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수, 인생이 변하는 시기

서른에 만난 엄마의 텃밭 1

by 소라

집으로, 가족으로


2019년 5월 7일.

내가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는 이유는 다음날 내 생에 가장 슬픈 어버이날을 보냈기 때문이다.

3월, 나는 대전에 있는 공공기관에서 인턴을 끝내고, 안양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다.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자취를 시작해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인턴을 끝낼 때까지, 약 4년간 나는 부모님과 따로 살았다. 서울에는 언니와 함께 사는 집이 있었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취업준비기간 동안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엄마는 자존감도, 돈도 떨어져 있는 나에게 언니랑 부딪히지 말고 집에 들어오라고 말했다. 꽤나 쿨한 가족 관계인 우리 집은 서로 간섭하고 요구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중요한 결정을 대신하거나 서로 기대는 것도.

가끔 엄마가 내 상황에는 무관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엄마인가 보다. 엄마는 예민하고 우울한 취업준비생에게 울타리가 되어주고 싶어 했다. 마음은 힘들어도 주머니 사정은 힘들지 않기를. 나도 아무래도 언니보다는 엄마에게 빌붙는 게 더 편했다. 나는 그렇게 밥이라도 얻어먹자는 생각에 엄마에게 얹혀 살게 되었다.



엄마의 첫 건강검진


엄마는 원래 몸이 약했다. 따로 살면서도 전화로 종종 몸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집에 들어갈 무렵에는 오십견이 심해져서 윗옷을 벗기가 어려웠다. 직업병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동네에서 20년 넘게 작은 치과를 하고 있다. 엄마는 치위생사였고, 환자의 입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한쪽으로 기울어진 자세로 일을 했다.

나는 엄마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가끔 만나면 이것저것 해주려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엄마였기에 크게 이상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몇 년 만에 같이 살게 된 엄마는 내 기억 속의 엄마가 아니었다. 내가 안양에 들어오고 한 달 동안 엄마의 상태는 급격히 안 좋아졌다.

엄마는 피로감을 자주 느꼈다. 환자 없을 때 잠시 잠이 든다 거나, 부부동반 모임을 가면 차 안에서 혼자 쉬기도 했다. 또 다리와 허리, 어디 하나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했다. 아파서 잠에 깊게 들지도 못했다. 몇 년째 갱년기를 앓고 있는 엄마는 아픈 몸을 참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엄마는 자신의 아픔이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도 하고 건강검진도 권하였지만, 엄마는 나아지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 보였다. 엄마는 가끔 다음날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엄마는 몸도 마음도 약했다. 누구에게나 져주고, 쉽게 체념하는 성격이었다. 엄마 자신에게도. 갱년기 증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심한 것 같았다. 내가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수차례 말해도 듣고 흘리던 엄마는 자기도 걱정이 됐는지,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내과에 예약을 했다. 엄마 생의 첫 건강검진이었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몸에는 이토록 무심하다니. 병원이 일하는 시간에는 엄마도 일을 해야 했기에, 잠시 짬을 내야 했다. 피검사를 먼저 받고, 위내시경은 피검사 검사 결과를 듣는 날 받기로 했다.


5월 7일.

엄마는 위내시경을 받았다. 나는 항상 취업스터디가 끝나고 치과로 가서 엄마랑 같이 점심을 먹었다. 아빠는 바로 위층의 이비인후과 아저씨와 점심을 먹었다. 그날은 내시경을 받기 위해 전날 저녁부터 빈속이었을 엄마를 생각해서 죽을 사 가지고 치과로 갔다. 웬일로 아빠는 위층 이비인후과 아저씨와 점심을 먹지 않고 있었다.

아빠와 함께 엄마를 기다리며, ‘엄마는 역시 느려’ 등의 농담을 했다. 내과 간호사들과 수다를 떠느라 늦게 오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시간이 꽤 흘러도 오지 않았고, 대신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빨리 약국으로 차를 가지고 와달라는 엄마의 전화였다.



엄마, 죽을 준비 해


아빠와 부랴부랴 치과 문을 내리고 엄마를 데리러 갔다. A4용지에 ‘개인 사정으로 오후 진료 없습니다.’라는 문구를 펜으로 적어 붙여놓았다. 엄마는 얼굴이 하얗다 못해 노래져서 약국에서 나왔다. 검사 도중 출혈이 있어, 약국에서 지혈제를 사 먹었다고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종양이 발견돼서 대학병원으로 급히 가보라고 했단다. 엄마는 소견서와 내시경 영상이 담긴 CD를 들고 있었다. 소견서에는 알아볼 수 없는 말만 적혀있었다. 병명에 대한 힌트는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면서, 아빠는 주변에 건강검진으로 혹을 발견했다는 친구, 가족 중에 암환자가 있는 지인, 동네 의사 아저씨들에게 전화를 해서 엄마의 상태와 병원 정보 등을 물어봤다. 엄마의 종양이 물혹 정도가 아니겠냐는 답변을 끌어내려고 노력했다. 엄마는 아빠의 질문에 가끔 대답을 하고,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응급실에 도착해서 엄마는 이것저것 검사를 받았다. 엄마는 어제부터 금식해서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는데, 다시 검사가 끝날 때까지 먹으면 안 된다고 했다. 사람이 많았다. 보호자는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어서 내가 보호자 목걸이를 매고, 아빠는 밖에 있었다.

엄마는 아빠가 아니라 나랑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아빠랑 있으면 힘들 것 같다고. 나한테는 많은 말을 할 수 있지만 아빠는 상처 받을까 봐 눈치 보게 된다고 했다. 엄마는 딸인 나보다 아빠를 더 생각한다. 그리고 아빠가 나보다 훨씬 예민하고 마음이 연약하기도 하다. 엄마는 그 점을 걱정했을 것이다.

엄마는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엄마는 동네 내과에서 종양의 사진을 이미 봤다. 한눈에 나쁜 종양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못생겼다고 했다. 동그란 모양이 아니고, 포자가 퍼진 것처럼 삐쭉빼쭉 징그럽다고 말했다.

응급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엄마는 죽음을 준비했다. 자신의 암보험을 걱정하며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따져봤다. 아빠가 자기 없이 살 수 있을지, 살림과 치과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고민했다. 엄마가 걱정하지 않는 건 나밖에 없었다. 나는 엄마한테 이러다가 아빠 말대로 물혹이어서 엄마가 응급실에서 죽음을 준비한 걸 두고 놀리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게 언젠가는 추억이 될 것이라고.

노을이 질 때쯤, 한 의사 선생님이 보호자만 불렀다. 아빠가 밖에 있으니 내가 가야 했다. 나를 방으로 데려가 컴퓨터 앞에 앉혔다. 너무 무서웠다. 나는 의사 선생님을 따라 들어갈 때부터 떨고 있었다. 저 선생님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 왜 엄마는 들으면 안 되는 거지?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엄마가 말한 못생긴 종양 사진을 보여주면 어떻게 하지.

나는 결국 의사 선생님이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울먹였다.


“왜 울어요?”

“죄송한데, 아버지를 데려올게요.”


나는 도망쳐 나와서 아빠를 찾았다. 의사 선생님은 조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아빠는 우는 나를 보고 심각한 상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정작 나는 의사 선생님께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후에 아빠는 내가 뛰쳐나간 자리에서 어떤 검사를 받을지 정도만 설명을 들었다고 말해줬다.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었는데. 아닌가? 나는 그것도 어려웠으려나.

나는 엄마의 보호자가 될 수 없나 보다. 평생 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죽음 준비도 잘 들어줬는데,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에 울어버리고 말았다. 엄마가 많이 아픈 건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런데 엄마는 벌써 죽음까지 준비하니 서러웠다. 나는 엄마가 없는 날을 아직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엄마가 “우리 애기, 아직도 애기네.”하며 달랬다. 나는 엄마의 무릎에 엎드려 울었다. 엄마가 암보험이니, 아빠가 홀아비가 된다느니 그런 소리를 해서 그렇다고 엄마 탓을 했다. 엄마는 나에게 사과했다. 엄마가 놀림을 받는다면 나도 응급실에서 운 죄로 놀림을 받을 것이다. 응급실에는 의외로 우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눈에 튀었다.

하지만 엄마의 예상은 맞았고, 죽음까지 준비한 엄마만 조금 놀림을 받았다.



바터팽대부가 어디 있지?


어버이날에 언니가 보낸 꽃바구니가 치과로 왔다. 엄마는 병원에 있었다. 꽃은 사진을 찍어 엄마한테 보냈다. 나는 언니가 필요했지만, 언니가 알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응급실에서는 퇴원을 시켜주지 않았다. 나흘간 검사를 받기 위해 입원해야 했고, 엄마는 내시경 전날부터 시작해서 닷새간 굶어야 했다.

엄마의 병에 대한 진단은 퇴원하는 날 들을 수 있었다. 의사들은 신중해서인지 충격을 걱정해서인지 기밀누설이라도 되는 양 말을 아꼈고, 아빠와 나는 가슴을 졸였다. 암이지만 전이가 없는 게 확인되었고, 수술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름도 생소한 ‘바터팽대부암’이 못생긴 종양의 정체였다.

나중에 아빠에게 들은 얘기지만, 의사 선생님들은 엄마처럼 사진만 보고도 암이란 걸 직감했을 거라고 했다. 엄마 말대로 암은 생긴 것부터 못생겼나 보다. 나흘 동안의 검사는 사실 암의 유무보다 전이 여부가 중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흘 내내 우리가 들은 말은 조직검사 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다 짐작을 하고 전이 여부를 검사하고 있었음에도 조직검사를 핑계 댄 것이다. 전이 여부에 따라 희망적이냐 절망적이냐가 결정되기 때문에 미리 암이라는 말로 상처주기 싫었던 것 같다.

‘암’이라는 단어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나쁜 조직이라거나 안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 발견했던 내과에서도, 대학병원에서도, 그랬다. 그때는 답답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든 배려가 감사하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상대적으로 차분히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을 정리했으니.


엄마는 죽을 수도 있지만 수술하자는 말로 알아듣고 수술을 거부했다가 혼났다. 외할아버지는 일흔이 넘어 암에 걸리시고 치료를 받다가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병원에서는 연세가 많으시니 치료를 받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외할아버지는 치료를 포기하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독한 항암치료를 받다가 예정보다 일찍 돌아가셨다. 엄마는 준비도 없이 병원에만 있다가 죽게 되는 걸 두려워했다.

엄마는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미리 받은 피검사에서 간수치가 너무 높게 나와 동네 내과의사 선생님이 주시하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위내시경을 하면서 밑에 쪽이 부어있어서 혹시 높은 간 수치의 원인인가 의심이 들어서 더 깊숙이 살펴보다가 종양을 발견했다. 꼼꼼하게 검사해준 선생님 덕분에 건강검진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 위치라 발견될 때는 거의 말기라는 암을 찾아낸 것이다. 엄마의 노란 얼굴은 놀라서가 아니라 간수치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입원을 하며 나흘 내내 검사를 받을 때에도 엄마 눈의 흰자가 노란빛을 띠고 있었으니까.



인생이 바뀔 수 있을까.


엄마 나이 쉰다섯에 찾아온 암은 엄마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엄마는 암이 생기는 몸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고, 건강관리가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특히 엄마는 여러 장기들이 모이는 바터팽대부에 암이 생기는 바람에 췌장과 쓸개, 담도, 십이지장 등을 떼어내고 이어 붙이는 수술을 했다. 그 결과, 소화능력이 정상적이지 않게 되었고, 혈당 조절에도 문제가 생겼다. 먹는 것에 따라 방귀를 조금 많이 뀌느냐 쉴 새 없이 뀌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에 엄마에게 먹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이후 엄마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살고 계신다. 엄마의 암이 엄마에게 희망을 보여준 것일까. 엄마는 갱년기라고 주장하던 전보다 밝아졌다. 다음날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엄마보다는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인 것 같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예전과 다르게 뚜렷한 목표가 생겼으니까. 물론 8시간이 넘는 대수술 후에는 너무 아파서 이대로 낫지 않을 것 같다며 엄마 특유의 부정적인 마인드를 여전히 보여줬다.

검사에서는 2.5cm의 종양이었고, 전이가 없어서 수술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한 달 뒤 수술할 때는 3.5cm로 커져있었고 림프관이 침입된 흔적이 보여서 항암을 해야 했다. 엄마는 요양병원으로 퇴원을 했고, 대학병원으로 한 달에 한 번씩 통원을 하며 6개월간 6차례 항암을 받았다. 그동안 나는 앞자리 수가 바뀌어 서른이 되었다. 엄마의 병, 백수의 취업준비, 남자 친구와의 이별까지 험난한 아홉수였다.

응급실에서 엄마한테 말한 것처럼 그때의 슬픔이 벌써 추억이 되어버린 걸까. 이렇게 글까지 쓰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엄마의 병은 엄마와, 아빠와, 나와, 아마도 언니마저도 바꿔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