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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방이 Jan 23. 2020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내가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너는 살찌고, 나는 야위어야지. 그러나.

- 윤동주의 <간> 중에서


나는 속물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속물이 아니었다. 정말로. 승진 따위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게시판을 열어봤다. 내 이름은 없었다.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기분이 급격히 우울해졌다. 아니 우울한 정도가 아니라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가 된 기분이었다. 몇년 째 승진에서 미끌어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임을 뼈저리게 깨닫게 됐다. 늘 정의로운 척, 남들과 다른 척 굴었다. 승진 따위 내 인생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가치가 쓰레기로 변하는 듯 했다. 정의는 사라지고 진실은 어느 왕조의 무덤 속에 영원히 묻혀버리는 듯 했다. 승진만이 유일한 구원자처럼 느껴졌다. 나는 우주의 먼지가 됐다. 아득하고 어두운 지하 세계로 끝없이 침전해 들어갔다.


사무실이 이내 떠들썩해졌다. 여기저기서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유독 크고 선명하게 들렸고, 동시에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어지러웠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니터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우리 부서에서는 재윤 씨가 승진했다. 재윤 씨는 3년 후배이고, 나보다 5살 어리다. 회사에서 일 잘하기로 소문난 에이스다. 명석하고 샤프하고 똑똑하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친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그에게만 가면 손바닥 뒤집듯 너무나 간단하고 쉬워진다. 그에게는 남들이 어려워하는 일도 쉽게 하는 그런 능력이 있다. 그는 언제나 여유로웠다. 그의 승진은 누구나 인정하는 너무 뻔한 일이었다.


나는 그런 재윤 씨가 부러웠다. 그리고 묘한 질투도 느꼈다.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부러움과 자괴감이라는 감정이 교차했다. 다시 우물로 침전해 들어갔다. 사람들의 말 소리와 웃음 소리가 우물 안에서 더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동기들 대부분이 승진하고 자리도 잡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만은 아직도 대리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전 승진에 그렇게 연연해하지 않아요.'라고 말하고는 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정말 그런 줄 알았다.


나는 정말이지 열심히 일했다. 남들보다 2배, 3배는 더 열심히 일했다. 내 보고서에 선배의 이름을 올렸을 때에도 불평 없이 정말 열심히 일했다. 꼬장꼬장한 선배 밑에서 매일 '갈굼' 당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다 했다. 모든 직원이 퇴근한 사무실에 홀로 남아 일 하는 날들도 많았다. 막차를 타고 집에 갔다가, 첫차 타고 출근한 날은 물론, 밤을 새운 날도 많았다. 나는 개미처럼 일했다.


전화왔다는 후배의 부름에 정신이 들었다. 거래처 직원이었다. 견적 보냈으니 확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간단히 통화하고 전화를 끊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나는 괜찮은 척해야 했다. 승진에 연연해하고 승진 못 했다고 괴로워하는 사람처럼 비치는 게 싫었다. 재윤 씨에게 먼저 다가가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게, 쿨하게.


"승진, 축하해요. 이 대리. 아니, 이 차장님. 하하." 그러나 단어 하나하나는 떨리고 어색하고 자신 없이 흩어져 날아가버렸다. 웃음소리가 병신 같았다.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내 표정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마워요, 선배." 재윤 씨의 대답에는 분명 미안한 감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동시에 자신감 같은 게 깔려 있었다. 그러니까 동정 같은 것.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시혜 같은 것이었다.


그와 악수를 할 때, 내 손에 땀이 흔건함이 느껴졌다. 나는 먼지가 된 기분이었다. 처참한 패배자가 됐다. 싫었다. 나 자신이 싫었다. 재윤 씨는 좋은 사람이다. 부서 내에서 일도 잘하고, 사람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나는 다시 한번 깊이 침전하고 말았다.


그날 저녁 집에 와서 라면을 먹으며 소주를 마셨다. 습관적으로 TV를 켰다. 이상한 인도 영화가 나왔다. 계단을 오르고 올라도 다시 같은 층이 나오는 영화였다.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걸음인 나 같았다. 나는 아직 결혼도 못하고 애도 없다. 그래서 일에 더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남들은 모두 앞으로 나아가는 데 나만 제자리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숨이 찼다. 분명 숨도 차고 힘도 들고 다리도 아픈데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언제나 제자리였다. 제자리에서 그저 늙어만 갔다.




"오늘 저녁은 제가 쏘겠습니다. 모두 참석해 주세요." 재윤 씨가 승진턱을 낸다고 한다.


나는 당연히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참석하지 않음으로 해서 승진에 연연해하고, 후배가 승진해서 배가 몹시 아픈, 혹은 이번 승진 건으로 매우 신경 쓰고 있다는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무척 싫었다.


그래서 적당하고 완벽한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부모님이 위독하시다고 할까? 부모님을 파는 건 너무 비겁해 보였다. 감기에 걸렸다고 할까? 아니 내일 건강 검진을 받는다고 할까? 이런저런 핑곗거리를 찾다가 퇴근시간이 되고야 말았다. 결국 나는 얼떨결에 재윤 씨의 승진턱 자리에 참석할 수밖에 없게 됐다.


나는 당연히 술자리가 불편했다. 대화에 잘 끼지도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었다. 자존감이 바닥까지 내려갔다. 오 차장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다음엔 자네가 될 거야."


세상에서 가장 정치적인 오 차장의 위로가 왠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처럼 들렸다. 나는 이제 내 여윈 독수리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이제 나의 승진과 안위를 위해 온갖 아부와 정치와 모든 권모술수를 총 동원하리니.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동료 몇몇이 가게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담배를 끊은 지 2년이 넘었지만, 왠지 오늘은 담배가 몹시 당겼다. 나도 한 대 펴볼까 하는 요량으로 무리에 다가갔다. 가다가 들으니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나에 대한 얘기 같았다.


"그래도 열심히 하시잖아요." 재윤 씨가 말했다.

"그럼 뭐하냐, 일이 안 되는데. 열심히 한다고 좋은 게 아냐. 회사는 전쟁터야, 잘해야지." 오 차장이 말했다.

"이 대리님 답답한 면이 있죠. 정말 열심히는 하시는데, 안타까워요." 김대리의 말이다.


나는 다시 술자리로 돌아왔다. 젠장. 씨발, 좆같은 것들. 너희들이 뭘 안다고 나에 대해 함부로 지껄여. 야이 개새끼들아. 나는 취했다. 얼마나 마셨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눈을 떠보니 지하철 안이었다. 신도림역이었다.


우리 집은 신림동이다. 나는 우리 동네가 싫었다. 왠지 썩은 희망을 품은 패배자들의 도시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10년째 신림동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그 썩은 도시에 익숙해져 버린 걸까. '이 놈의 집구석, 어이구 징글징글해.' 하며 늘 소리 지르던 어머니처럼 나도 이 징글징글한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걸까. 나도 모를 안락함에 익숙해져 버린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지나 잠에서 깼다. 그새 잠들었나 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직도 취기가 올라왔다. 와이셔츠 단추가 떨어져 있고 휴대폰도 잃어버린 듯했다.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맞은편 지하철 창 밖을 봤다. '신도림' 다시 신도림역이었다.


"한 바퀴 돌았네, 씨발."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술에 취한 소리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자마자 멸시와 모멸을 당한 듯 스스로 뭉개져 버렸다.


눈을 감은 채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들이 잘린 영상처럼 어렴풋이 스쳐지나갔다. "내가 뭐가 모자라서 승진을 안 시켜주는 거예요.",  "부장님 내가 우리 부장님한테 얼마나 잘해드렸어요, 네?", "왜 그러셨어요. 저한테 왜 그러셨냐고요. 저 왜 버리셨어요?" 하며 술주정을 부렸다. "왜 버렸냐고, 씨발." 난동을 부린 것도 같다. 나는 어쩌자고 술에 취해버린 걸까. 왜 그런 말을 했나. 후회가 밀려왔다. 술 냄새와 고기 냄새가 여전히 내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아직 취해있었다. 그리고 또 잠들어버렸다.


꿈을 꿨다. 어느 방이었다. 나가려고 문고리를 집았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왜 안 열리지' 하며 문고리를 흔들었다. 문이 덜컹거렸다. 다시 눈을 떴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지하철 문이 열렸다. 창밖에 보이는 지하철역 이름을 확인했다. 젠장, 또 '신도림'이다.


신림역까지는 정확히 4정거정만 가면 된다. 10분만 깨어있다 내리면 되는 이 간단한 일도 못해내고 있다. 대체, 몇 바퀴를 돈 것인가. 사방에서 '멍청한 놈'이라고 하며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다. 술자리에서 우연히 들은 '그래도 열심히 하지잖아요.'라고 하는 재윤 씨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2호선은 순환선이지, 암암, 씨발." 혼자 중얼거렸다. 목적지도 종점도 없는. 영원히 돌고 돌뿐이다.


이번에는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내 곧 다시 잠에 든 것 같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떴다. 그런데 또, 신도림인 것이다. 나는 그제야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며칠 전에 본 계단에서 루프에 걸린 인도 영화가 생각났다. 나 역시 루프에 빠진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순간 너무 놀랐다. 정신이 번쩍 났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순간 술이 확 깨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현실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나는 매우 다급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본능적으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분명 지하철에 타고 있었는데, 일어나 보니 신도림역 플랫폼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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