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취미 - 쑥 캐기 1

서른에 만난 엄마의 텃밭 3

by 소라

한 바구니의 개떡을 만들기 위해 엄마는 그렇게 쑥을 뜯었나 보다.


봄에 내려간 엄마는 봄쑥을 캐는데 심취했다. 봄에 나는 쑥은 연하고 향긋하다. 여름으로 갈수록 더 질기고 향도 강해지다가 꽃이 나면 먹을 수가 없다. 내가 어릴 적, 서울에서도 엄마는 공동묘지 근처에서 쑥을 캐서 음식을 만들어줬었다. 쑥을 넣은 된장국은 4월쯤의 쑥으로 만들어야 맛있다고 한다.

외갓집에서는 쑥으로 만든 개떡을 자주 만들어 먹었다. 나는 개떡은 다 쑥을 넣고 만드는 줄 알았는데, 모시잎을 넣어서 만들기도 하고 지역마다 다른가보다. 엄마는 쑥을 보자마자 개떡이 생각났다고 한다. 요양병원에 있을 때도 봄이 다가오니 쑥향 가득한 개떡을 너무 먹고 싶다고 했다.

개떡을 만들기 위해서는 된장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많은 양의 쑥이 필요하다. 다행히 아무 데에서나 잘 자라는 쑥은 지천에 널려있어서, 엄마는 쑥이 보이는 길이면 쭈그려 앉아 쑥을 뜯었다. 며칠은 출근하면서 전화를 했을 때도 쑥을 뜯고 있다고 했는데, 퇴근할 때에도 쑥을 뜯고 있었다.

엄마의 뼈와 관절은 독한 항암 약으로 인해 약해져 있었다. 요양병원에서는 물리치료도 주기적으로 받았다. 나는 제발 요양차 갔으면 일 좀 적당히 하라고 말렸다. 멀쩡한 사람도 그 정도 일을 했으면 허리고 무릎이고 안 쑤신 데가 없을 거라고. 하지만 엄마는 웃기만 하지 내 말을 듣지는 않는다. 이 정도면 취미가 아니라 노동 수준이었다.


엄마가 처음 방앗간으로 쑥과 쌀을 가지고 갔을 때, 엄마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개떡 생각은 엄마만 한 게 아니었는지, 동네 어르신들이 모두 개떡을 만들기 위해 쑥과 쌀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개떡이 온 동네 유행이었나 보다. 그렇게 모두들 쑥을 캐는데도 쑥을 어디서 자꾸 나오는 건지 의문이다.

엄마가 부여에 내려가서 처음 만든 개떡은 연둣빛을 띠었다. 진한 녹색을 띠는 개떡을 생각했던 엄마는 자신의 개떡이 웃겼는지 사진을 찍어 보냈다. 옆집에도 나눠주고, 집에 온 큰 외숙모에게도 줬는데 모두 색이 연하다고 그랬다고 한다. ‘쑥이 너무 적게 들어갔나 봐. 더 뜯어야겠어.’ 엄마는 열의를 불태웠다. 그래도 엄마는 자기가 처음 만든 개떡의 색이 예쁘고 맛있다고 말했다. 엄마는 그 후 며칠 동안 다시 쑥을 캐러 다녔다.

개떡에 대한 엄마의 목표는 원대했다. 큰 외숙모가 개떡이 마음에 들었는지 더 만들어달라고 했고, 외할머니가 계시는 큰 이모네에도 보내야 했다. 외할머니는 매년 이맘때쯤 개떡을 간식으로 달고 사셨다. 할머니와 사는 아빠한테도 보내고 싶고, 언니와 나한테도 전화해서 개떡을 보내줄까 물어봤다. 게다가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려면 더 많이 만들어놔야 했다. 그 동네 모든 집에 개떡이 있을 것 같지만 엄마에게 말하진 않았다.

얼마 전, 개떡을 더 두껍게 만들었더니 더 맛있다는 엄마의 연락을 받았다. 엄마의 개떡 탐구는 이제 거의 완성단계였다.



1일 9시간 쑥 캐기


엄마는 쑥을 캐는 것처럼 단순 노동이 좋다고 말했다. 요양병원에 있을 때는 잡생각이 많아지고, 같은 걱정을 계속 생각했다고 한다. 엄마가 쑥 캐기를 멈추지 못하는 건, 엄마의 고민들에게서 해방시켜주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가 아프면서 엄마의 경제적인 계획은 모두 틀어져 버렸다.

아프기 전에 엄마는 자신이 10년에서 20년쯤 더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맞춰 분양받은 집의 대출도 계획했다. 하지만 방구쟁이 엄마가 일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엄마의 치료비는 차치하더라도 대출금과 보험료, 노후 대책에 대한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결론은 항상 경제 공동체인 아빠에 대한 미안함과 걱정으로 이어졌다.

엄마는 요양병원의 침대에 누워서 밤새 그런 고민들을 했다. 또한 엄마는 암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언제 어디에 전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했다. 병원에서는 엄마가 우울증세로 불면증이 심해졌다고 말했다. 암환자들에게 흔히 생기는 증상이라고. 엄마가 부여로 내려올 때, 그 불면증과 걱정도 함께 안고 내려왔다.


엄마는 암수술을 하고 자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원래도 불면증이 있었던 엄마지만, 매일 같이 못 자지는 않았다. 엄마는 수술이 끝나고 소리를 지르며 수술실에서 나왔었다. 엄마는 8시간을 넘게 수술을 했다. 마취가 수술이 끝나고 바로 깨버린 걸까. 엄마는 고통스러워했다. 수술실 앞에서 엄마를 기다리면서 많은 환자들을 봤지만, 엄마처럼 소리를 내는 환자는 없었다. 다들 마취에 취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언니만 엄마가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나와 아빠는 대기실에서 수술 현황을 보여주는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언니는 잠시 대기실을 나가면서 엄마가 중환자실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다. 언니는 소리 지르는 엄마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울었다.

엄마는 다음날 일반 병실로 옮겼는데, 너무 아프다고 말했다. 수간호사님은 엄마의 수술이 외과 수술 중 가장 어렵고 오래 걸린다고 말했다. 엄마는 20분마다 마약성 진통제를 맞았다. 엄마는 진통제를 넣는 버튼을 손에 꼭 쥐고 잤다. 그래도 아파서 잠을 자지 못했고, 간신히 잠이 들면 악몽을 꿨다. 엄마는 자신의 몸이 조각나서 찾아다가 맞추는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나는 엄마가 잠들기 전에 묵주를 쥐어주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성호경을 외면서 성호를 긋고, 성수를 뿌려주었다. 엄마가 믿는 하느님이 엄마를 지켜주시길 바랐다. 엄마는 내가 그렇게 해주는 걸 좋아했다. 아빠도 내 얘기를 듣고 엄마가 잘 때 내가 옆에 없으면, 잘 외우지도 못하는 성호경을 외우며 성수를 뿌려주었다. 엄마는 아빠가 자꾸 ‘성부와 성자와 성자’ 또는 ‘성부와 성모와 성자’로 기도를 한다며 내게 이르면서 웃었다. 아빠는 엄마가 퇴원할 때까지 성호경을 외우지 못했다.

엄마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잠이 들었지만, 어김없이 자다가 소리 지르며 괴로워했다. 그럴 때는 벌떡 일어나 엄마를 토닥여주었다. 아침에는 열도 덜 오르고 간호사들도 돌아다니고 있어서 보호자 베드에서 쪽잠을 잤다. 수술 후 일주일 동안은 그런 생활의 반복이었다. 그 후 일주일은 엄마가 나를 깨우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밤새 홀로 복도를 돌아다녔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을 그렇게 버텼다.

하루 반차를 내고 엄마와 함께 잤던 언니는 도저히 출근을 못하겠다며 내가 백수여서 다행이라고 했다. 나도 언니의 말에 공감했다. 나는 결국 이주 동안의 간병 생활 후 장염에 걸려 끙끙 앓았다. 처방받은 약을 먹고도 점점 심해져서 엉덩이 주사를 맞고 나서야 열이 내렸다. 잠을 못 잔다는 건 이토록 위험한 일이다.

엄마는 항암치료를 할 때 수면유도제를 먹고 잠을 잤다.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잠이 필수적이어서 의사 선생님의 권유로 약을 먹어서라도 잔 것이다. 그것이 습관이 되었는지, 아직도 하루는 약을 먹고 자고, 하루는 약을 참아서 잠을 거의 못 잤다. 부여에 내려가서는 걱정들 보다는 내일 할 수 있는 일들, 이 봄에는 특히 쑥 캐는 일을 생각하며 긴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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