했어, 이 목 좀 놓아줘, 제발...... 숨이 막혀 죽겠어, 어서, 응?”
하면서 손을 꼿꼿이 편 채로 땀을 흘리며 꼭 누가 목을 조이듯이 숨을 헐떡거렸다. 한 젊은이가 창수를 막 흔들어 깨우려고 하자 다른 사내가 재미있다는 듯이 이를 말리면서
“잠깐 두고 보그라.”
“가위눌린 모양이다, 깨워야 한다......”
“아이다, 잠깐만 두고 보레이.”
그때 창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또다시 잠꼬대를 하기 시작했다.
“미주야, 한 번만 용서해 다오 응, 나는 미주 너를 죽이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어, 다른 이들이 너를 죽이라고 했어, 한 번만, 이 목을 놓아줘 응.”
하며 애원하듯이 할딱거렸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가위가 눌려 할딱거리는 것을 이를 보다 못한 한 사내가 창수에게 눈을 돌리자 창수의 목에 새끼줄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아이고, 이 어른, 새끼줄이 걸려가주고 누가 목을 조르는 꿈을 꾸는구먼......”
하면서 목에 얹힌 새끼줄을 옆으로 걷어 내며
“어이, 창수 씨 일어나게, 웬 잠꼬대는......”
하면서 딱하다는 듯 창수를 깨웠다. 그 바람에 창수는 벌떡 일어났다. 그의 온몸에는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무슨 무서운 꿈이라도 꿨나? 잠꼬대는 그리 거하게 하는고?”
“아닙니다, 아닙니다, 형님들이 노시는데 죄송합니다, 그만 곤해서...... 내가 잠꼬대를 심하게 했어요?”
“심하기는...... 별 다른 말은 없었네만, 무슨 무서운 꿈이라도 꿨는가?”
“아니...... 별로......”
하고는 창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빼고 어디론가 급히 사라졌다.
“그 사람 이상하네, 미주는 누구고 죽일 마음은 없었다 능게 뭔 소린가?”
“네가 새끼줄을 잘못 나서 저 사람 목에 걸려 그런 거 아이가.”
“허허, 미주라는 아가씨가 내가 논 새끼줄로 목을 조르는 꿈을 꿨던 모양 이제?”
“그렇게, 참 이상도 하제,”
모두들 잠꼬대하는 소리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잠을 자다가 가위눌려서 그러려니 생각하고 한참 뒤에는 모두 그 일을 잊어버렸다.
그들 중에서 화투를 내려놓았던 키 작은 사내의 먼 친척 중에 의성에서 경찰관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평소 그는 창수가 인물도 그럴듯하고 덩치도 큰사람이 이런 촌 동네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남의 머슴살이를 할 사람이 아닌데 그것도 천가네 집에서 머슴을 산다고 하니 뭔가는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정자에서 낮잠을 자다가 잠꼬대를 하면서 한 말이 너무 이상하고 마음에 남아 한번 경찰관을 하는 친척이 다니러 오면 이야기해 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상생활로 돌아간 어느 날이었다.
창수는 아침을 먹고 평소와 같이 문도와 함께 들에 나가려고 신을 막 신는데 경찰관 두 명이 들어왔다. 그들 중 한 명은 광호였다.
“실례지만 여기 창수란 사람이 살고 있지요?”
하자 문도가 의아한 표정으로
“예, 그런데 왜요?”
하면서 창수를 흘끔 쳐다봤다. 창수는 자기를 찾는다는 경찰관의 말에 벌써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그는 경찰관의 대답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신을 신은 채로 마루를 건너뛰어 뒷마루 문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는 가볍게 낮은 뒷담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뒷담을 넘었을 때는 벌써 도망칠 것을 미리 예상했던지 경찰관이 잠복하고 있었다. 창수는 배운 무예 솜씨로 경찰관에 대들었으나 쫓아온 경찰관과 합세해서 달려드는 바람에 그만 잡히고 말았다.
창수는 도연이가 숨어 다니면서 쓰던 가명이었다. 도연은 주지의 지시에 따라 의성에 있는 00사로 숨어들었던 것이었다. 그날 주지 용천의 지시를 받고 양평에서 아예 멀리 떨어져 있는 경북에 있는 00사로 피신해 온 것이었다.
도연은 00사 명부전 옆에 있는 객실에 머물면서 주지인 용천의 말대로 절 밖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절에 들어오면서 공부를 한다고 말하고 들어 온 터라 누가 보면 공부하는 시늉을 하자니 그것도 여간 힘드는 노릇이 아닐 수가 없었다. 글이라곤 초등학교 시절에 겨우 본 것이 전부인 그는 책만 펴 들면 잠이 오니 차라리 들어올 때 다른 핑계를 대고 들어올 걸 하고 후회를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터였다.
그러자니 기껏해야 절 입구의 용왕당 밑에 있는 연못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전부였다. 필요한 돈은 총무승에게 올 때 받은 돈으로 해결했다. 다른 곳에 쓸 돈은 문밖을 나가지 않으니 별로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먹는 쌀값과 반찬값은 절에다 시주를 해서 00사 식구들이 혹 의심을 하지 못하도록 입막음을 해놓았었다.
그런 생활을 일 년 가까이했으니 도연으로서는 좀이 쑤실 수밖에 없었다. 자기 멋대로 사람을 다루던 그가 아무도 대꾸해 주지 않는 곳에서 공부를 한다고 고분고분 숨어서 지낸다는 것이 죽기보다도 싫었다.
한 일 년을 일없이 보낸 그는 자기를 잡으러 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 사람들도 자신의 일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도연은 우선 여기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먼저 00사 아래로 내려가 농군들 틈에 끼어들어 가서 자신을 속이고 생활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들과 단 하루라도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술도 마시며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지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는 주지가 한 삼 년을 죽은 듯이 숨어서 보내라는 당부를 저버리고 간단한 봇짐을 싸서 00사 아래에 있는 시동 골로 내려온 것이었다.
창수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가 가명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창수의 지문을 조회하자 용천사에서 살인 미수로 도망, 지명 수배된 김 도연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난 광호는 미묘한 전율을 느꼈다.
“그렇다면?”
일 년 전의 일이 새삼스럽게 광호의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모르는 것이 세상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호 생각으로는 용천사 주지가 어느 윗선을 이용해서 압력을 넣었을 터이고 그 때문에 자신이 사건을 맡아 한창 파헤치려고 하던 때에 이곳 고향 가까운 경찰서로 쫓겨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그 사건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이곳 지방으로 발령이 나서 온 것이 무척 서운했었다. 어머니가 용천사 사람들에 의해서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함께 파헤치려다가 사건을 마무리하지도 못하고 온 것이다.
그런데 일 년이 조금 넘어서 바로 자신이 근무하는 의성에서 주범인 도연을 잡은 것은 자신과 용천의 관계가 숙명적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일단 사건을 자신이 조사하기로 마음먹고 보고를 올렸다.
도연은 뻔뻔스럽게도 끝까지 자신의 행위를 부인했다. 그러나 광호가 도연을 심문하는 동안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도연이 광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훨씬 전부터 용천사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이었다.
“당신 안동에서 올라온 환자 한 사람이 죽은 것을 기억하지?”
“누구 말씀인가요?”
광호는 고개를 쳐들고 빤히 바라보는 도연을 향해
“당신, 그때 사찰에서 부검했던 일 기억이 안 나?”
사실 도연은 무수한 환자들을 치고 때려봤지만 잘못해서 사람이 죽은 것은 두 번밖에 없었다. 당시 자신이 묶어 두었던 환자가 죽자 피해자 가족이 몰려왔고 그 바람에 사찰 식구 모두가 그들을 피해 달아났던 사실을 도연이 모를 턱이 없었다. 그때 사찰 창고에서 부검을 했던 일과 주지가 피해 당사자 식구에게 많은 돈을 주고 그 일을 해결했던 일을 도연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당신, 그 여자를 왜 죽였지?”
갑작스럽게 자신을 질책하는 질문에 긴장하고 있던 도연은 엉겁결에
“무슨 말씀을요, 내가 안 죽였어요, 일을 다 보고 들어오니 죽었을 뿐이지 나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어요......”
“당신이 손발을 묶어 놓고 매질을 했잖아?”
“매질을 하다니요? 때린 적이 없어요, 그 아주머니가 사람이 없는 동안 자주 도망을 가기 때문에 내가 묶어 놓고 잠시 자리를 비우고 일을 보다가 묶어 놓은 걸 잊어버리고 밤새 그대로 둔 것이 이튿날 죽었을 뿐이어요.”
“당신이 매를 대지도 않았는데 멀쩡한 사람이 죽긴 왜 죽어?”
“참내, 멀쩡한 사람이 수용소엔 왜 왔겠어요, 밥도 많이 먹고, 똥도 싸서 뭉개고, 감시하는 사람만 없으면 달아나고 그래서 수면제는 약간 먹였지만...... 여하튼 절대로 나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착한 사람이 미주는 왜 죽였어요?”
“.......”
“이 사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당신 스스로 수면제를 먹이고, 팔다리를 묶고, 사람을 때리고, 거기다가 환자에게 일을 시키다가 곤봉으로 때려죽이고, 도대체 당신이 사람이요 뭐요?”
“내가 사람을 때려죽여요? 나는 사람을 때린 적도 없고, 죽인 적도 없어요.”
“그럼 김 철이란 환자를 곤봉으로 때려 숨지게 한 건 누구입니까? 당시 같이 근무하던 기주라는 감독관이 당신이 곤봉으로 때려 숨지게 했다고 진술했고 그 때문에 지금 당신이 지명 수배된 사실을 모른단 말이요? 그래도 우길 거요?”
“허 참, 내가 죽였다고요? 그 자식이? 자기가 곤봉으로 때려죽여 놓고 허 참내.”
“당신은 한두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당신은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도 그 죄는 살아서 다 못 갚어.”
“나는 죽이지 않았단 말이요, 그 자식을 대질해 보면 알 것 아닙니까?”
“좋소, 당신 말을 믿어 보기로 합시다, 그리고 미주는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걸 아시오, 배속에 태아만 사망했을 뿐 미주는 살아 있다는 걸 말이오.”
“예? 미주가 살아 있다고요?”
“그렇소. “
한참을 생각하던 도연은 굳은 얼굴을 하고 난 후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는 용천사의 직원일 뿐이오, 어느 수용소든 다 마찬가지지만 환자들에게 수면제를 먹이는 것은 어느 곳이나 다 똑같습니다, 미친 환자들에게는 수면제를 먹여야만 고분고분하기 때문에 수용소마다 상식화되어 있거든요, 용천사라고 별다르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당연히 우리에게 수면제를 먹이라고 줍니다, 또 우리들의 권한은 매우 큽니다, 적어도 환자들을 다루는데 필요한 모든 행동을 우리 재량에 의해 처리하라고 주지는 우리에게 부여합니다, 환자를 때리든, 밥을 먹이든, 굶기든, 죽이든, 살리든 그것은 우리들의 판단과 재량에 의해서 결정합니다, 만약에 누구의 실수든 간에 환자가 죽으면 담당 검시관은 대충 시신을 보고 사망 진단서를 써서 줍니다, 만약에 환자의 가족이 이를 항의하면 주지가 나서서 환자 가족에게 돈을 주고 처리해 줍니다, 아마 그때 그 아주머니 가족에게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환자를 다루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도연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한번 물을 마시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실 그때 그 아주머니는 내가 실수해서 죽었습니다, 내가 손발을 묶어 놓은 걸 깜빡했습니다, 이튿날 방에 들어갔더니 똥을 싸고 죽어 있었어요...... ”
“김 철의 죽음은 어찌 되었어요?”
“우리 사찰에는 많은 밭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밭은 우리가 환자들을 이용하여 작물을 심고 가꿉니다, 비가 오던, 땡볕이 내리쪼이던 작업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환자들을 데리고 작업장이 뛰어듭니다, 그러자니 환자들의 반발도 심심찮게 일어납니다, 우리는 4~5명이 한 조가 되어서 이들을 감시합니다, 만약에 작업 도중 잠시라도 한눈을 파는 환자가 있으면 여지없이 곤봉으로 그들을 제압합니다, 만약에 환자들이 조금이라도 마음이 해이해지면 어떠한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이런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아주 엄격하게 대해줍니다, 그날 작업 도중 한 작업자가 꾀를 부리는 모습을 내가 목격하고 곤봉으로 그의 등줄기를 후려쳐서 제압시키자 갑자기 김 철 그 사람이 일어나 나에게 대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힘이 너무 강해서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의 손아귀에 목이 잡혀 꼼짝하지 못하자 이를 본 기주가 달려왔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곤봉으로 그의 머리를 가격했습니다, 나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김 철은 내 목을 잡은 손을 스르르 놓더니 사지를 쭉 뻗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체를 감독관들과 같이 묻어 버렸군요.”
“예.”
“그러면 미주는 왜 죽이려 했습니까?”
“미주는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당시 나는 아내와 말다툼으로 한 달 이상을 별거 중이었고 그런 와중에 미주가 들어왔습니다, 미주는 정신이상이라기에는 너무 얌전하고 조용했습니다, 그런 그녀를 왜 감독관 바로 옆 특별보호실에 넣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감독관들도 미주의 미모에 반해 곁눈질을 자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수용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환자가 행패를 부렸습니다, 우리는 그를 제압했고 수면제를 복용시켜 잠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감독관이 총무승에게 잠시 보고하러 내려간 사이였습니다, 나는 미주가 어떻게 하고 있나 궁금해졌습니다, 나는 열쇠를 들고 미주가 있는 방 가까이로 갔습니다, 주변 모든 환자들은 잠이 들었는지 너무 조용했습니다, 미주의 잠자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고 순간 나는 미주에 대한 욕정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마침 미주는 그 까맣고 예쁜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같이 근무하던 감독관도 없는 터라 나는 미주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옆 창고로 데리고 나온 나는 그녀를 겁탈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다시 그녀를 데리고 수용소 안으로 들어오다가 보고하러 갔다 운 감독관에게 들키고 말았어요, 순간 그는 내 얼굴을 보고 함께 있는 미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금방 알아본 것입니다, 그는 미주를 낚아채더니 자기도 그 창고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 일이 있는 후로는 감독관들은 너도나도 미주를 데리고 놀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미주가 임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 아이가 누구의 아이냐는 것입니다, 결국 아이를 낳게 될 때를 생각했을 때는 감독관 모두에게 사람을 죽였을 때 보다도 더 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차라리 사람을 죽여 버렸으면 그 존재가 없어져 버리지만 환자가 배가 불러 혹 사실이 들키는 것도 문제였고 새로운 아이가 탄생된다면 더 큰 문제가 발생될 것이 우려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주를 죽여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불통이 처음 시작한 내게로 떨어졌고 결국에는 미주를 죽이라는 권유를 받게 된 것입니다.”
“용천사! 대단한 곳이로군!”
광호는 도연의 진술을 토대로 용천을 잡을 세부 계획을 세웠다. 그를 한 번 잡으려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고 난 뒤 완벽하게 그를 체포해야지 미꾸리지 같은 용천을 어설프게 잡아들이다가는 오히려 역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때 광호는 수사과장의 호출을 받았다.
“자네 김 도연 사건 수사하고 있지?
“예!”
“검찰에서 수사를 종결하고 즉시 그 사건을 검찰로 넘기라는 연락이 왔어, 귀찮은데 잘 됐지 뭐, 자기네가 수사한다니 빨리 넘겨주게.”
“뭐라고요?”
“왜?”
“용천이라는 중놈이 벌써 손을 쓴 거로군, 안 됩니다, 절대로 넘겨줄 수 없습니다.”
광호는 매우 불만스러운 말투로 수사과장에게 항의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수사과장도 강압적으로 나왔다.
금순은 병일이의 소식을 듣기 위해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사무실은 명동 성당 바로 옆 골목 5층 건물을 쓰고 있었다. 얼마 전에 정호와 한번 와 본 회사라 경리 아가씨가 금순을 알아보고 인사를 한 후 자리를 권하며 무슨 차를 하겠느냐고 물었다. 금순은 며칠 전에 경찰서에서 곤욕을 치른 터라 속이 쓰려 홍차를 부탁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사님은 아직 연락이 없어요?”
금순이 여직원에게 물었다.
“예, 며칠 전에 외국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하시고 지금껏 무소식이에요, 뭣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금순은 이상한 예감이 선 듯 들었다. 회사에서 분명히 미국 출장을 간다고 했을 테고 아마도 돈도 회사 명의로 경리인 아가씨가 지사에 송금했을 터인데 금시초문이라는 듯한 반문을 하자
“아니, 미국지사로 출장을 가지 않았어요?”
“지사라니요? 우리 회사는 미국지사가 없는데요, 저희 회사지사는 일본에만 있어요.”
“뭐라고요? 미국에 지사가 없다고요?”
금순은 뒷머리를 무엇으로 얻어맞은 듯 아찔했다. 분명히 그 많은 돈을 사기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정호 씨로부터 받은 돈은?”
“예~ 그 돈은 오 이사님 통장으로 입금시켰어요.”
“오 이사님이라면 병일씨 말이지요?”
“네, 정호 씨가 오 이사님께 당분간 맡겨 놓으라고 했다면서요?”
“그러면 미국지사로 송금하라고 지시하지 않았다고요?”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는데요.”
금순은 밖을 뛰쳐나왔다. 지나는 사람들과 어깨가 부딪히도록 비틀거리고 있었고 그녀의 눈동자는 풀려 있었으며 명동 길을 무작정 걷고 있었다.
찌푸린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내린 비에도 사람들은 어디서 우산을 구했는지 모두 우산을 쓰고 길을 걷고 있었다.
우산도 쓰지 않은 금순은 온몸이 금방 비에 젖었다. 머리로부터 흘러내린 비는 부레 지어가 보이도록 그녀의 블라우스를 흠뻑 적셔놓고 있었다. 사람들은 힐긋힐긋 금순을 쳐다보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가던 한 사내가 우산을 금순에게 받쳐 들고 무슨 수작을 하려다가 풀린 눈동자를 보고서는 미친년이라고 생각했는지 얼른 떨어져서 가던 길을 다시 가고 있었다.
아침에 금순이가 서울에서 볼일이 있어 일을 보고 오겠다며 나가려 하자 용천은 금순이가 병일 이를 만나려고 외출한다는 것을 다 알면서 일부러 시침을 떼고 승용차를 태워 주겠다고 한마디 하자 금순은 혹 용천이 이 사실을 알까 봐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병일이의 회사를 용천과 같이 가면 자신이 외국으로 도피하려 했던 일이 탄로 날 것은 빤한 일, 그리되면 용천을 속이고 벌인 일이 들통이 나서 얼굴을 들고 용천을 보지 못할 일인데 같이 가는 일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직 천천히 돈의 소재를 확인하고 난 뒤에 기회를 봐서 용천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다음에는 용천과 함께 캐나다에서 밀월을 함께 즐겨 보자고 조르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금순이가 외출을 한다고 했을 때는 이미 병일을 만나러 간다는 것을 용천은 알고 있었다. 금순이가 지금 그곳 말고는 어디 한 곳에도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리고 병일 이 가 있던 사무실에 가면 돈을 사기당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미친 듯이 헤매다가 결국에는 용천을 다시 찾아와서 돈을 찾아 달라고 말할 것도 알고 있었다.
용천은 김 처사더러 국수역까지 봉고로 태워 주라고 이르고 금순이 더러는 볼일을 보고 오는 즉시 전화하면 그리로 데리러 가겠다고 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를릉.”
전화 벨소리에 바깥으로 나가려던 용천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용천의 정보통인 수사과장의 전화였다.
“어이 김 의원, 도연이가 잡혔어.”
“뭐라고? 도연이가?”
“그래, 의성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있데.......”
“알았네, 고마우이.”
“담당 형사가 여기서 골머리를 썩여 쫓아냈던 최 광호란 놈이야.”
“최 광호? 그때 지방으로 쫓아냈던 그 애 말인가?”
“그래, 하필이면 도연이가 그 애 근무하는 데서 잡힐 게 뭐람.”
“알았네, 나중에 연락함세.”
전화를 끊은 용천은 기가 막혔다. 지금껏 도연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일도가 도연이 있는 사찰에 매달 일정한 금액을 부쳐 주고 용돈도 넉넉하게 부쳐 주었으니 지금껏 아무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도연이 잡혔다고 하니 이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것도 여기 경찰서에 근무하면서 자신의 뒤를 집요하게 파헤치던 광호라는 형사가 또다시 자기와 연관된 도연을 수사한다니 더욱 골치가 아파왔다. 그때 광호를 쫓아 버리지 말고 아예 경찰복을 벗겨 버릴 것을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같은 고향 출신인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왜 자꾸 따라다니면서 골탕 먹이려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조사를 끝내고 서류를 완벽하게 만들어야 해, 기소가 되면 사건을 무마하기 점점 어려워!”
시작 단계에서 사건을 아주 묵사발을 만들어 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용천은 총재를 직접 만나기 위해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날이 저물도록 비는 쉬지 않고 내렸다. 어디서 술을 마셨는지 어떻게 용천사까지 왔는지 금순은 술에 취해 온몸이 젖은 채로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밖으로 나간 용천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고 일도는 땅굴을 파는 일로 중요 자재를 구입하기 위해 나가고 없었다.
김처사와 그의 처 이보살도 아랫마을 자기 집으로 내려갔고 넓은 경내에는 공양실의 순자만 방금 설거지를 마치고 방 안에서 쉬고 있었다.
금순이가 실성한 사람처럼 술이 취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순자는 얼른 방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아이고 어디서, 아이고 술 냄새......”
순자는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그녀는 금순을 친동기 같이 조심스럽게 안아서 눕혔다.
“쯔, 쯔 이 옷 좀 보게, 다 젖었네, 잘못하면 병날따.”
옷을 갈아입히고 요를 깔고, 이불을 덮어 눕히고 순자는 금순이의 자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본다. 순자가 이렇게 가까이서 금순을 바라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금순의 볼을 손으로 만져 보면서
“어쩌면 이렇게도 곱고 예쁠까?”
같은 여자라고 여자의 예쁜 모습이 순자라고 추하게 보일 턱은 없었다. 깎아 만든 인형처럼 아름다운 금순의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비록 얼굴은 다르지만 친정동생이 잠자는 듯한 가까운 정이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금순의 머리를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 아직 채 마르지 않는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주고 있었다.
때마침 금순이의 눈이 번쩍 떠졌다. 금순은 오랜만에 부엌에서 일을 마치고 막 나온 구수한 어머니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모습의 인자한 중년의 눈동자를 발견했다.
수건을 덮어쓰고 부엌일을 해서 그렇지 십수 년을 남자를 상대하지 못한 순자의 모습도 찬찬히 바라보면 주름 하나 없는 못난 얼굴은 아니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말았다.
“보살님, 나는 어떡해요? 흐흐흑.”
애처롭게 흐느끼는 금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면서
“뭔 일인데 그리 술을 드셔니까?”
하자
“아니, 보살님도 고향이 안동입니까?”
하고 울던 모습을 그치고 벌떡 일어나 놀란 모습으로 순자를 쳐다봤다.
“예, 나는 권 보살님이 안동사람이라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니다.”
“아, 예......”
동병상련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고향 언니를 만나서 그럴까 금순은 다시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금순의 마음이 오죽 답답했을까.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오죽 없었으면 순자에게 털어놓을까.
“내 전 재산을 사기당했어요, 그놈 병일이라는 놈한테...... 이제 나는 알거지가 되었단 말이에요, 어떡하면 좋아요? 네?”
금순의 입에서 병일이란 이름이 오르자 순자는 깜짝 놀랐다. 얼마 전에 남편 일도와 주지 용천이 공양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때 잘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 금순이의 여권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미국을 간다는 둥 돈을 빼돌린다는 둥 하는 것을 잠깐 엿들었기 때문에 지금 금순의 말을 듣고 보니 대충 돌아가는 앞뒤가 서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병일이란 그 사람이 돈을 빼돌렸단 말이껴?”
“그래요, 그 많은 재산을 미국으로 빼돌렸단 말이에요.”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생각하던 순자는
“내 생각으로는 병일 이 가 혼자서 돈을 미국으로 빼돌린 것이 아이씨더, 내가 한날 내 남편하고 주지하고 금순 씨에 대한 이야기 하는 것을 언뜻 들었니다.”
“무슨 이야기를요?”
“금순 씨가 병일이란 사람한테 여권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니까?”
“예, 병일이라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돈도 송금해 달라고 했더니 이제 봤더니 사기를 당했지 뭡니까.”
“아이씨더, 분명히 돈이 없어진 데는 주지도 연관되어 있을 꺼씨더, 다시 한번 알아보소.”
“주지가? 용천오빠가?”
금순은 울음을 그치고 날 벼락같은 순자의 말에 허탈감에 빠져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젖었던 금순은 고개를 흔들었다. 용천만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아마도 공양주 보살이 무엇인가 잘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요, 잘못 들었을 겁니다.”
금순은 턱없는 소리라는 듯이 오히려 순자가 잘못 들었을 것이라고 말하자
“허허, 이거야 원!”
하고 순자는 더는 용천을 의심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어쨌든 병일 이 가 잡혀야 병일 이 가 가져갔는지 주지인 용천이 가져갔는지를 분명하게 알 것인데 저 넓은 미국 땅덩어리 어디에 가서 찾을 것인지 금순은 막막했다. 그래도 여기에 올 때는 용천을 믿고 의지가 되어서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 여길 들어왔는데 이제 와서 공양주 보살의 말을 듣고 보니 금순이 혼자 몸으로는 도저히 해결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금순은 천 회의 고아가 된 느낌이었다.
그때 밖에서 차 시동 끄는 소리가 들리고 조금 뒤에 공양실로 용천이 들어왔다. 금순은 용천이 들어온 것을 알아채고 얼른 눈을 감아 버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무슨 할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보살님이 잠이 든 모양이군요.”
하고 순자를 바라보면서 용천은 빙긋이 웃는다. 그리고는
“아마 곡차를 많이 하셨을 겁니다, 혹 좀 뒤라도 깨어나면 내 방으로 오라고 이르세요.”
하고 순자에게 이르고 건너편 주지실로 향했다. 용천의 발자국소리가 멀어지자 금순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보살님, 아니 언니, 내가 술을 많이 마신 것을 주지 스님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내 몸에 술 냄새가 많이 나요?”
“술 냄새가 나기야 나지마는 문 앞까지 날 턱은 없잖니껴, 그나저나 얼른 가보이소, 무슨 눈치를 차린 듯하니다.”
“그렇지요? 언니, 분명히 내가 오늘 술을 먹을 거라는 것을 미리 다 아는 듯했지요?”
금순은 대충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은 후 주지방에 들어가자
“술을 먹는다고 해결이 되나? 그놈은 벌써 돈을 챙겨서 미국으로 날랐고 돈을 맡긴 자네와 정호는 살인 미수로 경찰에 들어갔고, 돈의 원주인인 재수 또한 경찰 신세이니 누가 돈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다행히 내가 정호에게 모든 일을 뒤집어씌워서 자네를 빼내긴 했지만 말이야, 병일이 그놈은 마음 놓고 돈을 찾아서 호의호식하겠지.”
용천은 병일이 와 짜고 이미 돈을 찾아서 자기와 같이 나누어 먹고서는 금순에게 엉큼스럽게 시침을 뚝 떼고 말하자 금순이는 의아스럽게 물었다.
“오빠가 어떻게? 그럼 다 알고 있었어요?”
“큰 기대는 하지 마, 내가 최선을 다해 찾아 줄 터이니 기다려봐.”
그 말에 금순은 순자가 한 말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시 용천을 철석같이 믿기 시작했다.
그렇게 금순을 안심시킨 용천은 드디어 국회의원으로서 금배지를 달고 국회를 나가게 되었고 용천사는 일도와 혜천에게 맡겨 놓고는 가물에 콩 나듯 잠깐 다니러 왔다가 가버리곤 했다.
용천이 없는 요양원을 위시한 용천사는 일도가 장악하여 요양원 내 환자들에게는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시켜 버렸고 그들을 더욱 혹독하게 관리하면서 땅굴공사와 농사일에 부려 먹었다. 특히 땅굴은 외부와는 철저히 비밀로 이루어졌는데 문제는 땅굴을 파냄으로 해서 생기는 흙과 깬 돌이 문제였다.
하루도 아니고 수십 일을 파내다 보니 흙과 파취 한 돌이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고 이를 외부에서 모르게 처리하자니 일도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혜천에게 상의하려고 해 봤지만 혜천은 환자를 부려 먹는다는 이유로 땅굴 작업에 대한 일은 일절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부득이 용천에게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스님, 이거 큰일입니다, 땅굴 작업을 비밀리에 진행하자니 마당에 파낸 흙과 돌이 산처럼 쌓입니다, 굴을 다 파내자면 뒷산만 한 산이 마당 안에 또 하나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걸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고 일도가 크게 걱정이 되어서 전화로 하소연하자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용천이
“어이 일도, 그 큰 머리는 어디다 쓸려고 뒀나? 지금 시내에 김 처사와 나가서 포대와 벽돌지게를 사 오게, 포대에다는 흙과 깬 돌을 담아서 밭에 작업을 나갈 때는 힘이 센 사람은 세 포대를 얹어 지게에 지우고 그 외에는 두 포대를 지고 나가라 하게, 밭에 도착하면 돌은 앞면에 축대를 쌓는데 이용하고 흙은 높은 부분만큼 낮은 곳을 성토해서 수평이 되도록 만들어 놓게, 우리 밭 전부를 그렇게 만들면 굴을 파서 나온 파취물은 오히려 모자랄지도 모르네.”
일도는 용천의 이야기를 듣자 무릎을 치면서 기뻐하며 김 처사에게 달려갔다.
다음 날부터 요양원 환자들에게 또 하나의 짐이 지워졌다. 땅굴에서 나오는 흙과 깬 돌을 새벽을 이용해서 요양원 환자들에게 포대에 담아 지게를 이용해서 뒷산 밭에다가 쌓아 놓기 시작했고 일도는 한술 더 떠서 미리 마당에 쌓아 놓은 파취물을 처리하기 위해서 요양원 환자들을 한 시간 일찍 깨워 식사 전에 작업을 더욱 독려했다.
일도는 감독관들을 향해
“돼지 새끼들을 살려둬서 키우는 이유는 잔칫상에 쓰기 위함이고 저 죄 많은 미친놈들을 살려두는 이유는 살아생전에 죽도록 일이라도 해서 부모 형제들을 괴롭힌 죄를 조금이나마 갚도록 하는 일이다, 우리는 하늘을 대신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니 인정사정 두지 말라!”
하고는 누구를 찍을까 하고 작업을 하는 환자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신기하게도 그 많은 무리 중에 유독 평소에 미워하던 자가 매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마침 아침도 먹지 않고 지게에 파취물 세 포대나 얹어지려는 준혁이 눈에 들어왔다. 일도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을 제치고 준혁에게 냅다 발길질을 했다.
“어이쿠!”
준혁은 지게를 지다 말고 파취물에 눌려 쓰러지자 다시 한번 옆구리를 가격했다. 모두 이를 보고 겁에 질려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도의 잔인성은 그대로 감독관들에게 전달되었고 감독관들은 정신병자들에게 사정없는 매질로 묘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신병자들은 정신만 이상할 뿐 육체적인 면에서는 정상인과 다름없었다. 오히려 채찍에는 정신병자도 정상인들보다 더 고분고분하게 잘 따랐다.
준혁 또한 이곳을 탈출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주인을 따르는 개 모양으로 그들의 말에 잘 순응하고 있었다.
용천은 그야말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땅굴은 땅굴대로 뚫고 밭은 밭대로 옥토로 만들었다. 일거양득이었다.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깬 돌과 흙더미를 깨끗하게 처리하는 덕분에 땅굴은 빠른 속도로 추진되고 있었다.
금순은 오늘 이사 오늘 이사하고 용천을 기다렸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지 정말로 오랜만에 용천이 용천사로 오자 금순은 너무 반가웠다. 그녀는 오랜만에 나타난 용천에게 예쁘게 보인답시고 제법 치장도 하고 용천이 언제 자기를 부를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용천은 일도만 잠깐 만나고 가타부타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나가 버렸다. 정말이지 금순으로서는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보는 격이 되어 한편으로는 무척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한 달이 가까워 오도록 그날 먼발치에서 얼굴만 봤을 뿐 지금까지 말 한마디 변변하게 하지 못했다. 이제는 어디를 가지도 오지도 못하고 겨우 뒷방에 앉아 용천사 식객 노릇을 하고 있는 처지가 되었다.
한때 자가용을 타고 귀부인같이 나타나 요양원 건립에 거액을 시주하던 금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몸빼바지를 입고 앞마루에 걸터앉아 사찰 입구만을 바라보며 용천을 기다리는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이 측은하고 안 됐던지 요사채를 청소하려고 왔던 순자가 말을 걸었다.
“동상님, 뭘 그리 기다리시오.”
이 말을 들은 금순은 자신의 속이 들켰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얼른 순자를 바라보면서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금순이의 대답이 없자 순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십수 년 동안 여기서 잔뼈가 굵으면서 보아 왔니다, 내 남편을 위시하여 절에 빌붙어 밥술을 얻어먹는 저 인간들을 벙어리처럼 말없이 보아 왔다는 말이 씨 더, 세상이 말세인지 모르겠소만 저 인간들은 하나 같이 부처를 팔아 지 뱃때지를 채우려는 욕심뿐 남을 도와 성불하려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는 인간들이오, 동상님도 어서 정신을 차리고 이곳을 빠져나가시오.”
“언니, 그럼 나보고 어찌하란 말이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이 마당에 누굴 믿고 어디로 가야 합니까?”
“아, 동상님도 미국에 같이 갈라고 했던 감옥에 가 있는 정혼가 뭔가 같이 돈을 맡긴 사람이라도 찾아가서 물어봐야지요, 천날만날 여기서 주지 오기만 기다리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걸 아직도 모릅니까?”
정호라는 말에 금순은 정신이 들었다. 금순은 왜 정호를 아직껏 생각 못했는지 그저 쓴웃음만 나올 지경이었다.
한편 남편 재수는 정신적인 이상이 있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정신 치료를 받기 위해 정신병동에 수감되었고 정호는 자신이 모시고 있던 사장 변재수가 등산을 간 틈을 타서 사장부인 권금순을 겁탈하려 했으나 돌연 등산을 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사장 재수에게 이 사실이 탄로 나자 엉겁결에 장식장 한편에 있던 골프 가방을 발견하고 스틱을 빼내 피해자를 가격했다. 머리에 스틱으로 맞은 사장 재수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가해자는 이를 확인하고도 피해자 재수를 차로 절벽까지 운반, 살해할 목적으로 떨어뜨린 죄가 가중되어 중형을 선고받고 교도소로 이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