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단편소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 나오는 레드페터는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난 사냥 원정대들의 공격을 받는다. 그렇게 총상을 입고 기절한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증기선에 있는 우리 안. 황금해안 곳곳을 누비며 자유롭게 살던 그와 동족들은 졸지에 모든 걸 박탈당하고 만다.
최초의 실패이자 최고의 실패를 맞이한 최악의 상황. 레드페터의 말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출구가 없는 상황이다. 눈앞에 나타난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감당해야만 하는 레드페터는 결국 중대한 결심을 한다. 출구가 없으니 출구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자유 대신 출구를 선택한 레드페터가 인간들에게 뱉은 최초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헬로!
이 대사를 기점으로 레드페터는 더 이상 유인원이 아니게 된다.
어떻게 보면 현명한 선택이다. 인정하기 싫어도 황금해안에서의 자유는 종국을 맞이했고, 그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치명적인 실패와 마주한 레드페터는 자신의 정체성까지 바꿔가며 인간 세상의 일원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여기 또 다른 유인원이 있다. 그의 이름은 영화 ‘혹성탈출’의 주인공 시저. 치매 치료제를 주사받은 모체의 영향을 받아 선천적으로 지능이 높은 시저는 마음씨 좋은 보호자 윌과 함께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시저의 높은 지능은 도리어 그의 행복한 삶의 발목을 붙잡고 만다.
어느 날 치매에 걸린 윌의 아버지를 보호하려던 시저는 이웃을 공격하게 되고 그로 인해 유인원 보호소로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최초이자 최악의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윌에 대한 배신감. 사육사의 학대. 그리고 어리석은 동족들까지. 지능이 뛰어난 시저에게 이 모든 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그렇게 유인원과 인간이 동등한 존재라 생각했던 시저의 믿음은 철저하게 실패하게 된다.
더 이상 자신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한 시저는 과거보다 눈앞에 있는 현실로 시선을 돌린다. 바로 유인원을 해방해야 한다는 현실 말이다.
반란의 날.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사육사는 그간 어딘지 보통 유인원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던 시저에게 인간과 유인원이 다름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구타와 함께 모욕적인 말을 던진다.
‘더러운 손 치워 이 원숭이 새끼야.’
끝까지 유인원을 열등하게 생각하는 사육사와 그 사실을 부정하던 시저. 결국 시저는 인간의 목소리로 이 영화의 주제와 자신의 존재를 의미하는 대사를 외친다.
노우!
그리고 이 대사를 기점으로 시저는 완전무결한 유인원이 된다. 상당히 용감한 선택이다. 믿음은 실패했고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유인원의 정체성을 버릴 수도 없다. 그런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그렇게 시저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길을 택한다.
얼핏 보면 이 두 이야기의 공상과학적인 설정은 재미있지만, 그 이면에 숨어 있는 현실성은 섬뜩하다. 두 유인원에게 들이닥친 실패라는 설정이 우리에게 꽤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실패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실패가 두려운 건 뭔가에 실패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실패란 실패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물리적인 상황이든 정신적인 상황이든 아니면 그 둘 모두이든 말이다.
그래서 모든 실패는 결국 헬로나 노우로 귀결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실패 이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