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휘날리며

by 방방이

난 부모님의 오랜 뒷바라지 끝에 100:1의 경쟁률을 뚫고 가까스로 9급 공무원에 합격했다. 난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만족했다. 우선 다닐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직장에서 정해진 업무를 하며 정해진 급여를 받는 소속감과 안정감이 좋았다. 세상이 말하는 ‘이 정도는 돼야지’라는 수준의 기차에 ‘다행히’ 그리고 ‘간신히’ 올라탄 기분이었다. 물론 지금은 종종 불평불만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안정적인 궤도를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입사 초기에 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출퇴근을 했다. 그 시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바로 신문을 수집하는 어르신들. ‘메트로’나 ‘포커스’와 같은 무료 신문들이 인기를 끌면서 생겨난 직업이다. 핸드폰이 널리 사용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종이 신문도 함께 읽히던 시절이었다.


어르신들은 큰 자루를 들고 다니며 승객들이 놓고 간 신문을 모았다. 폐지를 모으는 분야 중 ‘지하철 안에서 신문 모으기’는 꽤 인기가 좋은 듯했다. 거리의 쓰레기통을 뒤질 필요가 없고, 온냉방기 덕분에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했기 때문이다. 신문을 수집하는 어르신의 수도 점점 늘어났다. 경쟁이 치열해지고 신문에 대한 집착도 점점 심해졌다.


키가 작고 등이 굽어 선반에 손이 닿지 않을 것 같은 어르신이 삽시간에 신문을 가로채는 모습을 보면 정말 기인이 따로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읽고 있는 신문을 낚아채가는 일은 다반사고, 어르신들끼리 서로 밀치고 싸우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나는 안정적인 궤도에서 궤도에 오르지 못한 어르신들의 치열한 경쟁을 동정 어린 눈으로 관찰하고는 했다.


구청에 입사 해 처음 맡은 업무는 ‘공유재산 관리'이었다. 변상금을 신나게 부과하고 민원인에게 신나게 욕먹는 업무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폭언을 들으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내공'이 생겼다. 점점 공무원이 되어갔다.


할머니 한 분이 사무실에 오셨다. 단골 할머니다. 직원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한번 오시면 한참을 야단법석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역시 변상금을 깎아달라신다. 반시간 넘게 실랑이를 벌였다.


"변상금이 배춧값이에요? 깎아달라게?" 나도 모르게 '버럭'했다. 시선이 쏠렸다. 나도 놀랐다. "아, 안 된다는 데 왜 자꾸 그러세요?" 나는 한 톤 죽여 말했다.


할머니는 한숨을 쉬셨다. 체념한 듯 솜바지에서 지폐 뭉치를 꺼내셨다. 손은 다 터서 갈라져 있었다. 누가 봐도 폐지를 팔아서 번 돈 같았다. 할머니의 눈을 봤다. 생각보다 눈이 크셨다. 젊었을 때는 귀엽고 단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안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할머니의 고단했던 과거가 응축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슬퍼 보이면서 동시에 온갖 두려움이 담겨 있는 듯했다. 할머니는 어떤 삶을 살아오셨을까? 가족은 있을까? 결혼은 했을까? 순탄하지 않았을 것만 같은 삶이 그려졌다.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차마 돈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일단 돌아가 계세요.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나는 할머니를 배웅했다.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등이 굽고 가냘파 보였다. 안쓰러웠다. 손수레에는 할머니의 고단한 삶이 무겁게 실려 있었다. 고지서는 내 손에 들려 있었다.


직장 동료 3명과 퇴근 후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가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언제나처럼 회사 생활의 부당함에 대해 가볍게 뒷담화를 했다. 아이디어 내면 내 일이 되고, 일 잘하면 또 내 일이 되는 부당함에 대해, 점심 식사 메뉴를 정하기 위해 출근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팀장의 무능함에 대해,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인원 동원으로 사업의 성공 여부를 따지는 시대유감에 대해, 행사를 하는 이유가 구민을 위한 것인지 구청장을 위한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무지에 대해 서로의 안주에 침을 튀겨가며 열성을 다해 토로했다.


그렇다고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통령이 낮잠 자면 촛불 들고 투쟁하면 되지만, 팀장이 낮잠 잔다고 파업할 수는 없잖아.”

“결국 각개전투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4차원’으로 찍히거나 ‘왕따’ 당할 뿐이야. 결국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러게, 일상 투쟁이 대의를 위한 투쟁보다 더 어려워. 그냥 뇌를 비우고 사는 게 상책이야.”


조직의 비효율과 비합리는 너무나 사소해서 말하자니 좀생이 같고 순응하자니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그 사이에서 허무와 허탈의 경지를 경험하면서 점점 더 공무원이 되어 갔다. 조직은 창의를 강조하지만 뇌를 비우지 않으면 암에 걸릴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도 점심 메뉴 정하는 시간이 제일 좋아지기 시작했다.


몇 년 후 하필동 주민센터로 발령을 받았다. 하필동은 재개발 지역으로 해방 전후에 지어진 건물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이 많은 동네다. 업무는 ‘폭언을 들으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기’에 ‘맥가이버’가 추가되었다.


정말 안 하는 일이 없고, 못 하는 일이 없었다. 집 앞 쓰레기 치워주기, 고장 난 전등 고쳐주기, 쌓인 눈 쓸기, 복지물품 배달하기,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 구출하기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주민 센터 업무가 힘들기는 했지만 재미도 있었다. 가족적인 분위기가 좋았고 민원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도 뿌듯했다. 장마철 피해를 입은 집에 물을 퍼주고 쓰레기를 모으는 취미를 가진 민원인의 집을 청소해주었다. 나중에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때 보람을 느꼈다.


동료들과 마을 주민, 그리고 청소년들과 함께 벽화도 그렸다. 어둡고 칙칙했던 골목이 환해지자 마을 사람들이 진심으로 기뻐했다. 정말 행복한 마을이 된 것 같았다. 이런 게 행정의 이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좋아했던 업무는 가로등에 태극기를 꽂는 일이었다. 특히 달리는 트럭 뒤에서 바람맞는 것을 좋아했다. 나중에는 달인처럼 정말 빠르게 잘 꽂았다. “와, 주임님 태극기 정말 잘 꽂네요.” 옆에서 보조를 하던 사회복무요원이 칭찬해줬다. 어깨가 으쓱 됐고, ‘태극기가 체질인가’ 생각했다.


주민 센터에서 3년 정도 일했다. 동기들이 하나, 둘 승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후배가 먼저 승진하기도 했다. 태극기를 아무리 잘 꽂아도 조직은 전혀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선반 위의 신문이든 남이 보던 신문이든 가리지 않고 가로채고 싶어 졌다. 이제 ‘높은 데’서 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인정도 받고 승진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획예산과에 발령을 받았다. 9층의 구청장실 바로 아래인 8층에 위치해 있어 그야말로 ‘높은 데’이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구청장과 전 간부가 참석하는 회의에 PT 화면을 넘기는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국기에 대한 맹세’에 태극기를 화면에 띄우는 일은 1초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정밀함이 요구됐다. ‘태극기’가 체질이라, 왠지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회의 전날 모든 세팅과 리허설을 마쳤다. 모든 것은 있어야 할 자리에 각 잡혀 있었다. 모니터의 각도, 연결선의 위치, 마우스의 방향까지. 빔 프로젝터 스크린 화면이 1센티미터만 삐뚤어져도 수리 기사를 불러 바로 잡았다.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회의가 시작됐다. 언제나처럼 긴장됐다.

"먼저 국기에 대한 맹세가 있겠습니다." 화면에 태극기를 띄울 차례다.

"국기에 대해 경례." 애국가가 시작됐다.


그런데, 맙소사!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없다. 없어졌다. 리허설 때 분명히 있던 태극기가 사라졌다. 오 마이 갓. 망했다. 세상이 음 소거됐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마우스 커서는 꼬리에 불붙은 쥐처럼 이 폴더 저 폴더를 빠른 속도로 헤맸다. 그 장면은 회의장뿐만 아니라 전 직원 모니터에 생중계됐다.


모든 사람이 내 뒤통수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1초가 1년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모든 게 찰나처럼 느껴졌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아니 죽고 싶었다. 차라리 쓰러져서 구급차에 실려 갔으면 했다. 태극기를 띄우지 못한 핑계를 위해 장렬히 전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끝내 태극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국기에 대한 맹세’에 태극기를 띄우지 못한 제1호 공무원으로 기록됐다. 샤워를 하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려고 누웠다가 이불 킥을 했다. 밥 먹다가 갑자기 괴성을 질러 엄마가 놀라기도 했다. “깜짝이야, 얘가 미쳤나,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태극기란 무엇인가. 민족의 정기를 상징한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데 태극기가 없다니. 그것은 팥소 없는 찐빵 따위로 비유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태극기 없이 2002 월드컵을 보낸 느낌, 아니 3.1 만세 운동을 한 느낌이다. 우울했다. 태극기는 체질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인정 투쟁에 실패했다.


퇴근길에 벽화를 그렸던 골목에 다시 가봤다. 내가 가장 잘했던 곳에 가서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3년 만이었다. 저녁 짓는 냄새가 골목 사이로 퍼졌다. 리코더 소리, TV 소리, 아이들 웃음소리가 뭉개져 들려왔다. 아이들이 벽화를 그리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할머니 한 분이 벤치에 앉아 쉬고 계셨다. 평화로워 보였다. 이곳이 천국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도 벤치에 앉았다. 가만히 보니 어디서 많이 뵌 분 같았다. 변상금 할머니였다. 반가웠다. 생각보다 건강해 보이셨다. 할머니는 나를 못 알아보시는 것 같았다.


그날 변상금을 대신 내드린 일을 사명감이나 미담으로 여기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 일은 공무원으로서 잘못한 일일 수도 있다. 시스템을 벗어난 행동이었다.


할머니 곁에는 손수레 대신 배낭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만큼 작고 낡아 보였다. 배낭에는 하얀 막대기 같은 게 꽂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태극기였다. 갑자기 어지러웠다. 잃어버린 태극기가 여기 있었다니. 회의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태극기를 숨기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모든 것을 집어삼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용기를 냈다. “태극기 저 주시면 안 돼요?” 변상금을 부과했던 그날과 정확히 반대의 입장이 되었다.


할머니는 움찔하며 배낭을 자신 쪽으로 끌어안았다. 마치 반드시 지켜야 할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되는 듯이. 그리고는 안 된다며 ‘버럭’ 하시더니 일어나서 가버리셨다. 할머니 배낭에 꽂힌 태극기가 휘날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러웠다. 이번에는 태극기를 찾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궤도에서 벗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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