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정전
아Q정전은 한 개인을 통해 1920년대 신해혁명 이후의 중국을 설명하는 소설이다. 작가 루쉰의 해학과 통찰이 돋보인다. 혁명과 인간 군상은 얼마나 동 떨어져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아Q의 끝없는 찌질함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Q는 집이 없어 '토지 신을 모시는 사당'에 산다. 일정한 직업도 없다. 남의 집 일을 거들어 주는 날품팔이꾼이다. 이름과 본적도 분명하지 않다. 이전의 행적을 아는 사람도 없다. 사람들은 무언가 부탁할 일이 있거나, 혹은 농담거리가 필요할 때만이 아Q를 떠올릴 뿐이다.
아Q는 자존심이 강하다. 독선적이고 반항적이다. 마을 사람들과 종종 시비에 휘말린다. 처음에는 대들어 보기도 했지만, 당하는 일이 많아 그저 눈을 부릅뜨고 째려볼 뿐이다. 동네 불량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아Q를 약 올리고 구타한다. 아무리 두드려 맞아도, 즉 형식적으로 패배하면서도 아Q는 특유의 논리로 정신 승리를 한다.
그러나 그는 곧 패배를 승리로 돌려버린다. 오른손으로 자신의 뺨을 두세 차례 연거푸 때린다. 자기가 맞은 것은 다른 사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기가 때린 것은 남을 때린 것 같아 만족해서 의기양양해한다.
아Q는 태어난 김에 사는 남자 같다. 배고프면 일거리를 찾고, 돈 생기면 도박을 하고, 돈을 잃으면 외상으로 술을 마신다. 술 마시면 허풍에 환상을 품는다. 술 마실 때는 대단한 환상처럼 여기지만 그 또한 오래가지도 않는다.
아Q는 거인 영감마저 혁명당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혁명당에 마음이 끌린다. 아Q는 낮술을 먹고 취해서 "혁명, 혁명"을 외치고 다닌다.
'혁명도 좋구나. 이런 개새끼들은 죽여버려라, 더러운 개새끼들을! 미운 놈들을! 나도 항복해서 혁명당이 되어야지.'
그 일로 아Q는 거인 영감의 물건을 훔친 혁명당이란 누명을 쓰게 되고,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는다. 사실 아Q는 이유도 모른 채 체포당한다. 유치장 신세를 지면서도 아Q는 특유의 정신적 승리로 현실을 극복하려 한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이상 때로는 감옥에 들어가는 일도 있는 법.'
사형 전에 온 마을을 끌려다니면서도 아Q는 조급해하기도 하나 이마저도 정신 승리로 이겨내는 기염을 토한다.
'사람이 천지간에 태어난 바에야 때에 따라서는 목을 잘리는 일도 없으란 법은 없지.'
그러나 사람들은 아Q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온 마을을 끌려다니면서 노래 하나 부르지 못한 사형수가 재미없을 뿐이다.
"총살은 참수만큼 볼 만하지 못하군. 더구나 그렇게 시시한 사형수가 어디 있는가! 그처럼 오래도록 거리를 끌려다니면서 끝내 노래 한 구절 안 부르다니 괜히 헛걸음만 했어."
사실 마을 사람들 또한 아Q와 다를 바가 없다. 마을 사람들 역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 권력과 돈에 어김없이 아주 잘 흔들린다. 그들의 관심은 타인의 존중이 아닌 자기 자신의 안위, 물질만능, 권력으로부터 떨어지는 떡고물에 있다.
아Q는 남에게 맞아도 자신만의 논리로 정신 승리를 이끌어 내고, 그저 술에 취한 용기로 '혁명'을 외치고, 자기 몫이 없다는 이유로 혁명을 반역이라고 규정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형식에 얽매여 타인의 방식을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사형수로 끌려다니면서도 형식에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노래 부르기를 망설인다. 아Q에 중국을 대입하면 1920년대 신해혁명 이후의 중국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소설가이자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루쉰은 혁명 속에서 드러나는 중국 인간 군상의 면면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고매한 혁명이 민중과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 무엇이 혁명을 방해하는 것인지, 정말 혁명은 옳은 것인지, 소설은 인간 군상 전체를 비판하고 있는 듯하다.
사회는 흘러가는 대로 흘러간다. 인간은 고매한 정신이 아닌 권력의 흐름대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어느 시대든 아Q는 등장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조건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와 인간을 이해하는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술에 취한 아Q가 될 뿐이다.
아Q정전에서 고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혁명도, 가난한 사람도, 종교도, 부자도, 아Q도. 모두 다 같은 인간 군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목적의식이나 의미, 또는 고매한 정신들이 아니다. 그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들이다. 바로 인간 그 자체이다.
결국 아Q는 죽여 없애야 하는 벌레가 아니다. 바로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 위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채, 정신 승리로 삶을 일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Q의 모습은 당시 중국인의 모습만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소 비약적일지는 몰라도, 자본, 권력에 무릎 꿇고 살아가는, 혹은 기존의 전통적 권력과 형식에 얽매여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Q가 불쌍하다. 아Q를 안아주자.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