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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방이 Jan 28. 2020

달을 쏘다

'딱' 스위치 소리와 함께 전등을 끄고 창 녘의 침대에 드러누우니 이때까지 밖은 휘양찬 달밤이었던 것을 감각치 못하였댔다.*


심사원이 집에 찾아왔다. 나는 넷째 아들이 일러 준 대로 기저귀를 찬 채 누워서 천장만 바라봤다. 치매 걸린 환자처럼 어떤 질문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무척 잘 해냈다. 좋은 등급을 받았다.


"할머니, 할머니, 대답해보세요."

"..."

"할머니, 제 말씀 안 들리세요?"

"..."


나는 창문이 있는 침대를 배정받았다. 처음에는 낯설고 두려웠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 내가 포함된다는 사실이.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지 오래지만, 솔직히 겁이 났다.


첫째 아들은 알코올 중독자였다. 술만 마시면 온 집안을 다 때려 부쉈다. 사기를 당해 아파트 분양권을 빼앗긴 이후 아들의 술과 폭력은 더 심해졌다. 그런 아들이 얼마 전 간암으로 죽었다. 아들의 삶과 죽음 모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었다.


나는 더 이상 큰 며느리에게 얹혀살 수 없었다. 면목이 없었다. 깍쟁이 같은 넷째 며느리가 날 받아줄 리도 없었다. 나 역시 넷째 며느리와 함께 살 자신이 없었다. 넷째 아들이 권유했다. 요양원으로 가시는 게 어떻겠냐고. 차라리 고마웠다. 눈치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게.


요양원 생활도 수년이 흘렀다. 몇 번의 겨울이 오고갔다. 창문 밖 나뭇가지가 앙상하게 흔들렸다. 가슴이 시렸다. 이제는 연기나 거짓이 아닌 정말로 걸을 수 없게 됐다. 무릎이 망가졌다. 보조 도구나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걷는 것조차 힘들다. 아휴,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는 말이 한숨처럼 절로 나온다. 진심이다. 미안함이다. 살아있다는 미안함. 내가 살아서 너희들에게 이렇게 폐를 끼치는구나.


남편을 일찍 여의었다. 자식은 9남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했던가. 평생을 자식 걱정과 근심 속에 살았다. 광주에서 난리가 났던 그 해, 둘째 아들은 자신의 아들을 잃었다. 겨우 14살이었다. 냇가에서 그저 멱감고 있었을 뿐이다. 군인이 쏜 총에 그만. 아들을 잃은 둘째는 이혼하고 폐인이 되어 갔다. 동생들을 거들던 둘째가 저렇게 되자, 가세가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늘 술에 취해 있던 철부지 막내아들은 어느 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술을 퍼마시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섯째 딸이 집을 나갔다. 소식을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이었으리라. 막내딸은 애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소박을 맞았다. 교통사고로 외동딸(내게는 손녀)을 잃은 셋째 딸은 술로 세월을 보내다 간경화로 죽었다.


슬펐다. 원통했다. 몇 번이나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모두 내 탓이었다. 모두 내 죄였다. 나를 데려가라, 이 놈들아. 나를 데려가. 아무리 가슴을 때려도 울분은 해소되지 않았다. 하늘에 대고 통곡해도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무서움과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손이 떨렸다. 늘 불안했다. 자식들의 작은 걱정거리도 내겐 커다란 불안이었는데, 하물며. 사는 게 무서웠다. 너무 오래 산 탓이다.


그렇다고 내 생 전체가 불안과 고통만으로 채색된 것은 아니다. '할머니' 하고 달려드는 증손자의 재롱을 보고 있으면 세상의 근심과 걱정이 무한히 사라진다. 그 순간만큼은 천국이고, 행복이다. 지금도 내 서랍에는 손자가 써준 그림엽서가 있다. 글을 모르지만 엽서를 보고 있으면 손자의 얼굴과 음성이 떠오르는 듯하다.


나는 막내딸이 사준 조끼를 유독 좋아한다. 내 생일날, 첫 월급 탔다며 사준 조끼. 조끼를 받고 얼마나 기뻤던지. 아까워서 안 입고 장롱 속에 잘 넣어뒀다가, 잔치나 행사가 있는 날에만 꺼내 입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조끼는 많이 낡았다. 넷째 아들은 조끼가 낡았다며 버리자 했다. 더 좋은 것 사드리겠다면서.


'낡았다고 버리면 나도 버리면 되겠네'


나는 끝내 고집을 피워 버리지 못하게 했다. 아들은 고집 센 노인네라고 타박했지만, 나는 어린 막내딸이 조끼와 함께 내민 그 작고 고운 손을 잊지 못 한다. 그 아이의 환한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그건 사랑이었다. 추억이었고, 내 딸이었고, 내 삶이었다.


내 삶은 내 조끼만큼도 이야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게 섭섭하거나 안타깝지는 않다. 나 역시 내 삶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찮은 삶이 아주 잠깐 생을 살다 갔을 뿐이다. 아무런 동요도 흔적도 없이, 살아냈을 뿐이다.


고되고 힘들었다. 여한은 없다. 분명 행복했던 적도 있다. 그걸로 됐다. 살아 있음에 대한 미안함은 있어도 죽음에 대한 미련은 없다. 다만 자식들이 걱정이다. 잘 살아야 할 텐데, 그게 걱정이다. 모두가 내 탓이다. 이 글로 내 자식들이 피해볼까 두렵다.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큰 아들이 '주책없는 노인네'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어느새 잘 시간이 됐나 보다, 친절하고 상냥한 요양원 직원이 불을 꺼준다. '딱', 스위치 소리와 함께 사위가 어두워진다. 크리스마스로 북적거렸던 요양원에 커다란 적막이 일어선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옆에 누운 할머니의 숨소리에 방은 무시무시해진다. 창밖을 보니 휘양찬 달이 문살에 흐른다.* 고요는 평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불안이다. 그러나 오늘 밤은 다르다. 한없이 평온하다. 고요 속에 고요가 겹겹이 쌓여 고요히 흐르는 엄마의 젖가슴 같다.


눈을 감는다. 시간이 흐르자 점점 잠에 드는 것 같다. 죽은 자식들과 산 자식들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 앞마당에서 함께 뛰논다. 가난했지만 아랫목 이불속에 손을 넣어 주던 남편이 나를 보며 웃는다. 아버지가 열병에 시달리는 내 이마를 조용히 짚어준다. 어머니가 나를 안아 준다. 따뜻하다.


"우리 딸, 고생 많았지? 이제 됐어. 그만하면 됐어."

"엄마, 나 엄마가 그리웠어. 엄마도 외로웠지? 이제 같이 자자."




* 문장은 윤동주의 산문 '달을 쏘다'에서 인용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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