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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방이 Aug 03. 2020

냄비에 밥을 지으며 하는 생각

밥통이 고장 났다. 이런, 난감하다. 취사 버튼을 누르면 자꾸 에러 메시지가 뜬다. A/S를 맡기려면 주말까지 기다려야 한다. 주말까지는 3일. 최근 회사에 바쁜 일이 있어, 연가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다.


우리 부부는 거의 밥을 해서 먹는다. 배달 음식이나 사 먹는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은 아내가 외출을 해서 집에 없다. 그럼 어떻게 하나? 고민 끝에 냄비에 밥을 하기로 결정.


냄비에 밥을 하는 건 대학 MT 이후로 처음이다. 그때 기억에 밥이 잘 안 됐던 것 같다. 밑 부분은 타고, 가운데 부분은 설익어서 밥알이 굴러다니고.


그래도 밥을 했던 경험이 그때뿐이라, 기억을 더듬어 본다. 냄비 뚜껑에 무거운 돌도 올려놨었던 것 같고, 센 불로 밥을 하다가 뜸 들이기 위해 약한 불로 바꿨던 기억들이 어렴풋이 난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막상 '냄비에 밥을 한다'라고 생각하니 약간 설렌다. '냄비'라는 단어도 그렇고, 거기에 '밥을 한다'는 문장을 붙이니, 뭔가 시간 여행을 떠나는 것도 같다.


근데 다시 찾아온 걱정. 밥을 잘할 수 있을까? 대학 MT 갔을 때처럼 설익은 밥이 되는 건 아닐까? 뭐, 걱정은 되지만, 해 내는 수밖에 없다. 아자!


그러나 걱정하지 말자. 지금은 2020년이고, 여긴 대한민국이다. 인터넷 강국! 인터넷에 '밥 하는 법'이라고 치면 수백, 수천 개의 블로거들이 방법을 알려준다. 정보의 바다, 정보의 공유. 정말 편리한 세상이다.      


먼저 쌀을 씻자. 쌀을 씻다 보면 잘 부서지는 쌀이 있다. 오래된 쌀이다. 싱싱한 쌀은 씻을 때부터 기분이 좋다. 씻을 때 나는 소리가 경쾌하기 때문이다. '쓱쓱 척척' 의성어로는 표현을 잘 못하겠지만 쌀을 자주 씻어보신 분들은 아마 어떤 소리이고, 또 어떤 기분인지 잘 알 것이다.


쌀은 너무 세게 씻어도 안된다. 쌀눈에 있는 영양소가 다 죽기 때문이다. 손가락 사이로 쌀이 빠져나가도록 휘휘 저어주는 것이 좋다. 쌀알은 맨 처음 닿는 물을 가장 빠르게 흡수하기 때문에 처음 씻는 물은 정수기 물을 사용한다. 쌀을 불리는 시간은 30분이 가장 적당하다.     


좋은 쌀은 하얗고 깨끗하며,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면서 투명하고 매끈하다. 손으로 만졌을 때 하얀 가루가 묻지 않고, 쌀알 가운데에 흰 부분이 없는 쌀이 좋다. 쌀은 밀폐된 용기에 담아서 서늘하고 그늘진 곳에 통마늘이나 숯과 함께 보관하면 좋다. 페트병 같은 것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도 좋다.      


밥을 짓는 데에도 정성이 필요하다. 특히 기다림의 정성이 필요하다.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된다. 느긋해야 한다. 그렇다고 게을러서도 안된다. 조르거나 보채지 말고 평화롭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먼저 쌀과 물을 1:1의 비율로 순서대로 냄비에 담는다. 뚜껑을 열어둔 채 약 15분에서 20분 정도 끓이면서, 기다린다.


보통의 주부들은 이 기다리는 시간에 다른 반찬을 준비하거나, 빨래를 하거나, 뭔가 집안일을 한다. 난 살랑 거리는 커튼 옆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렸다.


기다리다 보면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보글보글, 보글보글. 더 기다린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보글거리는 소리도 잦아지기 시작한다. 물이 졸기 시작하면서 소리가 작아진 것이다. 이때 불을 약하게 줄이고 뚜껑을 닫는다. 다시 기다린다.     


밥을 짓는 일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현대인에게 기다림은 지루하고 답답함이다. 내 소중한 시간이 낭비된다고 느껴지면 조급해지고 짜증도 난다. 그러나 기다림을 기다림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다시없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처음 손을 잡았던 기억이 소중한 이유는 기다림의 시간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손 잡고 싶다고 무턱대고 잡고, 안고 싶다고 바로 안아버리면, 연인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 기다림은 내게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해 준다. 기다림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기다림을 통해 배워야 한다. 기다림 안에는 설렘, 행복, 사랑과 같은 의미들이 숨겨져 있다. 미움, 시기, 질투는 낄 자리가 없다.


이쯤 되니 ‘기다림은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음악을 듣고, 책을 보고, 너를 생각하고.


앗, 탄 내가 난다. 잠시 당황했지만, 갑자기 누룽지가 기대된다. 어쩐지 긍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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