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에 만난 엄마의 텃밭 2
엄마의 고향은 충청남도 서천이다. 내가 유치원을 다닐 때, 중학교 국어선생님이셨던 외할아버지는 퇴직을 하시고 서천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부여에 집을 지으셨다. 밭이 딸린 단독주택이었다. 부여집은 외할아버지가 취미 생활을 하며 노후를 보내기 위해 직접 집터를 보고 설계를 고쳐 지은 집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식물을 키우는 것을 좋아하셨다. 소나무 분재와 화초를 길러 자랑하고, 자식들에게 나눠줬다. 학창 시절 우리 집에도 엄마가 외할아버지께 받아온 난이 베란다를 가득 매웠다. 엄마는 외할아버지처럼 화초를 가꾸는 것을 좋아했다. 난에서 꽃이 필 때면 며칠 동안 꽃을 보라며 등교하는 우리를 붙잡고 자랑했다. 나는 엄마의 호들갑 때문에 난에 꽃이 피는 게 전설에 나올 정도로 흔치 않은 일인 줄 알았다.
외할아버지는 과실수도 종류별로 키우셨다. 밤나무, 감나무, 포도나무, 배나무, 사과나무, 복숭아나무, 앵두나무, 보리수나무, 석류나무 등 과일나무를 종류별로 심어놓으셨다. 외할아버지는 아침마다 과일을 한 바구니씩 드셔야 하는 분이었다고 한다.
과일은 동네 사람들을 잡는 미끼가 되기도 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집 앞을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에게 과일과 차를 먹고 가라고 잡았다. 그러기 위함인지, 외할아버지는 집터를 마을 입구에 잡으셨다. 외할아버지는 술을 못 하시면서도 항상 술을 담그셨다. 이 또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따라주며 집으로 이끌기 위해서였다.
부여집에 가면 외할아버지가 내가 좋아하는 앵두를 잔뜩 따주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2년 전, 사학과 학생이었던 나는 여름방학에 대중교통을 이용해 국내 유적지를 돌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고속버스와 기차를 타는 건 반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내버스만 타고 다녔다. 시내버스는 배차시간이 끔찍했다. 하루에 두 번 있는 곳도 있어서 그럴 때는 하염없이 걸었다.
외가를 가겠다는 계획은 없었는데, 우연히 충청도에서 태풍을 만나 외할아버지 댁으로 피난을 갔다. 외할아버지와는 왠지 모를 거리감이 있었다. 원래 나는 어른들을 어려워했고, 할아버지는 과묵하셨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외손주는 언니와 나뿐이었는데, (내 나이 15세에 이모의 아들이 태어났다.) 어린 마음에 호칭에서 오는 차이가 관계의 차이로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나에게는 외할아버지였고, 내 사촌들에게는 할아버지였으니까. 아무도 내게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지만, 외할아버지라고 배운 나는 고집스레 ‘외’ 자를 꼭 붙였다. 아빠는 내게 세상 살기 불편할 정도로 FM이라고 했다.
나중에 엄마에게 들은 말로는 외할아버지가 나를 자랑스러워했다고 했다. 활발한 언니와 사촌들과 다르게 나는 차분해서 어른스럽다고 하셨고, 역사를 좋아하시는 외할아버지는 내가 사학과에 들어갔다는 것을 좋아했다고. 외할아버지는 답사를 왔다는 나를 데리고 백제의 유적지를 데려다주셨다. 백제의 복원된 부여궁과 박물관, 의자왕과 삼천궁녀가 뛰어내렸다는 낙화암에도 데려가셨다. 나에게는 어렵게만 느껴졌던 외할아버지와 처음 가진 둘만의 시간이었다.
아침마다 외할아버지는 새벽에 따오셨는지 내게 앵두를 한 바구니 주셨다. 다른 사촌이나 언니에게는 앵두를 안 주시는데 유독 나에게만 주셨다. 엄마 말에, 내가 어릴 적 유독 신 것을 좋아했고 외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신기해하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기억 속에 그 인상이 강하게 박히셨는지, 나만 보면 앵두를 따오시곤 했다. 신맛이 강한 앵두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앵두나무는 거의 내 전용이었다. 부여집은 밭에서 채소를 뽑아먹고, 과일나무에서 과일을 따먹고, 마당에는 강아지와 닭을 키우는 내 머릿속에 시골집의 표상으로 남아있는 집이다.
7년 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지고 외할머니는 혼자 살 수 없다며 자식들 집에 돌아가면서 머무르신다. 큰외삼촌이 비어버린 부여집을 관리하며 주말농장처럼 사용하고 있다. 매일 밭일을 하시던 외할아버지와 달리, 천안에 사는 큰외삼촌은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부여에 내려왔다.
땅에 뿌리내리지 않은 분재와 화초는 물을 자주 주며 관리하지 않으면 금방 죽어버린다. 외할아버지가 손수 키우시던 많은 과일나무들과 채소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엄마는 과일이 맛있게 열리려면 정성스럽게 가꿔야 한다고 했다. 집에서 키우는 과일이 시중에서 파는 과일처럼 실하고 달기는 어렵단다. 그래서 큰외삼촌은 과실수들을 많이 베었고, 밭에 풀이 무성히 자라는 땅도 많아졌다.
엄마가 아프게 되자, 큰외삼촌은 항암이 끝나면 시골집으로 내려오라고 제안했다. 나는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듣고 부정적이었다. 엄마는 병원이 가까운 곳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다양한 식재료를 살 수 있는 마트와 규칙적으로 운동할 수 있는 운동시설, 그리고 옆에 돌봐줄 가족이 있고 병원이 가까운 도시가 좋다고 생각했다. 혼자 지내다가 아프면 어떻게 하나.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나는 나름 엄마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우리 가족의 특성은 다른 사람의 문제에 깊이 참견하지 않는 것이다. 엄마도, 아빠도 나에게 무언가 강요한 적이 없기에 나도 엄마 아빠의 인생을 결정할 수 없다. 몇 가지 물어보고, 제안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가령, 이모네 집에 가 있는다든지, 일 년 뒤에 내려간다든지 말이다.
갑자기 코로나 19가 심각해지면서 사람이 많은 서울이 엄마에게 위험할 거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엄마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시골에서 건강만 신경 쓰며 살고 싶어 했다. 서울에 있으면,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경제적인 죄책감, 엄마가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산다는 생각들에 힘들다고 했다. 또한 아프고 나서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다시 보는 것에 자신이 없어진다고 했다. 엄마의 병이 엄마의 잘못으로 생겼다고 느껴서 부끄러워했다.
엄마는 12월에 항암이 끝난 뒤에도 3월까지 요양병원에 머물며 고민했다. 엄마가 쉽게 결정하지 못했던 건 아빠 때문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1년 365일 중 360일 정도를 같이 했다. 그중 5일은 엄마가 나랑 둘이서 데이트를 하는 시간이다. 같이 일하고 같이 자고, 대부분의 모임을 같이 나갔다. 하지만 엄마가 아프면서 아빠는 모든 일은 혼자 해내야만 했다.
엄마의 빈자리는 집과 치과에서 모두 너무 컸다. 내가 자취를 하면서 엄마의 빨래와 설거지, 청소는 모두 완벽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엄마는 빨래도 세탁기에만 맡기지 않고 얼룩은 꼭 손으로 애벌빨래를 했다. 그릇의 작은 얼룩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나는 설거지만 하면 얼룩은 안 생기는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 그릇에는 얼룩이 생기고 엄마는 주기적으로 약품을 뿌리고 스펀지로 문질러서 그것을 지웠다는 걸 알지 못했다. 철마다 이불을 빨고, 집에는 습기가 차지 않게 관리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을 자취하면서 알게 되었다. 엄마의 말에 언니와 나는 어릴 적부터 정갈한 음식만 먹고 깨끗한 잠자리에서만 자서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기가 어려웠다는데, 그것은 엄마의 완벽함이 우리를 까다로운 아이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아빠는 집안일에 있어서는 문외한이었다. 센스, 청결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까지도 엄마는 모든 남자들이 아빠처럼 살림 지능이 없는 줄 알고 있다. 아빠는 엄마 없이 양말도 찾지 못했다. 현재는 빨래를 할 줄 몰라서 양말을 100켤레 사다 놓았다. 엄마가 명절에 아빠 집에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아빠의 빨래다.
외동인 아빠는 할머니의 연세가 많아지시자 모시고 살았다. 할머니는 여든이 훨씬 넘어, 실수가 잦아졌다. 엄마는 할머니를 세심하게 보고 필요한 것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할머니의 어떤 옷이 부족한지, 어떤 신발이 안 미끄러운지, 샤워한지는 얼마나 됐는지. 아빠는 모르는 걸 엄마는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집에 혼자 두는 것이 불안할 정도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적어지고 있다. 1년 전부터는 아빠가 일을 하다가 집에 가야 되는 일도 자주 생겼다. 가스불을 끄지 않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집 비밀번호를 잊어버리고, 계단에서 넘어지시기도 했다. 엄마는 아빠가 떠난 치과를 지키거나 정리하고 퇴근했다.
아빠는 엄마가 입원한 후에 치과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힘들어했다. 치위생사가 한국에서 가장 부족한 의료 인력이라던데, 시내도 아닌 조그만 동네 치과에서 일할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하기야, 일할 사람이 있다고 해도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엄마는 한번 본 사람도 얼굴과 이름, 환자의 치료 이력, 가족관계 등을 기억했다. 나는 대학교 때 방학에 치과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차트를 찾고, 청소와 설거지 정도였다. 엄마는 모든 환자를 기억했고, 거래처 전화번호, 건물주 계좌번호도 다 외우고 있었다.
엄마의 기억력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많은 엄마의 성격에서 기인한 것 같다. 엄마는 누구에게나 살갑고 친절한, 살짝 오지랖까지 있는 성격이었다. 아마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사교성을 빼다 박은 것 같다. 환자들도 자기를 알아봐 주는 엄마를 좋아했다. 아빠가 진료를 마치고 원장실에 들어가고 나서도 엄마는 환자들과 수다를 떨었다. 치과에 올 때, 과일이나 야채, 김치 등을 싸오는 환자도 많았다. 덕분에 엄마 집에서는 과일을 사 먹지 않아도 항상 풍족하게 있었다.
엄마는 가끔 내가 어디선가 받아와 뜯지도 않은 액세서리나 화장품들을 발견하면 챙길 때가 있다. 엄마가 평소 사용하지 않는 큰 머리핀이나, 진한 빨간 립스틱 같은 물건들을 가져가기도 한다. “엄마한테 안 어울려”라고 말하면, “알아, 예쁜 사람 있으면 줄 거야.”라며 치과에 가져갔다. 아마 그날 첫 번째로 온 환자한테 줬을 것이다. 엄마 눈에 안 예뻐 보이는 사람은 없으니까.
엄마가 아픈 뒤에 환자들은 엄마를 많이 찾았다고 한다. 아빠는 슬펐을까, 고마웠을까? 엄마의 빈자리를 많이 느꼈을 것은 확실하다. 꽤 오래 떨어져 살았던 나도 그랬으니까. 생각해보면 엄마는 커리어우먼을 넘어 슈퍼우먼이었던 것 같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혼자서 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암이 엄마에게 찾아온 걸까?
엄마는 자신의 병을 알게 된 이후부터 자기의 삶 전체를 바꾸고 싶어 했다. 건강한 삶으로. 그래서 내리게 된 결론이 전원생활이었다.
엄마는 새집을 좋아했다. 브랜드 아파트와 흔히 말하는 로열층도 좋아했다. 엄마는 내 자취집을 고를 때에도 ‘가구 수가 많니? 몇 층이니?’를 제일 먼저 물어봤다. 나도 엄마의 영향을 받아 집은 큰 건물일수록 좋고, 높을수록 좋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엄마의 취향에 의해 태어날 때부터 아파트에서 산 도시 아이인 나는 단독주택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벌레를 끔찍이도 싫어한다. 대학생 때 동기들이 한 번씩 다 가본 농활도 가지 않았다. 오래된 집은 불편했고, 불편을 참아가면서 땀 흘려 고생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몸을 쓰는 일은 다 못하는 내 체력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내 꿈의 집은 채광이 좋고 습기와 벌레가 없는 오피스텔이다.
엄마의 꿈은 새 아파트를 분양받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자취를 하며 집을 나가자 엄마는 분양을 노래 불렀다. 언니와 내가 독립을 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집은 지은 지 20년도 넘은 아파트였다. 엄마는 주차장이 부족해서 훗날 우리가 사위를 데리고 왔을 때 주차를 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있지도 않는 사위를 벌써 걱정하는 건지, 자식들이 떠난 후가 걱정되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가 없는 집을 엄마의 꿈인 새 아파트에서 준비하고 싶어 했다. 엄마는 우리들 방을 없애고 게스트 룸을 만들어야겠다고 말하곤 했다.
엄마는 노후를 지내고 싶은 집을 고르고 골랐다. 그러다 집에서 바다가 보이고, 치과에서 출퇴근하기 멀지 않으며, 대학병원과 엄마가 좋아하는 큰 쇼핑센터가 들어온다는 신도시에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아파트에는 엄마가 가장 원했던 지하주차장도 있었다. 엄마는 고층에 살고 싶어 했지만, 늦게 간 바람에 높은 층은 모두 나가고 남아 있는 집들 중 가장 높은 층인 8층을 골랐다. 엄마의 낭만을 채워줄 바다는 부엌 창문으로 조그맣게 볼 수 있었다.
나는 분양을 받는다는 게 단순히 새 아파트에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들어가기 전에 3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건 몰랐다. 엄마는 빌트인 가전과 벽지 색 등을 꼼꼼히 골랐다. 10년을 넘게 쓴 냉장고는 빌트인으로 주문하고, 에어컨은 방마다 천장형으로 달고, 아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은 소파도 새로 사고, 아일랜드 식탁도 만든다고 했다. 붙박이 장, 문고리 모양까지 골랐다. 그래서 엄마가 분양, 분양 노래를 불렀구나. 내가 원하는 대로 지어지는 집이라니! 엄마는 자신이 원하는 집을 완성해갔다.
엄마와 아빠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주일에 한 번은 자신들이 살게 될 동네에 갔다. 언니와 내가 명절에 집에 가도 꼭 데리고 갔다. 지겹지도 않은지 꼬박 삼 년을 그렇게 다녔다. ‘이번에는 이 가게가 들어왔네.’, ‘아파트가 이만큼 지어졌네.’, ‘영화관이 옆 동네에 생겼네.’, ‘새로 들어온 대형마트까지 걸어서 몇 분 걸린다’하며 도시가 커가는 모습을 보고 정을 들였다.
엄마는 자기가 하나하나 골라서 지은 집에 살아보지 못했다. 2019년 8월에 이사가 예정되었고, 엄마는 두 달 전인 6월에 수술을 했다. 수술 후에는 2주 동안 입원하고 바로 요양병원으로 퇴원했다. 요양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으며 약 9개월을 있었다. 새집에는 가끔 아빠나 언니가 차로 데려다주면 놀다 올 뿐이었다. 엄마는 새집보다 요양병원을 더 집처럼 여겼다. 명절에 새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엄마는 ‘이제 집에 갈게’라며 요양병원에 갔다. 엄마는 꿈에 그리던 새집을 뒤로하고 오래된 고향집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