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가 잘 나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참을성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관심을 가지는 일도 별로 없고, 사람과의 교류도 잦은 편이 아니기에 그런 걸 수도 있겠다. 보통 내 일상은 평온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화낼 일도 별로 없다. 그래서 직장동료들이나 친해진지 얼마 안 된 친구들은 나를 꽤 순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 보는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는지 가끔은 무례하고 쉽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언니의 말로는 내가 그렇게 생겼다고 한다. 목소리도 어려 보이고, 여자이고, 말랐고, 그냥 최약체처럼 느껴질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일단 화가 나면 절대 참지 않는다.
화가 자주 나지 않을 뿐이지, 화가 나면 참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화가 난 내 잘못이 아니라 화를 내게 만든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생각하기에 내 의견 표출을 망설이지 않는다. 나는 "네가 참아"라는 말도 너무 싫어한다. '화가 났는데 왜 참아야 하지?', '화를 내기 전에 해결했으면 되는 문제 아닌가?', '화나는 상황인데 왜 넘겨야 하는 거지?'
화를 참아야 되는 이유 자체를 모르겠다. 화가 나면 내야지 그걸 왜 참고 잊어버리는지 서른이 넘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화낼 만한 이유가 있어서 내는 거지 그냥 내 감정 기복에 따라 내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내가 화가 날 일은 보험 상담사와의 전화 때문이었다. 나는 보험에 꽤 관심이 있었고, 몇 년 전에 보험을 들면서 입원비가 작은 것을 아쉬워했다. 우연히 입원비+수술비+간병비로 되어있는 상품을 소개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내가 현재 치료 중인 질병이 있어서 안타깝게도 가입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상담사는 내 질병명과 상태를 듣고도 가입이 가능하니 상담을 받아보라고 했다. 내가 가입해있는 보험사 중 하나였고, 꽤나 만족을 했었기에 상담 후 결정을 해서 다음날 가입을 하기로 했다.
다음날 같은 사람에게 전화를 받고 내가 빼고 싶은 항목과 금액 등을 조정해서 가입절차에 들어갔다. 전화로 녹음을 해서 가입하는 방식이었다. 여러 동의를 받는 중간에 3개월 이내에 치료 중인 질병이 있는지를 물었고, 나는 어제와 동일하게 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상담사는 계속해서 치료가 끝났다는 쪽으로 유도 질문을 했다. 가입 당시에 앓고 있는 질병을 숨기면 가입자의 책임이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사실대로 말했다.
"수술하신 건 아니시죠?"
"수술은 안 했고 약을 복용하고 있고 현재 치료 중이에요."
"수술 계획은 현재 없으신 거죠?"
"의사 선생님이 권유하지 않으셨어요."
"그럼 약만 먹으면 치료가 끝나는 거죠?"
"아니요. 다시 진찰하고 경과를 봐야 해요."
"약을 며칠 타 오셨는데요? 그거 먹으면 끝나는 거 아니에요?"
"삼 개월 타 왔고 삼 개월 후에 다시 검진해야 해요."
"아... 그럼 좀 어렵겠는데요..."
상담사는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는지 당황하면서 그렇다면 보험 가입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어제도 이미 다 말했는데 가능하다고 하지 않으셨냐고 되묻자 그에 대한 대답은 없이 수술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은 다들 수술 많이 하고 하루 만에 회복을 한다는 둥, 약을 오래 먹는 게 오히려 건강에 좋지 않을 거라는 둥, 자기 고객들도 수술 많이 한다는 둥 내가 듣기에는 수술을 한 뒤에 보험을 가입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실제로 수술하고 삼 개월 뒤에는 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으니까.
나는 두 번 정도 거절의 의사를 표시했다. '의사 선생님이 수술하자고 하지 않았다.', '약 먹고 관찰하면 된다고 했다.'라고 말했음에도 자기가 아는 고객들의 사례를 말하며 수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가 의사의 판단에 따를 것이고 수술 의사가 없다고 정확히 말한 뒤에야 그럼 삼 개월 뒤에 다시 전화를 하겠다고 했다. 나는 기분이 상해 전화하지 마시라고 하고 통화를 끝냈다.
전화를 끊고 나니 화가 점점 났다. 남의 몸이라고 수술을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건가? 내 몸보다 보험가입이 중요하다는 건가? 아무리 인격보다 돈을 택했다지만 너무 쓰레기 아닌가?
혼자 열을 내다가 다시 전화기를 들어 상담사에게 연락했다. 수술 권유하시는 건 아니지 않냐고 따지니 자기는 수술을 권유한 게 아니고 고객들이 많이 수술을 한다고 말했을 뿐이라고 했다. 녹취록을 달라고 했더니 고객센터를 통해서 받으라고 그럼 되지 않냐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분이 안 풀려서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내가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엄마는 진짜 나쁘다고 하면서도 참으라고 했다. 언니는 고객센터에 연락해서 녹취본 꼭 받으라고 하고 소비자원에 신고하라고 했다. 언니의 방식이 내 방식이었다.
언니도 불의를 보면 참지 않았다. 언니가 고3 때 대학교 면접을 앞두고 1:1 코칭을 받았는데 학원은 카메라만 틀고 언니를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언니는 두세 시간을 듣고 환불을 요구했다. 삼일 수업에 백만 원이나 하는 수업료를 이미 지불한 상태였다.
학원은 고등학생인 언니를 얕잡아봤는지 환불을 거부했고 언니는 도움 되는 게 없으니 전액 환불을 주장했다. 고등학생만 쫓아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학원은 푼돈을 얼마 쥐어주고 언니를 집으로 보냈다.
언니는 집으로 가지 않았다. 교육청에 바로 전화를 했다. 불법으로 학원을 운영하는 곳이 있다고. 언니는 돈을 들고서야 집에 돌아왔다. 언니가 환불받고자 할 때 수강료를 돌려받지 못한 적은 없었다. 그 용감한 기개는 지금 좀 더 차분해졌지만 여전히 정의구현 쪽으로는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간다.
나는 친구들에게도 말했는데 대부분 화를 내주고 신고를 하라고 하기도 잊으라고 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 친구만이 내 말을 잘못 이해했다.
"내가 보험 들기로 했는데 약물치료 중인 거 있어서 가입이 안됐어. 근데 상담사가 나한테 수술을 권유하더라. 요즘 하는 사람들 많다고."
"아 그래? 수술이 좋데?"
나는 머리를 띵 맞은 것 같았다. 그 친구는 평소에 보험이나 의료, 은행 쪽으로는 무관심하던 편이었다. 나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쉽게 칼을 대면 안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처음 간 개인병원에서는 수술 쪽으로 생각을 했고, 나는 유명한 의사를 검색해서 진단서를 가지고 대학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대학병원에서는 어리고 미혼이고 수술을 당장 해야 하는 건 아니며 약을 먹고 지켜보는 것이 좋다고 했다. 최대한 수술은 안 하는 게 좋다며.
세 군데의 병원을 가고 의사와 상의하고 결정 내린 치료였다. 그렇기에 나는 가볍게 권유하는 상담사의 말에 화가 났다. 그런데 내 친구 같은 사람은 화도 나지 않고 그 말을 믿고 실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차가워졌다. 이건 내가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구나. 내 화는 정당하며 참는 것이 나에게도 그 회사에게도 다른 고객들에게도 안 좋겠구나.
나는 다음날 영업시간이 되자마자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내가 겪은 일을 설명했다. 상담원도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진짜 그런 말을 했냐고. 상황을 정리해서 해당 부서에 전달하겠으나 현재 계약이 체결되지는 않아 고객센터에는 녹취본이 없고 해당부서에 요청해서 있다면 주겠다고. 하루가 지났지만 아직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내가 단지 화를 낼 명분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나도 화를 내는 건 기본적으로 좋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니까. 그래도 나는 내 화를 쌓아두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