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광호의 결심(決心)
밤이 이슥해지고 있었다. 다비식이 끝난 밤이라 신도들은 모두 흩어졌고 용천사 식구들은 다 같이 모여 앉아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모든 일을 다 일고 있는 김 처사가 환한 미소를 띠우면서 먼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다비식에서 용천스님 사리가 나오니 떨어져 나가려던 신도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 주게 되었습니다. 신도 중에는 놀라서 발을 동동 구르는 신도들도 있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지면 우리 사찰은 다시 활기를 찾을 것은 빤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모두들 밝은 미소를 지었고 곧바로 이보살이 말을 받았다.
“빨리 혜천스님이 나서서 우리 사찰을 바로 세워 주셔야지요.”
“일도스님도 계시지 않습니까?”
혜천은 용천의 말도 있고 이 권유가 당연한 사실이지만 채면도 있고 우선 은근히 일도에게 사양을 했다.
일도 역시 용천이 한 말이 있는지라
“왜 그러십니까? 용천스님이 살아 계실 때 혜천스님에게 사찰 책임을 맡기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새삼스럽게 화살을 소승에게 보내다니요, 농도 지나치십니다, 그리고 소승에게는 김 처사와 함께 요양원을 맡으라고 부탁하셨잖습니까.”
그런 일도의 사양에 혜천은 흐뭇했다. 오늘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잘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혜천은 속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일도의 마음은 질투로 불타고 있었다. 주지인 용천이 자기와 김 처사에게 요양원을 책임지라고 했을 때는 별 대수롭지 않게 들었으나 막상 용천이 죽고 자기보다 늦게 용천사에 들어온 혜천에게 사찰의 운영권이 넘어가니 배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운영권이 일도 자신을 제치고 혜천에게 넘어간다고 생각하니 들어온 순서로 보나 사찰 밥을 먹은 햇수로 보나 일도로서는 억울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고 보자! 내가 용천이 죽은 이 마당에 혜천에게 뒤질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일도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마침 그때 혜천의 입에서 수락의 말이 흘러나왔다.
“모든 분이 그리 생각하신다면 저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용천사는 이제 혜천이 주지 스님으로 천거되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편 광호는 수차례나 용천의 죽음에 대해 의문점을 제시하고 윗선에 건의도 해 보고, 검찰에 재수사도 요청도 해 보았지만 결과는 「용천과 금순의 자살이 확인됨」으로 나왔다.
이렇게 광호는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용천의 죽음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철벽 같은 용천이 쳐 놓은 장벽에 막혀서 그의 시신 가까이조차 접근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뒤 검찰 고위 간부로부터 광호가 근무하는 경찰서장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광호라는 애, 오지로 보내버리든지 기회를 봐서 잘라 버리든지 어떻게 처리해 보시오.”
미주는 학원수업을 마치고 늦은 시간에 홀로 귀가하다가 어두운 밤길에서 불량배들을 만나 겁탈을 당했고 그 충격으로 정신병을 얻었다. 돈 많은 재수와 결혼한 금순은 전처가 낳은 딸인 미주를 없애려고 용천의 협조로 얻어 용천사 요양원에 미주를 수용하게 된다. 용천은 금순의 의도를 미리 파악하고 미주를 없애기로 마음먹는다. 용천은 요양원 감독관을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미인인 미주를 그들에게 농락당하도록 만든다. 결국 감독관으로 있던 김 처사의 동생 도연이 먼저 미주를 겁탈하게 되고 이를 빌미로 다른 감독관들이 돌아가며 미주를 농락하게 된다. 그러자 미주는 누구의 자식인지 모를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데 이 사실이 탄로 될 것을 우려한 감독관들은 합의하여 도연으로 하여금 미주를 목 졸라 죽게 만든다. 그러나 미주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되었는데 이 충격으로 인하여 배속의 아이는 죽게 되지만 다행히 미주는 정상적인 정신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었다.
수사과정에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광호였지만 미주의 심성이 착하고 미모인 그녀와 긴 시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미주에 대한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미주 또한 자신의 은인인 광호를 마음에 두고 든든한 오빠처럼 연인처럼 따르고 있었다. 다만 미주가 선뜻 마음을 주지 못한 것은 너무나 깨끗한 광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미주와 광호는 퇴근 시간이나 휴일이 되면 자주 만나서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함께했기 때문에 사실 이제는 허물이 없었다.
오늘은 미주가 오랜만에 광호가 살고 있는 흑석동 입구에 있는 명수대에서 데이트를 약속한 터였다.
광호도 사내에서 돌아가는 자신의 입지가 무척 곤란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수사 과정에 있어 주변 환경을 무시하고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자신의 성격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타협하지 않는 그 성격 때문에 막다른 벽으로 계속 밀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한창인 그는 이대로 밀려서 물러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권력의 줄과 축적된 자산이 없는 광호로서는 긴 한숨만이 나올 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광호가 마음속으로 미주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어디에 몸을 둘지 모르는 같은 처지의 미주였다.
흑석동은 미주가 추억이 깃든 곳이었다. 비록 고등학교 3학년을 다니다가 집 가까이서 사내들에게 겁탈당해 그 충격으로 정신병을 얻어 고등학교를 마치지는 못했지만 이곳 00 대학교 부속여자고등학교는 미주의 사춘기가 무르익어갔던 추억이 깃든 학교였다.
미주는 오늘따라 광호보다 회사를 일찍 마쳤기 때문에 먼저 약속한 흑석동 입구에 있는 명수대에 와서 광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짙은 어둠이 깔린 명수대에서는 더위를 피해서 올라온 몇몇 아베크족들이 벤치에 앉아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다른 한쪽 구석에는 너덧 명이 사내들이 무리를 지어 시시덕거리면서 서로 어깨와 등을 치면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혼자 올라온 미주는 왠지 그 사내들이 소름이 끼치도록 겁이 났지만 조금 후면 든든한 광호가 곧 나타날 것을 염두에 두고 사내들의 눈길을 피해 한적한 벤치에 앉아 어둠이 깔린 자신의 모교를 더듬고 있었다.
그때 그들 사내 중 하나가 미주가 혼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던지 손가락질하며 자기들끼리 무슨 이야기인지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들 무리들은 흑석동 대학교 주변에서 구두를 닦으면서 건달 생활을 하는 사내들이었다.
사내들 중에는 꽤 잘생긴 민성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굵고 검은 테 안경을 써서 이지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고 다른 사내들과는 달리 내성적인 성격과 운동으로 단련된 체격을 소유하고 있었다. 민성의 바로 옆에는 작달막한 키, 스포츠 칼라에 가는 눈을 하고 생글생글 이 사람 저 사람을 향해 연신 간사하게 웃는 사내는 대식이었고, 반면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가늘고 차갑게 생긴 덕구, 비썩 마른 큰 키에 비해 아주 작은 머리를 소유한 영필이, 이들 넷은 밤낮을 같이 붙어 다니는 친구들이었다.
다만 이 중에 민성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대학을 다니면서 구두닦이와 어울리고 있었다.
민성은 이들보다 많이 배운 탓인지 이들 셋보다는 훨씬 이지적으로 보였고 노는 가락도 이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본래 민성은 이들 구두닦이들과는 잘 알지도 못했다. 구두닦이 대식의 부모는 학교 가까이에 조그마한 한옥을 소유하고 있었다. 한옥의 안방은 부모가, 다락은 대식이와 그의 형이 사용하고 나머지 방 셋은 대학생들에게 월세를 받고 있었다.
민성과 같은 과의 순칠이라는 친구가 대식의 집에서 월세를 살고 있었다.
민성은 수업이 있는 날이면 집에서 도시락을 싸서 오는데 사실 도시락을 먹을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한 번 따라 간 순칠이라는 친구가 자치를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는 점심시간이면 싸 온 도시락을 먹기 위해 친구 집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대식의 친구 영필과 덕구도 낮시간이면 대식이의 집에서 바둑을 뜨며 놀고 있었는데 민성이도 같은 또래의 나이고 보니 자연스럽게 이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이들과 같이 바둑을 뜨면서 내기도 하고 술도 마시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백년지기보다도 가까운 사이가 되고 말았다.
사실 민성은 그의 모습과는 달리 무척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돈암동 고개에 살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미아동으로 넘어가는 미아리고개였다.
돈암동 고갯길 아래는 단층 기와집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산 중턱을 오르면 바닥과는 달리 판잣집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소위 말하는 비계였다.
민성이의 집에 가려면 사람 한둘이 겨우 다닐만한 산비탈 좁은 길을 지나서 고불고불한 남의 집 마당이며 삽짝문 앞을 지나 한참 올라가야만 한다. 그리고 산꼭대기에 거의 다다를 쯤에서야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들이 여러 채 모여 있는 그곳 한 작은집에서 민성이와 그의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다.
작은 집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부엌 딸린 안방과 작은방, 골목길을 마주하고 화장실이 붙어 있는 문간방, 이렇게 작으나마 세 칸 방이 있는 집이었다.
안방은 시장 한 귀퉁이에서 장사를 하는 어머니와 조카들이 쓰고 있었고 안방에 붙어 있는 작은 방은 형과 형수가 쓰고 있었다.
또 좁은 마당 건너편 문간방은 얼마 전에 두 평 남짓한 아주 작은방을 달아내었는데 그 방은 어려운 살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 위해서 술집 요정에 나가는 아가씨에게 월세를 주었으므로 민성의 차지는 변함없이 다락방이었다. 안방에 붙어 있는 부엌 위 다락방은 그렇잖아도 집이라고는 코딱지만 한데 거기다가 다락을 얹어 방을 만들었으니 앉으면 머리가 닿을 듯 말 듯 너무 낮아서 머리를 낮추어서 들어가야 할 정도였고 그곳에서는 공부는 고사하고 잠자리조차도 하기 힘이 드는 그런 다락이었다.
민성에게 평소 집이라는 곳은 겨울철에는 잠만 잘 수 있는 어둡고 차가운 이 다락방이었고, 여름철에는 주먹만 한 선풍기와 함께 숨이 콱콱 막히는 이 다락방이 그의 삶 전부였다.
수십 년 동안 그를 기다리고 있는 집이란 곳은 그런 다락방일 뿐 가족 간에 대화할 시간을 만들 공간조차 없었기에 그는 항상 밖으로 나돌았다. 그래서 그는 구두닦이 친구들과 밤이 늦도록 놀다가 거의 막차가 끊길 때쯤에야 집으로 들어왔다.
그의 다락방은 큰 책 두 권을 붙여 놓을 정도의 조그만 광창문이 마당을 향해 있었고 그 광창문은 말 그대로 다락방으로 밝은 빛과 공기를 보내주는 유일한 통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그 광창은 젊고 내성적인 민성이에게 빛과 공기보다도 더 많은 눈요기를 충족해 주는 통로이기도 했다. 그 눈요기는 바로 요정에 나간다는 문간방 아가씨가 이 집으로 들어오고부터였다.
그녀는 밤이 늦도록 요정에 나가기 때문에 항상 집안에 모두 나가고 아무도 없는 늦은 아침 시간에서야 일어나 수돗가에 핑크빛 잠옷을 걸치고 나타나곤 했다. 항상 그녀가 나타날 때면 머리에는 수건으로 감아올리고 입에는 칫솔을 물고 마당에 나왔다. 그녀가 흐트러진 자세로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보얗고 늘씬한 허벅다리 사이로 무엇인지 보일 듯 말듯한 은밀한 부분이 민성의 애간장을 녹이고 있었다. 그때는 다락방 광창에 몸을 붙이고 숨을 죽이며 민성은 그녀의 그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끔 민성에게는 아주 작게 열린 광창 틈으로 보이는 무방비 상태의 그녀의 다리와 보드라운 젖무덤을 바라보는 행복 이외에 또 다른 볼거리도 있었다.
민성이네 화장실은 대문 밖 문간방에 달아내서 만들었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다 보니 그곳에는 뻥 뚫린 좌변기 하나만 달랑 올려놓았을 뿐 수도꼭지에게 양보할 공간은 찾을 라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문간방 그녀가 화장실을 다녀올 때는 아주 드물게 그녀의 은밀한 부분도 아무 거리낌 없이 들어내 놓고 씻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왜냐하면 식구들이 쓰는 수돗물이 마당 한 복판에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식구들이 다 나가고 없을 거라는 그녀 나름의 확실한 가정하에서였다.
그렇게 다락방 광창은 민성이에게 엄청난 볼거리의 창이었다.
그는 그녀를 마음속으로 그렇게 보고 즐기는 동안 어느 틈엔가 그녀의 행동을 혼자 숨어서 바라보는 묘한 쾌감에서 벗어나 그녀에게 직접 손을 대 보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칫솔을 물고 나올 시간이면 집안에는 모두 일터로 나가고 그녀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그녀가 대문 밖에 있는 화장실을 다녀오는 순간 그녀 스스로 대문을 닫아걸기 때문에 민성이의 행동에 제약을 걸 아무런 방해꾼이 없다는 것이다.
민성은 가만히 다락을 내려와 안방 문을 열려고 여러 번 손을 가져다 보았지만 도대체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 그런 날은 하루 종일 그 일이 머리에 떠올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더더욱 공부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다니는 대학교 교문과 00 대학 부속 여자 고등학교 교문은 서로 지척 간에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한 여학생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 여학생은 민성이로서는 언감생심 바라볼 수도 없는 부유층의 자녀였다.
그녀는 운전수를 따로 둔 검은 세단을 타고 학교를 다녔고 단발머리를 한 아주 날씬하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가 교실로 들어가기 위해서 차에서 내릴 때면 얼른 운전기사가 먼저 나와 문을 열어 주었고 그녀가 교문 안으로 들어갈 때면 운전기사는 그녀가 교실 복도 안까지 들어가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가는 것이었다.
구두닦이 친구들과 어울려 있던 민성은 그녀를 볼 때마다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학생은 바로 미주였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시간에 미주가 세단에서 내렸고 민성은 넋 나간 듯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종족본능의 사내들이란 별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구두를 닦던 민성이의 친구들도 한마음으로 입을 벌리고 미주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입맛을 다시면서 대식이가 먼저 민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왜? 저 애 괜찮아? 갖고 싶어?”
“내 주제에.......”
“인마, 가지려면 못 가질 이유가 뭐 있어!”
“저런 여자를 가질 수만 있다면 뭔 일인들 못 할까?”
“흐흠, 그래? 기다려봐, 기회가 있을 테니깐.”
무엇을 믿고 대식이가 자신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민성은 생각했다. 그것도 운전기사의 철통 같은 경호를 보고서도 말이다. 그리고는 민성은 대식의 말을 곧바로 잊고 있었다.
민성이의 머릿속에는 청순하고 아름다운 미주와 함께 세련되고 섹시한 아랫방의 아가씨가 서로 겹쳐서 수시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비록 아랫방 아가씨와 미주는 처음부터 서로의 환경이 다른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민성이 보는 대상으로는 둘 다 소유해 보고 싶은 동등한 대상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시장을 나가려고 부산을 떨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미 가난에 익숙해져서 그녀의 의상에는 전연 관심이 없었다. 민성이가 입던 옷이던 민성이의 조카가 입던 옷이던 입지 않으면 가리지 않고 입었고 몸만 가리고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에 헤어져서 잘 입지 않는 옷이면 몸에 들어가기만 하면 닥치는 대로 걸쳐 입고 다녔다.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시장 바닥에서 각종 나물이며 잡곡들을 좌판에 벌려 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고 한 개라도 더 팔려고 온 힘을 다하는 민성의 어머니였다.
민성은 문간방 아가씨가 들어오고부터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그녀 보기에 무척 부끄럽고 창피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민성의 어머니가 나가고 형과 형수가 나가고 여동생이 나갔다. 오직 집안에는 민성이 만 홀로 있었다. 오후 수업만 있는 날이라 민성이 안방에 누워 본 것이 무척 오랜만이었다. 밀물처럼 다 빠져나간 집안은 온통 적막감이 흐르고 있었다. 민성이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삐익, 삐익, 덜덜 커!”
꿈인지 생시인지 대문 흔들리는 소리와 문고리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민성의 수잠은 깨고 말았다. 민성의 머리에 문간방 아가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는 미닫이문을 소리 나지 않게 살짝 열었다. 순간 그는 숨소리를 죽이고 몸을 낮추었다.
“좌르륵!”
문간방 아가씨였다. 그녀는 바가지로 손에 물을 붓고 있었다. 민성의 눈은 왕방울만 하게 떠졌다. 한 참 왕성한 민성은 자신도 모르게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아~”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는 삐죽하게 좀 더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마당을 내다봤다. 민성은 아가씨가 이 소리를 들었을까 스스로 놀랐지만 밖에 있는 그녀는 자신이 물 붓는 소리와 그곳을 바라보며 씻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동요도 없이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민성을 향해서 쪼그리고 앉아 있었고 한 손으로는 물바가지에 물을 붓고 있는 그녀는 노팬티 상태였다. 민성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엎드린 자세를 일으켜 세우기에는 너무나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나마 망설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그는 무엇에 홀리듯이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젖혔다.
순간 집안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문간방 아가씨는 한참 젊은 사내가 무방비의 그녀에게 돌진해 오는 것을 보고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녀는 막무가내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축축한 시멘트 바닥에서 그대로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너 개새끼야? 시멘트 바닥에서 이게 뭐야, 내 한 번 줄게, 방으로 들어가!”
민성은 조급했지만 긍정적인 그녀의 대꾸에 끓어오르는 흥분을 잠시 자제하고 그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그녀는 문간방 문을 열고 들어가 요를 펴고 누웠다.
“자, 이리 들어와!”
이 말에 민성은 정신없이 바지의 지퍼를 내렸고 요 위에 누워있는 그녀의 옷을 걷어 올리자마자 그녀를 힘껏 껴안고 허리를 끌어당겼다.
“자식, 서두긴!......”
그녀 또한 자신의 긍정적인 생각에 약간 흥분된 모습을 하고선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돈을 벌기 위해서 여러 남자를 상대했던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에 의한 일은 아니었으나 막상 민성을 대하고서는 그와의 관계가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민성이의 그것이 거리낌 없이 그녀를 파고들었다.
“아~아!”
그녀는 탄성을 지르며 지그시 눈을 감고 목을 뒤로 젖히면서 민성의 엉덩이를 잡아당겼다.
“헉, 헉!”
“으으음~”
거친 숨소리가 민성이의 입에서 토해 나왔고 또 한 번 그녀의 입에서도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도 없는 좁은 집안은 한동안 두 사람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 채워졌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뒤로 나자빠진 민성의 가쁜 숨소리는 점차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보기보다는 제법이야!”
문간방 아가씨는 누운 채로 크리넥스 한 뭉치를 아무렇게나 움켜쥐고 음부에 흘러내린 체액을 닦으면서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민성은 주섬주섬 바지를 입으며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불이 나게 안방으로 건너갔다. 자신의 만족을 다 채운 민성은 지금까지 그녀를 대할 때와는 달리 한집에 사는 여인을 겁탈했다는 후회가 가슴 한구석으로부터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다시 잠이 들었는지 민성이가 대문을 열고 나가는 동안 문간방 아가씨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에잇, 될 대로 되겠지!”
그런 생각은 잠시뿐 금방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떨쳐버리고 그는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치고 가뿐한 마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어쨌든 오늘은 대단히 기분이 좋은 날이라고 민성은 생각했다. 매일 마음으로 그렸던 문간방 아가씨와 우연찮게 몸을 풀었으니 몸이 날아 갈듯 가벼웠다. 하루 종일 웃는 얼굴로 친구들을 대하니 구두닦이 친구들도 기분이 좋았다.
수업을 마친 민성은 여전히 구두딲이들과 잡담을 하고 있었다. 어느덧 해는 뉘 엿뉘였지면서 곧바로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대학교 정문도 닫히고 그들 역시 하루 일과를 끝내고 몸을 단장하고 정류장 앞으로 나왔다. 항상 하던 일대로 당구장에서 당구 한게임을 치고 마약 문을 나사는데 때마침 과외를 끝낸 여학생들이 여고생들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 틈 사이로 어여쁜 미주의 얼굴이 민성이의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승용차만 타고 다니던 단발머리 여학생이 오늘은 책가방을 들고 교문 밖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대식아, 저기.......”
이외라는 듯이 대식은 민성이 가리키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는 민성의 어깨를 툭 치면서 혼자 말로 중얼거렸다.
“바로 오늘이야!”
11시가 다 되어서야 동네 정류장에 내린 미주는 빠른 걸음걸이로 가파른 산비탈 도로를 오르고 있었다. 정류장이 있는 아랫동네는 도로 양쪽에 상가 건물들이 줄을 잇고 있어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지만 인적이 드문 산 중턱에는 아직 건축물이 들어서지 않아 어두웠다. 다만 산 중턱에는 몇 달 전부터 신축 건축물이 들어서고 있었으며 아직 달지 않은 시커먼 창틀이 미주의 발길을 더욱 재촉하게 만들었다.
그때 컴컴한 신축 건축물 사이에서 여러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나타났다. 그렇잖아도 무서움이 많은 미주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미주는 그들 사이를 피해 가려고 몸을 틀었다. 그와 동시에 한 사내가 미주의 팔을 낚아챘다. 미주가 말을 하기도 전에 앞에 선 사내가 미주의 입을 틀어막았다. 민성이었다. 미주가 학교를 다니면서 승용차 속에서 스치고 지나친 구두닦이 들이었다. 그래서 미주는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음을 느꼈으나 끌려가는 두려움에 그도 잠시 뿐이었다. 벌써부터 이들 넷은 미주를 겁탈할 순번을 정해놓고 미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일이 민성이가 구두닦이 친구들과 수년 전에 미주를 정신병자로 만들었던 미해결 사건인 집단 성폭행 사건의 실체였다.
문간방 아가씨와 이어진 미주의 겁탈, 구두닦이 친구들과의 그의 일탈행위는 아무런 방해꾼들 없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이제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그의 잘못을 과거 속으로 덮어 가 버린 듯이 지나가고 있었다.
반면 민성이의 순조로운 일탈행위 뒤에는 창피스럽고 역겹고 지긋지긋한 가난만은 자신의 주변을 너무 오랫동안 끈질기게 감싸고 놓아주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신을 원망하기도 했고 때로는 용기도 가져 보았지만 수십 년 동안 가난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민성은 올바른 길이 자신을 더욱 가난 속으로 끌어들인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비굴한 행동과 위선적인 행동이 자신의 삶을 그나마 지속시켜 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편에는 양심이라는 본래의 마음이 있어 잘못된 행동으로 자신의 목적을 채운 자신을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배운 덕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양심과 쾌락이 공존함을 느끼면서 세월은 말없이 흘렀다. 그리고 민성은 재학 중에 군에 들어갔고 다시 몇 년이 흘러 복교를 하게 되었다.
민성은 오늘도 친구들과 술 몇 잔을 걸치고 가까운 명수대로 올라갔다.
후덥지근한 날씨도 가끔 한강에서 불어오는 미풍으로 인해 한결 부드러웠다. 강 건너 도시에는 은하수를 뿌려 놓은 것 같은 불빛이 얕게 둘러쳐져 있었고 멀리 남산타워가 어둠을 가르고 유난히도 반짝거리고 있었다. 한강대교를 지나는 차량들이 불빛을 늘어뜨리며 바삐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고 강물은 출렁이며 대교의 불빛을 받으면서 끝없이 이어가고 있었다.
민성이의 시선이 흑석동으로 옮기고 학교 도서관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야, 성아, 뭘 그리 생각해? 너는 인마, 생각이 너무 많아!”
깜짝 놀란 성은 어깨를 치는 대식을 바라봤다.
“왜 그래?”
“네가 먼저 시작해, 저기 혼자 있는 여자 말이야!”
그는 대식이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희미한 공원 가로등이었지만 벤치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희미한 불빛이 여인의 늘씬하게 잘빠진 형체만 보일 뿐 진정 그녀의 얼굴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미주였다. 미주는 광호와 만나기로 한 약속 때문에 명수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성은 그녀가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끌리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어디서 봤을까?”
그때 대식은 다시 그의 어깨를 툭 하고 건드렸다. 민성은 옛 기억을 더듬다가 대식이 어깨를 치는 바람에 그 일을 금방 잊어버렸다.
“마, 빨리 시작해!”
별로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땐 민성은 미주 옆으로 다가갔다. 여인의 머릿결에서 풍겨 나오는 샴푸 냄새가 바람을 타고 성의 코를 자극하자 성의 눈동자가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까마득한 옛날 어두컴컴한 주택 신축 현장에서 친구들과 한 여학생을 번갈아 가면서 강간을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그 여학생도 무척 아름다웠으며 비록 단발머리였지만 지금과 똑같은 강한 샴푸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역시 그녀도 지금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여인처럼 가냘픈 몸매를 하고 있었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가 아닐까?”
미주는 굵은 테 안경에 이지적인 묵직한 얼굴을 한 성을 대하자 섬찟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베크족들이 드문드문 있기는 했지만 앞에 있던 네 명의 무리 중에 한 사람이 다가왔으니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저 실례지만 앉아도 되겠어요?”
민성의 입에서 떫은 감 냄새가 물씬 풍겼다. 민성은 말을 걸면서 미주의 생각을 무시하고 엉덩이를 미주 옆으로 내밀며 앉으려고 하자 미주는 민성을 피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다른 세 명의 사내가 주변 아베크족의 시선을 막으면서 미주 옆으로 다가섰고 한 사내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얼른 미주를 낚아챘다. 그는 대식이었다. 아베크족들은 자신들의 열애에 정신을 빼앗겼는지 아니면 연인끼리 서로 사랑싸움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미주 쪽을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그녀가 떠난 자리에 불나방 몇 마리가 가로등 주위를 빠르게 맴돌다가 더러는 머리를 처박고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미주는 자신이 당했던 그때와 너무나 닮은 상황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자신의 집 가까이서 벌어졌고 지금은 명수대라는 장소만 틀렸지 사람의 손길 행동이 너무나 그때와 낯이 익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버둥거리면서 사내들에게 휩싸여서 입을 틀어 막힌 채 한강 변을 향해 명수대 산 비탈길로 끌려서 내려가고 있었다.
때마침 광호는 미주를 만나려고 명수대를 막 올라오고 있었지만 미주는 이미 민성이의 일행에 의해서 끌려 내려가고 있었다. 광호는 미주가 와서 기다릴 것이라 생각하고 흥겨운 듯 흥얼거리면서 명수대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몇몇 아베크족만 자신들의 이야기에 정신을 쏟고 있었고 미주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 왔나?”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조금 전에 미주가 있었던 자리에 가서 앉았고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올 시간이 다 됐는데......”
생각지도 않게 미주가 자리에 없자 광호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지 두리번거리며 일어나 명수대 주변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후덥지근한 날씨는 광호의 온몸을 끈적거리게 만들었고 광호는 차려입은 양복을 벗어 어깨에 걸치고 와이셔츠의 윗단추 몇 개를 풀어헤쳤다. 암갈색 구름이 하늘을 꽉 채웠는지 하늘에는 별빛 하나 보이지 않았고 강변 건너에 비치는 도시의 불빛만이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명수대 산비탈로 사람 몇이 내려가는 모습이 어둠 속에서나마 어렴풋이 광호의 눈에 들어왔으나 광호는 사내들에게 미주가 끌려 내려가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 누구인지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어둠 속에서 일행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미주를 끌고 내려가는 민성의 일행을 광호는 알이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의 모습은 우거진 소나무로 가려져 이제는 그나마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명수대 아래 모래사장에는 큰 바위들이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고 강변으로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마주하는 바위에 부딪혀 작은 미성을 지르고 있었다. 가끔 굵은 빗방울이 여기저기에 뚝뚝 떨어졌지만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는다는 듯이 한적한 모래사장 바위틈으로 미주를 데려갔다.
“당신들, 누구예요? 소리 지를 거예요!”
“소리? 죽고 싶으면 한번 질러 보시지!”
대식이 바로 옆에 서 있던 덕구가 말했다. 덕구의 말소리는 짧고 강하면서 금속성 같은 짜랑짜랑한 소리였다. 미주는 겁에 질려
“왜 그러세요? 한 번만 살려 주세요!”
하고 애원하듯 말을 하자
미주를 잡고 있던 덕구가 넓은 바위 사이로 연약한 미주를 처박았다. 그리고는 먼저 욕심을 채우려고 미주에게 덤벼들었다.
제법 다른 사람보다 침착하면서 차갑던 덕구는 강변으로 내려오는 동안 여체에 도취되어 이성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고 욕정에 굶주린 짐승처럼 무자비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신들린 더러운 악귀처럼 육중한 체구를 연약한 미주의 몸뚱이 위로 덮쳤다. 그리고 미주의 팬티를 억센 손으로 잡아 내렸다. 겁에 질린 미주는 죽을힘을 다해서 오금을 모았지만 덕구의 힘을 감당해내지 못했고 덕구는 미주 한쪽 다리를 잔인하게 짓누르며 툭 튀어나온 바지의 지퍼를 얼른 내리고 미주를 덮쳤다. 그녀는 다시 힘껏 강력하게 사내를 거부했다.
“미친년!”
덕구의 주먹이 미주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부레 지어 속으로 손을 넣어 유두를 힘껏 쥐어 잡았다. 아픔을 참지 못한 미주가 몸을 뒤틀었지만 그의 체구에 의해 미주는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미주는 그만 사지의 힘을 내려놓고 말았다. 그녀는 폭력과 사내의 억센 힘에 의해 도저히 이 위기를 벋어 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덕구의 그것이 떨고 있는 미주 속으로 파고들어 오자 겁에 질린 미주는 아픔을 참지 못하고 신음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아~”
“히히......”
덕구는 오히려 미주의 아픔이 악귀 들린 사람처럼 쾌감으로 들렸다. 그는 더욱 그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정말 인연치고는 묘한 인연이었다. 몇 년이 지나 똑같은 사내들과 똑같은 폭행을 당하는 미주로서는 이 보다도 더한 악연은 없었다. 그들이 미주를 겁탈하는 순서 또한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영필이와 대식이는 덕구의 행동을 보면서 희주가 거리며 빨리 자기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옛날 일이 생각난 민성만은 차마 그 일을 할 수가 없었던지 한발 두발 뒤로 빼고 있었다. 영필과 대식은 덕구의 행위를 바라보며 흥분하고 있었고 민성이의 뒷걸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눈치채지 못한 것을 안 민성은 발걸음을 빨리하고 명수대를 올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하나 돌려가면서 욕심을 채우고 말았다. 미주는 사내들에게 또다시 집단 폭행을 당해 초주검이 되었다. 먼저 일을 끝낸 덕구가
“야? 민성이 어디 갔어?”
하고 두리번거리며 민성이를 찾았다.
“이 자식, 도망간 거 아니야?”
미주의 귀에는 민성이란 말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민성이, 민성이.......”
그들은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휘적휘적 사라져 버렸다.
몇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이제는 제법 많은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고 비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칼을 쓰다듬어 올렸다. 그리고 출렁이는 강물 앞에 힘없이 무릎을 꿇었고 비 내리는 어두운 강물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강물은 물고기의 비늘같이 차량들의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고 자작자작 빗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빗물인지 눈물인지 하염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 더러운 이 몸으로 살아서 무엇하리.......”
더러워진 자신의 육체가 더욱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유독 자신에게만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남들에겐 한 번도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 자신에겐 무려 세 차례에 걸쳐서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미주는 자신을 사랑하는 광호를 생각해 보았다.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이젠 또다시 더럽혀진 몸으로 광호를 대할 자신이 없었다.
“죽자, 죽어 버리자!”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 많던 재산을 잃어버리고 철창신세를 지고 있는 불쌍한 아버지, 그 후유증으로 정신까지 이상해진 아버지를 홀로 두고 떠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던 그녀는 결코 두 번 다시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비에 젖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비틀걸음으로 명수대를 향하여 기어가듯 올라가고 있었다. 옷은 비에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었고 그들에게 끌려올 때와는 달리 신발도 신지 않은 발바닥에는 진흙투성이 그대로였다. 그녀는 그래도 광호를 찾아 명수대까지 올라와서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그곳에는 억센 빗줄기가 긴 벤치만 소리 내어 두드리고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라곤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지친 몸으로 비틀거리며 명수대 아래 도로까지 내려갔다. 승객 몇 명만 태운 텅 빈 버스 한 대가 힘겨운 듯 정류장에 멈춰 서고 있었다. 승객 한 명이 버스에서 내렸고 버스는 빗물을 튕기면서 멈춰 설 때와는 달리 신경질적으로 미주 옆을 지나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승객이 초라한 미주를 한 번 훑어보다가 무슨 말을 하려고 머뭇거리더니 때마침 횡단보도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자 빠른 걸음걸이로 길을 건넌다. 그녀 역시 그의 뒤를 따라 길을 건넜고 흑석동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무작정 걷고 있었다.
택시는 인도를 벗어 난 미주에게 빗물을 튕기면서 지나가고 있었고 미주는 튕긴 빗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저앉듯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비틀걸음으로 아스팔트가 깔려 있는 큰길로 가고 있었고 막 커브를 돌자 눈앞에는 제법 웅장한 담장을 한 주택이 늘어서 있었고 그 주택 중앙쯤에 성당이 들어서 있었다.
그녀는 길을 건너 은빛 휀스가 접혀 들어 있는 성당 출입구의 기둥에 몸을 의지했다. 순간 그녀의 눈길이 은은하게 불빛을 받으면서 세찬 빗물이 흘러내리는 성모상이 눈에 들어왔다. 성모상은 지나치는 행인들이 보이도록 성당 사무실 바로 옆에 정원수로 잘 꾸며놓은 그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가끔 지나치는 밤거리의 차량 불빛을 받은 보얀 수건을 머리에 쓴 성모상,
그녀는 흰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며 드레스는 여러 개의 주름이 세로로 흘러내려 발등까지 덮고 있었다. 드레스 위에는 목에서부터 발끝까지 흰색 긴 망토를 걸치고 있었으며 그 망토는 양쪽 어깨에서 손목에 이르기까지 팔을 살짝 덮어 손목을 휘감고 발뒤꿈치까지 타원형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맨발의 성모상은 금빛 허리띠를 하고 다정하게 미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모상의 오른쪽 발바닥 아래에는 뱀 한 마리가 머리 바로 아래까지 성모의 발에 짓밟혀 입을 벌리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고 드레스 밑을 지나 성모의 양발에 밟힌 그 뱀은 지구를 감싸 안고 있었다.
오뚝 선 콧날, 다정한 듯 인자한 듯, 웃음을 지을 듯 말듯한 모습, 학처럼 긴 목을 하고 따뜻한 손으로 감싸주려는 듯 손을 벌리고 있는 저 모습, 희고 연약한 여인의 발바닥으로 자기 것인 양 온 우주를 감싸 안고 있는 악마 같은 뱀의 숨통을 짓밟고 있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
“휴~”
미주 자신의 몸을 자기들 것인 양 멋대로 가지고 놀다가 버리고 가 버린 사내들의 모습이 뱀과 같이 겹쳐서 미주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들을 짓밟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성모상을 보자 미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만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미주는 세차게 흘러내리는 빗물로 인해서 성모가 발현해서 살아 금방이라도 손을 내밀어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고 앞으로 몸을 향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빗속에 서 있는 창백한 석고상의 모습이 아니라 따뜻한 체온이 흐르는 크고 총명이 넘치는 눈을 가진 어머니의 모습이었고 비에 씻겨 내려간 하얀색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미주는 포근한 엄마의 품을 향해서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성모상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
그러나 그녀의 손은 성모상에 미치지도 못했고 그만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성모상 바로 앞에는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장미꽃 두 송이가 비를 듬뿍 맞으며 바르르 잎사귀를 떨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대식과 덕구 영필은 노량진거리 포장마차에서 술을 먹고 있었다.
“투다닥, 투다닥~”
비는 소리를 지르며 포장마차를 세차게 두드리고 있었다.
“야, 민성이 자식, 어디로 도망갔어? 그 자식 오늘 이상하지 않아?”
“요사이 그 자식 옛날 같지 않아!”
“야, 그 자식 말은 그만해, 술맛 떨어져!”
“그나저나 그 계집애 어디서 꼭 만난 년 같지 않아?”
“자랄 하네, 우리가 만나긴 어디서 만나!”
세 사람은 벌써 취기 속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지랄이라니, 너 이 자식 말조심해!”
덕구가 대식을 향해 취한 눈을 하고 술잔을 앞으로 확 밀어 버린다. 그러자 잔에 들어 있던 술이 대식의 옷에 튀자 대식은 벌떡 일어서서 덕구의 멱살을 잡았다. 덕구의 주먹이 대식의 관자놀이 정면을 향해 날았다. 대식이 뒤로 발랑 나자빠졌다. 그때 영필이 둘을 말렸다.
“야, 너들 술 많이 취했구나, 그만하자, 자, 우리 그만하고 일어서자!”
하면서 겨우 싸움을 뜯어말렸다. 덕구는 씩씩거리며 포장마차를 걷어붙이고 비틀걸음으로 밖으로 향했다. 뒤따라 영필이가 우산을 펴 들고 덕구를 따라 나왔다.
“어이, 택시!”
취한 덕구를 보고 택시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이내 취객을 눈치채고 쏜살같이 멀리 내빼버린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때 택시 한 대가 일 차선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이를 발견한 덕구가 영필이의 우산 밖으로 손을 앞을 내밀고 도로로 뛰어들었다. 순간 빈 화물 트럭이 뒤따라 빠른 속력을 내면서 바로 2차선에서 달려오다가 덕구와 영필을 발견하고 급블레이크를 밟았다.
“끼익~”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달렸던 속력은 덕구와 영필이를 어디에다 팽개쳐 버리고 저 멀리 중앙분리대를 처박고 나자빠져 버렸다.
잠시 뒤 견인차와 구급차,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고가 나자 금방 차들이 막히기 시작했다. 구급차에서 끌어내린 시트가 꼼짝하지 않는 영필이와 덕구를 싣고 차에 오른 순간 대식은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치는가 싶더니 잠시 뒤에는 보이지 않았다.
얼마를 지났을까. 미주는 오랜만에 따뜻한 어머니의 품에 안겨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긴 기지개를 켜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타고 눈부시게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아니? 여기가 어디야?”
분홍색 바탕에 은빛 줄무늬가 잔잔하게 처진 벽지는 그녀의 눈에 깨끗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낯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두서너 평 정도의 방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캐비닛과 앉은뱅이책상 하나가 가구의 전부였다. 앉은뱅이책상 위에는 책상보에 수를 놓은 학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며 다정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고 삼단 책꽂이에는 성서에 관한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리고 책꽂이 위에는 작고 앙증맞은 보를 깔아 놓았고 바로 그 위에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리는 성모상이 올라 있었다. 벽 중앙에는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려 고개를 떨어뜨린 예수의 상도 걸려 있었다. 그때야 미주는 어제 일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매님, 일어나셨군요.”
바로 그때 수녀복을 입은 한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양손을 앞으로 단정하게 모아서 성경책을 끼고 있었고 가늘고 긴 손목 끝에는 묵주가 감겨있었다.
수녀를 본 미주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미주의 하복부에 통증이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혈을 한 모양이었다.
“자매님, 그대로 누워 계세요, 일어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미주가 일어났던 이부자리에서 피가 배어 나온 것을 수녀가 본 모양이었다. 그녀는 말끝을 흐리면서 얼른 미주 옆에 앉았다. 수녀는 비를 맞으면서 성모상 앞에 쓰러졌던 이 자매의 어제 일과 오늘 이부자리에서 발견한 피를 보고서야 이 여인에게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손길로 미주의 어깨를 잡으면서
“자매님, 어떤 연유에선지는 모르지만......”
수녀가 채 말끝도 다하기 전에 미주는 복받쳐오는 설음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흐흑.......”
수녀는 한참을 흐느끼면서 울고 있는 미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자매님, 마음껏 눈물을 쏟으세요, 자매님 속에 있는 눈물이 다 비어서 흘릴 눈물이 한 방울도 없을 때까지 실컷 우세요.”
창틀만 한 햇살이 방바닥 중앙에 손 뼘보다 작은 빛만 남기고 창틀을 넘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흐느끼던 미주는 어느덧 마음의 안정을 찾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수녀를 향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수녀의 얼굴이 그때야 미주의 눈 속으로 들어왔다. 화장하지 않은 수녀의 작은 얼굴은 윤기 없는 살색을 띠고 있었고 오뚝 선 콧날과 굳은 입술은 그녀에게 범접하지 못할 위엄을 나타내고 있었다. 맑고 티 없는 큰 눈은 그녀가 현명함을 나타내고 있었고 흰 베일을 쓴 넓은 이마 사이로 곱게 빗은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그녀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 저리도 곱고 아름다운 여인이 어떻게 수녀가 되었을까?”
이미 생활화된 세속적인 사치와 허영을 끊어버린 수녀의 고운 얼굴에서 그 옛날 수많은 남성들이 그녀를 동경했으리라는 흔적을 발견하고 미주는 속으로 탄식을 했다.
때를 같이하여 미주를 향해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리던 수녀가 입을 열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이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분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그분에게 채찍질을 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분을 창으로 찔러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긴 병사들을 위해서 오히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자 못함이니이다」 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를 빕니다, 자기들의 인기와 권세를 잃을까 두려워 앞장서서 그분을 십자가에 죽게 한 종교 지도자들도, 십자가형을 선언한 빌라도도, 예수님을 배신한 군중들도 예수님께서는 모두 용서하셨습니다, 이 모두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도 못하고 오직 욕망에 의하여 저지르는 우리 인간들의 행위를 용서하는 삶을 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강한 믿음의 의지가 배어 있었다. 어쩌면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수녀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처음 본 자신을 위해 위로의 말을 다정하게 하는 수녀의 따뜻한 마음에 미주는 의지하고 싶은 생각뿐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고난에 처해 있는 우리도 따뜻하게 맞이해 주십니다,”
미주는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그 침묵이 단 일 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미주에게는 몇 시간을 흐른 듯 갑갑하고 지루했다. 부잣집에서 귀한 외동딸로 태어난 그녀는 짧은 인생이었지만 너무나 험하게 살아온 그녀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흘러온 자신의 인생살이가 큰 바위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무엇을 결심하듯 입술을 깨물다가 수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제가 수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자매님?”
수녀는 갑작스러운 미주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제가 갑작스러운 질문을 했습니다만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의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는 자신의 과거사며 어제 일어났던 사실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수녀에게 모두 털어놓기 시작했다. 미주의 길고 긴 과거사는 해가 중천에 떠서도 끝날 줄 몰랐다.
“뭘 좀 드셔야지요?”
“.......”
“같이 식사하러 갑시다, 참 몸은? 저와 함께 병원에라도 가야지요.”
수녀는 겸연쩍어하는 미주를 일으켜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밝은 햇살이 눈이 부시도록 미주를 비추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2층 난간에 기대서 겨우 아래로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수녀는 미주의 어깨를 살며시 껴안았다. 신자인 듯한 여인 둘이 성모상을 향하여 두 손을 모으고 목례를 하다가 수녀와 눈길이 마주치자 수녀를 향해 다시 목례와 미소를 보낸 후에 성당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편 명수대에서 미주를 만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광호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지금껏 둘은 약속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설령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는 서로 미리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연락을 해왔다. 그런데도 오늘은 30분을 기다렸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자 집으로 돌아왔는데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광호는 빗방울이 떨어지자 미주를 좀 더 기다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는 다시 주섬주섬 옷을 입고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미주에게 꼭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집에 찾아가서라도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시커먼 하늘에서는 이제 제법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록 우산은 썼지만 골목길을 나서는 동안 벌써 바짓가랑이에 빗물이 촉촉하게 젖어 오고 있었다.
그는 지름길인 흑석동 입구 좁은 골목길 계단을 올라서고 있었다. 바로 그때 미주는 계단 앞을 막 지나 아스팔트가 깔려있는 도로로 비틀거리며 내려가고 있었다.
혹 광호가 우산을 쓰지 않았더라면 미친 여자같이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미주를 쳐다봤을지도 몰랐다. 아니 계단을 올라서서 단 한 번만이라도 뒤돌아봤더라면 미주를 발견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계단 위의 도로는 광호의 키보다도 훨씬 높았고 빗줄기를 피해 우산을 앞으로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앞을 지나치는 미주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계단을 올라서자 말자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버스 정류장을 해 걸어가고 있었다.
“명수대를 한 번 올라갔다가 갈까? 아니야, 이 비가 오는데 거기 있을 턱이 없지...... 그래도?”
미주가 거처하고 있는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꽤 늦은 시간이었다. 비는 아까와는 달리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다.
바지는 비에 젖어 무릎까지 휘감겨 오고 있었고 미주가 살고 있는 예전의 골목길은 아직 정비되지 않는 푹 꺼진 보도블록에 빗물이 고여서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광호가 웅덩이를 피해 담장에 붙어서 지나치려 했지만 넘쳐흐르는 빗물 때문에 구두 안은 흥건하게 물이 들어오고 말았다.
골목길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구옥의 갈라진 시멘트 담장도 그대로였고 전신주에 매달린 백열등도 그대로였다.
주인집에서 아직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는지 대문이 비스듬하게 열려 있었다. 광호는 비를 피해 얼른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남향의 기역자집이었고 안방을 기준으로 남쪽에 부엌과 작은방, 동쪽으로 마루를 거쳐 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미주가 거처하는 방이었다. 미주가 사용하는 방은 도로를 향한 방벽과 담장 사이에 슬레이트를 얹어서 달아 낸 그래도 부엌 딸린 방이었다.
다른 방들은 모두 불이 켜져 있었지만 미주가 거처하는 방은 불이 꺼져 있었고 문은 닫혀 있었다. 빗소리 때문인지 광호가 대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어디 갔을까?”
광호는 부엌문을 열고 들어가 쪽마루에 걸쳐 앉았다. 그는 신발을 벗어 빗물을 비우고 젖은 양말에 물기를 짜냈다.
“오늘은 미주를 꼭 만나 보리라. “
등을 벽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며칠 전 어머니 기일 날 기제사 상을 정성껏 차려놓고 잔을 치고 꿇어앉아 굳은 맹서를 했던 일이 떠오른다.
“어머니, 저를 용서해 주세요, 이 못난 놈이 억울하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한도 아직 풀어 드리지 못하고 그저 먹고사는 데만 급급해서 세월만 보냈습니다, 어머니, 제가 늦었지만은 공부를 해서 새로운 자식으로 거듭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한도 풀어 드리고 집안도 일으켜 세우려는 생각입니다, 어머니, 세상에는 공짜라는 게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물건을 사고팔아도 그 대가가 있는데 내가 공부를 하려면 그 대가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내가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선 엄감생심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일을 함부로 하겠다고 어째 달려들겠습니까, 사람은 본대 편한 것을 찾으려는 생각,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편한 것만 찾으려는 그 생각이 죽을 때까지 큰 일을 못하고 세상만 원망하다가 죽는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내 지금부터 굳은 결심으로 공부에 정진을 다하겠으니 부디 저의 마음이 물러지지 않고 차돌같이 굳게 해 주도록 그 옛날 정화수를 떠 놓고 비는 마음으로 천지신명께 빌고 또 빌어 주십시오.”
그는 일본 막부시대 말에 살았던 "釋月性"의 시가 떠오른다.
男兒立志 出鄕關 學若無成 死不還 埋骨頭有 憤墓地 人生到處 有靑山
(사내가 뜻을 세워 고향을 떠나니,
만약에 배워 이루지 못하면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리,
내 뼈를 묻을 곳이 어디 고향의 묘지뿐이겠는가,
인간 세상 곳곳에 묘지가 될 장소는 있나니.)
또 미주의 예쁜 얼굴이 떠오른다......
광호의 어두운 머릿속에는 만감이 교차되었다. 밖에는 세찬 비가 내리는데 눈꺼풀은 자꾸만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밝은 아침 햇살이 담장과 슬레이트의 굴곡된 지붕 사이로 광호의 눈이 부시도록 비추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좁은 쪽마루에서 광호는 그만 잠이 든 것이다. 밤이 새도록 미주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우선 광호는 가까운 문방구에서 편지지를 사서 자신이 다녀간 일과 미주를 사랑하고 있다는 고백, 공부를 다시 하기 위해 떠난다는 것, 자신을 위해 기다려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잠긴 문틈 사이로 끼어 넣고 그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