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데미안>은 사람을 뚫고 지나가는 힘이 있다. 그 힘 때문에 고전으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사랑하는 책. <데미안>은 언제, 어디서, 어떤 환경에서 읽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이 책에 대한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이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쓰여졌고, 헤세는 그런 세계 정세를 소설 속에 반영했다. 그러나 그 사실은 매우 부차적인 것이다. 오히려 독자의 감정을 흐트리는 방해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데미안>은 전쟁과 상관없이 자라온 세대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화려하고 상징적인 문장들로 독자를 매료시킨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이 문장 하나로 독자는 밤 잠을 뒤척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진정한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에 대해. 오직 ‘나’로 살아가는 길은 무엇인지에 대해. 밤 하늘의 별만큼이나 끔뻑거리는 눈은 수많은 사유를 품게 된다.
<데미안>은 ‘나로 가는 여정’을, 대부분 상징과 관념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이 또한 이 책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그 관념들을 소설로 풀어갈 수 있었던 힘은 주인공이 땅을 밟고 있었던 어린 시절에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크로머’와 연결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가 <데미안>을 소설로 남게 했다.
나는 <데미안>의 힘은 ‘크로머’ 이야기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크로머’ 이야기는 모든 독자를 어릴 적 자신만의 ‘크로머’와 매우 적나라하고 솔직하게 마주하게 한다. 그것은 치부일 수도 있고, 상처일 수도 있고, 고통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비밀’이었다. 관속에 묻어 둔 악마이거나 우물 속 깊은 곳에 침전되어 있는 시체였다. 그러면서도 원천적 ‘아름다움’을 간직하기도 했다.
우리 앞에 어릴적 자신만의 ‘크로머’를 데려다 놓는 경험은 경이롭다. 그것만으로 이 소설은 위대한 소설이 되었다. 우리는 자신만의 ‘크로머’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대화한다. 외면하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결국 인정하고 화해하기도 한다. 덮어두었던 ‘자아’를 어두웠던 껍질 속에서 꺼내준다. 어린 시절의 자아는 오늘의 나와 마주한다. 이제 자신의 이마에도 ‘카인의 표적’이 새겨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한번도 자신을 깨보지 않은 사람, 한번도 세상을 깨보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편협해지는가. 무엇이 될 것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떻게 나아가느냐가 더 중요하다. 나에게, 그리고 사회에, 인류에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는 <데미안>. 얼마나,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오직 독자의 몫이다. 그리고 100명의 사람에게 100개의 그림을 그려주는 책이라는 점에서, <데미안>은 좋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