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깨닫는 쓸모에 대해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의 저자 '이반 일리치'. 우리는 그의 이름을 톨스토이의 소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 둘은 동일 인물일까? 이름은 같지만 동일 인물은 아니다. 소설은 1886년에 발표됐고, 일리치 박사는 40년 후인 1926년에 태어났다. 그러니 소설이 일리치 박사를 모델로 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리뷰에 톨스토이의 소설을 굳이 소환한다. 이유는 소설 속에서 죽은 일리치가 40년 후 일리치 박사로 환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가 1882년 2월 4일 운명하였음을 삼가 알리는 바입니다. 발인은 금요일 오후 1시입니다.”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부고 소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소설 속 일리치는 현대인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보통의 인간이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타락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대학에 갔으며, 좋은 직업을 갖고, 남들보다 조금 빠른 승진도 한다. 자신의 직위에 걸맞은 아내를 맞이해 결혼도 하고, 넓고 좋은 집도 소유하게 된다. 사교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적당히 사치도 부리고, 일에 몰두하며 나름 만족한 생활을 보낸다. 보통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살 만한 삶. 그것이 바로 소설 속 일리치의 삶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리치 판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린다. 수많은 의사에게 찾아가 보지만, 진전은 없다. 그는 병에 시달리다, 자신의 병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자신은 이런 병에 걸려 죽을 만큼 나쁘게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형식적으로 대하는 주변 사람들을 혐오하기 시작한다. 극심한 통증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며 죽을 날을 기다리던 어느 날, 아들의 진정 어린 눈물을 보게 된다. 갑자기 아들은 물론 가족 모두가 불쌍하게 느껴진다. '그래, 내가 모두를 괴롭히고 있구나.' 순간 혐오가 동정과 사랑으로 바뀌면서 진정한 기쁨을 맛본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지 진심으로 깨닫게 된다. 자신의 죽음을 형식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 속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한 시간 후 그는 누군가로부터 ‘임종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듣게 되고,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라고 되뇌며 사망한다.
일리치 판사가 죽자, 직장 동료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의 빈자리에 누가 승진할까' 하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연금이 얼마나 나올지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이것이 소설에서 일리치의 죽음이 남긴 것들이다.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지, 우리는 죽음에 이르러서야만 진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인지, 사회의 진보란 무엇이며, 인류는 왜 그토록 인류를 혐오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는지, 우리는 이런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정확히 44년 후 같은 이름을 가진 ‘이반 일리치’ 박사가 태어난다. 그는 소설 속 ‘일리치’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간다. 마치 ‘일리치 판사’가 죽기 한 시간 전의 모습으로 환생이나 한 것처럼 말이다. 일리치 박사는 일생을 자신이 믿는 신념에 따라 살아간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개발 시대의 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전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교회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으로 1969년에는 사제직을 버린다. 교육에 대한 고민으로 1971년에는 <학교 없는 사회>를 출간한다. 그의 사상과 실천이 커질수록 신변의 위협도 거셌다. 쇠사슬로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총격을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자신의 신념을 꺾는 일은 없었다.
일리치는 2002년, 76세의 나이로 독일 브레멘에서 타계한다. 그는 50대 중반부터 죽기 전까지 얼굴 한쪽에 자라는 혹 때문에 고통받았다. 그러나 소설 속 ‘일리치 판사’와 다르게 병원에서 진단을 받지도, 치료를 받지도 않았다. 그는 혹을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으며 침술, 요가, 생아편, 자기 수양 등으로 최선을 다해 통증을 이겨냈다. 주변 사람들이 왜 그렇게 고통을 감수하느냐고 물으면, 성 제롬의 말을 인용해 “나는 헐벗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른 뿐”이라고 말한다.
1882년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2002년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모두 인류에게 ‘진정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소설 속 ‘일리치’ 박사는 평생 시대가 요구하는 ‘괜찮은 삶’의 조건들을 모두 소유하게 되지만, 정작 죽음 앞에서 그런 것들은 아무 쓸모없는 그저 '껍데기'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진정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부와 명예가 아니라, 자신을 비롯한 타인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이었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의 저자 일리치 박사 역시 껍데기를 버리고 인간 자체의 본성을 발현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지나치게 ‘상품’에 의존하면 인간의 자유는 위축되다가 부서지기 쉬운 사치품이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소비한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대학,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한 인간의 투쟁은 그야말로 너무나 가열하여 안쓰럽기까지 하다. 인간은 자신보다 스스로 소비하는 상품에 의존하면서 점점 쓸모 없어진다. 일리치 박사는 현대인의 ‘필요’는 인간 본성의 발현이 아닌 ‘전문가 권력’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전문가는 산업 사회를 지탱하고 그것으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모든 권력 집단을 말한다. 즉 우리에게 ‘핸드폰’이 필요하다고 말해주는 사람들, ‘아파트’를 사라고 종용하는 집단, ‘괜찮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사회 등이다.
개발 시대의 풍요는 사람들을 상품에 의존하게 하면서,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껍데기’로 만든다. 즉, 표준화된 ‘필요’만 받아들여서는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일리치는 인간이 행복해지려면 전문가가 공인해주는 필요와 결핍, 가난이 아닌 현대의 자급 자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이를 위해 ‘함께 하는 절제’라는 정치적 행위에 동참할 것을 권고한다. 그래야 인간의 자유는 늘어날 것이고, 그 자유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의 사용 가치는 물론, 행복 또한 당연히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는 100페이지 남짓 되는 얇은 책이다. 이 가벼운 책이 지닌 시대적 무게는 ‘*토르의 망치’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1882년 이래 2명의 ‘이반 일리치’가 죽었다. 그럼에도 인간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19세기 ‘일리치 판사’가 던진 죽음 앞의 질문을, 20세기 '일리치 박사'는 이 짧은 에세이를 통해 이성적 통찰로 대답하고자 했다. 그가 못다 한 대답을,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실천적 발현으로 이제는 완성해야 할 것이다. 그가 선물한 ‘토르의 망치’를 인류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인류는 ‘합당하고 고결한’ 자가 되기 위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이반 일리치의 죽음' 뒤에 우리는 어떤 뒷담화를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필요 없는 사회를 우리 다함께 만들어 보자.
*토르의 망치: 요즘 인기를 구가하는 영화 어벤저스에서 천둥의 신 토르가 들고 다니는 망치이다. 이 망치는 아무나 들 수 없다. 자격이 있는, 즉 ‘합당하고 고결한’ 자만이 들 수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