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터슨
냉장고에
있던
자두
내가 먹었어
아마 너는
아침에 먹으려고
남겨
놓았겠지
미안해
정말 맛있고
달콤하고
시원했어
몇 년 전 우연히 이 시를 봤다. 너무 좋았다. 그때 난 온몸에서 전율을 느꼈다. 충격적이었다. 너무도 사실적인 게 좋았다. 이런 게 진짜 시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이런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물론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았다. 난 당시 이 시의 제목도 몰랐고, 작가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저 어느 아마추어 작가가 쓴 시라고만 짐작했다. 수년 동안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그 시. 느닷없이 그 시를 다시 만났다. <패터슨>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이 시는 뉴저지의 패터슨이라는 도시에서 의사를 했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다름 아니라’라는 제목의 시이다. 난 영화 <패터슨>을 통해 이 시를 다시 만남으로써 내가 왜 ‘다름 아니라’와 같은 시를 쓰는 데 어려움을 겪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패터슨>은 인생 영화다.” 인생 영화라고 써 놓고 보니 약간 흥분된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면 우리의 심박수는 매우 규칙적으로, 정상으로 돌아간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만큼 영화는 우리의 일상보다 더 잔잔하고 고요하다. 세상에는 보다가 잠들어도 좋은 영화도 있다. 바로 <패터슨>이다. <패터슨>을 보면 삶의 의미가 우리가 읊조리는 ‘시’ 안에 모두 담겨 있는 것만 같다. 물론 여기서 ‘시’는 단지 ‘시’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찰랑대는 머리칼처럼 내리는 비를 보는 것", "할리퀸 기타를 치는 것", "빨래 방에서 랩을 연습하는 것”, "영화를 보다 잠드는 것" 등 사람들이 그냥 좋아하는 모든 것이 ‘시’이다. 대단하지 않더라도, 그저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모든 것들. 꼭 유명한 시인이 되고, 유명한 컨츄리 가수가 되고, 유명한 래퍼가 될 필요가 없는.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모든 것이 <패터슨>이 말하는 삶의 '시'이다. '시'는 그 자체로 삶에 생명력을 준다.
영화 <패터슨>은 패터슨 시에서 사는 패터슨 씨의 이야기다. 패터슨은 ‘애덤 드라이버’가 연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영화에서 23번 버스 운전기사(드라이버)다. 그는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늘 같은 시리얼을 먹고 매일 똑같은 노선을 달린다. 저녁에는 아내와 저녁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마빈(애완견)과 함께 산책을 가서 동네 술집에 들른다. 그리고 그만의 비밀 노트에 틈틈이 ‘시’를 쓴다. 이것이 매일 반복되는 그의 일상이다. 영화는 월요일부터 다음 주 월요일까지 마치 시처럼 8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패터슨의 하루는 리듬과 대칭을 이루며 반복된다. 반복되는 하루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같은 리듬 속에서 가사가 바뀌거나 변조가 일어난다. 그는 그 작은 변화들을 즐기고 관찰한다. 늘 같은 길이지만 조금씩 다른 풍경, 늘 맞이하는 승객들이지만 조금씩 다른 사람들, 그들의 대화, 행동, 모습 속에서 어떤 새로움 또는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들을 시로 옮긴다. 아니, 그가 기억하는 ‘물고기’만을. 마치 노래의 나머지는 노래 속에 없어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쓴다, 시를.
“우리 집에는 성냥이 많다”, “우리 집에는 성냥이 많다”라는 시어가 첫 장면 내레이션으로 반복된다. 사실 난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전혀 모르고 봐서인지, 첫 몇몇 장면에서 오컬트적인 느낌을 받았다. 흑백의 원을 좋아하는 아내가 꾸민 집의 분위기, 반복해서 나타나는 쌍둥이들, 커트 로건의 음산한 음악과 일상 속에서 흐르는 시 등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의 반복과 대칭은 그저 삶이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였다. 영화의 구성 자체가 시처럼 연출된 것이다. 짐 자무쉬 감독은 반복되는 일상에 변주를 주거나 그것이 대칭을 이룰 때 얻을 수 있는 삶의 소소한 재미를 찾으려 한 것 같다. '덴젤 워싱턴을 닮은 허리케인 카터의 술집 엽총 사건'은 '마리에게 끊임없이 구애하는 에버렛의 장난감 총 난동 사건'과 대칭을 이루며 우리에게 코믹한 웃음을 준다. 또한 애봇과 코스텔로 이야기 중 등장하는 술집 주인 '닥'의 아내의 ‘체스 대신 깁스를 하게 될 거야’라는 드립은 그냥 재밌고 웃기다. 버스 사고가 있던 날 '불덩이 솟구치며 터질 뻔했네’라는 말을 패터슨이 아내에게 들었을 때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만, 똑같은 얘기를 닥에게 듣자 그는 매우 크게 웃는다. 아마 이 영화를 통틀어 그가 가장 크게 웃는 장면일 것이다.
주인공 패터슨은 거의 웃음이 없다. 규칙을 좋아하고 시를 쓰고 사색하길 좋아한다. 핸드폰이 없고, 컴퓨터가 아닌 공책과 펜을 이용해 시를 쓴다. 시인이 되고자 하는 야망도 없다. 그저 시 쓰는 것을 좋아할 뿐. 하지만 그의 아내, 로라는 그와 정반대의 성향을 가졌다. 핸드폰은 물론, 아이패드도 있다. 매우 활동적이고 몸을 쓰는 걸 좋아한다. 어떤 날은 커튼을 만들고, 어떤 날은 벽과 문에 페인트를 칠한다. 어떤 날은 컨트리 가수가 되겠다며 ‘할리 퀸’ 기타를 사고, 또 어떤 날은 시장에 팔 컵케익을 만든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 하지만 정말 보기 좋게 잘 산다. 패터슨이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로라에게 입을 맞추는 것이다. 그는 그녀를 위해 시를 쓰고, 그녀는 그를 위해 녹색 철제 가방에 도시락을 싸준다. 로라가 컨트리 가수가 되겠다며 수백 달러나 하는 기타를 사겠다고 했을 때, 패터슨은 핀잔 대신 넌 분명 유명한 컨트리 가수가 될 거야라고 용기를 준다. 로라도 패터슨이 집에 오면 오늘은 어떤 시를 썼냐고 항상 물어본다. 성향은 다르지만 서로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응원하는 두 부부.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두 부부가 너무나 좋아 보였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친구 ‘마빈’을 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낮에는 로라와 지내고 저녁에는 패터슨과 함께 산책하는 잉글리시 불도그 ‘마빈’. 정말 완전 귀요미다.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친구. 그의 집에는 ‘마빈’을 그린 몇 점의 그림이 걸려 있는데, 닮은 듯 안 닮았지만 그림 역시 귀엽다. 아마 로라가 그린 듯싶다. 아직도 의자에 앉아 있는 ‘마빈’이 떠오른다. ‘그르렁’ 대는 소리와 함께. 마빈은 로라를 짝사랑한다. 그래서 패터슨을 아주 소심한 방법으로 괴롭힌다. 우체통을 기울여 놓거나 둘이 키스할 때마다 '왈'하고 짖는다. 사실 마빈은 암컷인데 영화에서는 수컷을 연기했다. 개 최초의 트랜스젠더 연기랄까. 제69회 칸영화제에서 팜 도그상도 수상했다. 연기도 잘하는 마빈. 너무나 귀여운 마빈. 마빈 앓이 안 할 수가 없다. 마빈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만 하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 ‘마빈’은 결국 사고를 친다. 패터슨이 로라에게 윌리엄스의 시 ‘다름 아니라’를 읽어준 바로 그날, 마빈은 패터슨의 자두를 홀라당 먹어버린다. 너무나 화가 나는 상황이지만 패터슨은 화를 내지 않는다. 다만 상심한 채,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에 간다. 그리고 다시 월요일이 찾아온다. 시의 수미상관 기법처럼.
사실 시를 쓰는 패터슨은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간다. 존재한다. 그리고 그 힘은 그가 ‘시’를 쓴다는 데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해하는 목표는 이미 패터슨과 같지 않는데. 우리는 그렇게 훈련받아 왔다. 우리의 목표는 사람들이 말하는 보물지도에 있다. 그렇다고 여행하지는 않는다. 절대로. 다만 보물 지도를 모두 외워버린다. 마치 그것이 내일로 가는 ‘자격’을 갖추는 유일한 길인 양. 우리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하고,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 노력한다. 승진하기 위해 오늘의 나는 무시한다. 아파트를 사기 위해 청약 저축 통장을 들고 분양 사무소에 줄을 선다. 우리가 오늘의 나를 대하는 방식은 살인이다. 불안을 쫓기 위해 TV 속에서, 핸드폰 속에서 시체를 건져 올린다. 만약 제프 쿤스의 토끼에게 눈이 필요하다고 해서 누군가의 눈이 뽑힌다 해도, 우리의 일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짐 자무시 감독은 아무도 패터슨 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아서 패터슨 시를 배경으로 했다고 한다. 패터슨이라는 배경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일상을 영화로 담아낸 점으로 볼 때 매우 적합해 보인다. 극적인 드라마는 없지만 거기에도 분명 사람이 살고, 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본 것 같다. 우리 모두가 영웅이 될 수는 없다. 될 필요도 없다. 각자의 삶 속에서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으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 누군가가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본성에 따라 흘러가듯 소소한 행복을 누릴 준비만 하면 된다. 뭔가 대단한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아니다. 그냥 내 삶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그 흐름 속에서 ‘시’를 쓰면 된다. 그것이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다름 아니라’와 같은 시를 쓰는 유일한 길이라 믿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다음 장면으로 어떤 극적인 것을 상상했다. 로라가 배신을 하거나, 패터슨이 크게 화를 내거나.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그런 상상을 하는 내가 얼마나 편협하고 갇혀있는지 알게 됐다. 그런 드라마 없이 너무나 아름답게, 또 오랜 여운으로 남는, 시와 같은 영화, <패터슨>이 좋았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의 말을 빌려 이 리뷰를 마무리하려 한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