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기말에 나타난 이츠키와 히로코
혜주에게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마포대교 한복판에서 울리는 엄마의 전화에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갑자기 밀려오기 시작한 죄책감에 결국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핸드폰의 전원이 꺼지려던 찰나 엄마가 보낸 메시지가 왔다. 평소 이모티콘을 남발하는 엄마답지 않게 깔끔한 메시지였다.
삼촌이 죽었어...
느닷없는 사람의 느닷없는 소식에 나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제 기능을 시작한 머릿속에 떠오른 건 방금 전까지 하려던 일이 아닌 수 만개의 물음표였다.
삼촌이 죽었다고? 대체 왜? 이제 겨우 마흔한 살 먹은 사람이 갑자기 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자 통화버튼을 터치하는 손가락이 후들거렸다. 정신이 없는 건 엄마 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평소처럼 전화를 바로 받지 않았고 통화음이 늘어질수록 나는 더욱 초조해졌다.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소리에 종료 버튼을 누르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두 번째 전화 역시 엄마는 받지 않았다.
기약 없이 늘어지는 연결음에
불안한 마음에 이리저리 심란하게 움직이던 시선이 다리 난간에 적혀있는 자살예방 글귀에서 멈췄다.
잘 지내지?
그 글귀를 보자 육 년 전 어떤 날이 떠올랐다. 갑자기 그림을 그리겠다는 말과 함께 삼촌이 사라져 버린 그 날이.
삼촌은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서 사라졌지만 엄마를 제외한 그 누구도 삼촌을 찾지 않았다. 마일리지처럼 차곡차곡 쌓여온 평소의 행실 덕분이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 형제처럼 지내던 삼촌이었지만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찾고 싶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바쁘기도 했고 삼촌과의 사이도 예전 같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나이를 먹어도 도무지 철이 들지 않는 모습이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 삼촌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냥 막연히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양반은 어디선가 한량처럼 살고 있을 거라고, 풍족하지는 않지만 걱정 없이 살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나는 막연히 삼촌은 잘 살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난 어째서 그렇게 쉽게 생각했던 걸까. 잘 지낸다는 말을 추측이 아닌 당사자에게 직접 들었어야 했는데. 대체 왜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던 걸까.
세 번째 통화버튼을 터치할 때 삼촌과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유난히도 추웠던 세기말의 겨울. 그 겨울에 함께 봤던 영화. 그 영화의 주인공이 애처롭게 외치던 대사. 그 대사가 귓가에 맴돌았다.
잘 지내나요? 저는 잘 지내요.
****
세기말이었다. 외환위기의 여파를 이기지 못해 도산한 기업들의 기사가 연일 쏟아져 나왔고 당당 한척하며 출근했지만 목적지를 상실한 가장들이 고개를 떨군 채 거리를 배회하던 시절이었다.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하는 사람들의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왔고 혹시라도 실직한 친구의 아버지가 받을까 전화하기 전 수십 번도 더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이 점점 늘어갔다. 대표적인 게 내 짝꿍인 부반장이었다. 그는 공장이 멈춰 일자리를 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해 혼자서 살고 있었다. 항간에는 그의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사실 자살한 건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라는 소문도 돌았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동생을 죽이고 자살했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그건 확실히 헛소문이었다. 내가 알기로 그는 형제가 없는 외동아들이었으니까.
소문이야 어찌 됐든 적어도 그가 행복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고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는 매번 수업시간마다 공책에 뭔가를 그려가며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대 예언가야. 자기가 섬기던 국왕이 마상 창 시합 도중 사고로 죽는 일과 왕의 아들들이 모두 요절할 일까지 모두 예언했지.-
-오. 까리하네.-
-그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의 등장 같은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도 모두 예언했어.-
-그냥 머리가 굉장히 좋은 건 아닐까?-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그 이름까지 비슷하게 예언하는 건 불가능 하지.-
-그래서 그 사람이 또 어떤 걸 예언했는데?-
-1999년 일곱 번째 달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올 것이다.-
-와. 종말까지 두 달 남았구나.-
어딘지 애매한 온도를 보이는 내 반응에도 그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쉬는 시간이 되면 다른 아이들에게도 공책을 보여주며 열심히 설명했다.
터무니없는 행동이었지만 누구 하나 싫은 내색 없이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줬다. 그 이유는 단순했는데 어딘지 한심해 보이는 이미지와 다르게 그는 운동으로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멋모르고 덤벼들었다 역으로 당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반응을 보이며 그의 말을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열렬한 전도활동을 제지할 수 있는 건 야구부뿐이었다. 그는 학급에서 유일하게 부반장을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야구공만큼이나 사람도 잘 때리는 걸로 유명했다.
그는 부반장이 전도활동을 할 때마다 반 분위기를 흐린다는 이유로 뒤통수를 때렸다. 상황이 그쯤 되어야 부반장은 전도활동을 멈췄고 뭐라 웅얼거리며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음 쉬는 시간이 되면 또다시 전도활동을 하며 반 전체를 들쑤시고 다녔고 그의 행동에 우리는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야구부가 노스트라의 노자만 꺼내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자 겨우 잠잠해졌다. 그렇게 반에는 겨우 평화가 찾아왔다.
그해 여름방학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달력의 숫자가 칠월을 지나 어느덧 팔월의 중순을 향하고 있었다. 개학 전날 밤, 나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예언이 문득 떠올랐다. 일곱 번째 달에 방문하겠다던 공포의 대왕이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삼촌의 말썽에 칠월 내내 집안이 시끄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종말이 올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개학 전날 들뜬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공포의 대왕이 실종된 지금 그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설마 그 칠월이 음력 칠월이라는 말 따위를 하지는 않을까?
하지만 온갖 기대에 가득 차 들떠있던 마음은 의외로 싱겁게 식어버렸다. 다음날 아침 교실에 들어서자 부반장은 교단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고 칠판에는 뭔가 커다랗게 적혀있었다.
Y2K.
때마침 야구부도 전국대회에 나간 덕분에 우리는 무기력하게 그가 선택한 새로운 종말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1900년과 2000년은 뒷자리가 똑같아 컴퓨터가 구분을 못해 대혼란이 시작될 거야. 금융망, 비행기, 위성 오작동은 물론이고 심지어 핵무기 제어장치까지 오작동을 일으켜 핵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그렇게 되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훨씬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가 바라는 종말은 결국 오지 않았다.
연말이 되자 이 세상까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날 둘러싼 세계는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 지역은 고교 비평준화 지역이었고 교육열이 높기로 유명했다. 아들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우리 지역의 이름이 붙은 명문 고등학교로 진학시키길 원했고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더욱 심했다.
아버지는 매년 다수의 서울대생을 배출하는 모교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거기다 모교의 동문회 회장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내가 본인처럼 서울대에 가기를 바랄 만큼 현실감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지역의 명문고인 자신의 모교에 내가 턱걸이로라도 들어가기를 바랐고 그것이 동문회장이자 고위공직자인 아버지의 자존심 마지노선이었다.
하지만 칠 년 전 삼촌이 그랬듯이 나 또한 그런 아버지의 자존심을 처참하게 짓밟았다. 나는 아버지의 모교보다 한 단계 아래인 학교에 겨우 붙었다. 나쁜 학교는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기준에 한참 벗어난 학교였고 집안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때 삼촌은 아버지가 소개해 준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대기업 공단의 하청업체였는데 당연히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둔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았다. 삼촌의 적성은 수시로 변했는데 그때마다 회사를 그만두고 적성을 따라가겠다 말했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좋은 말로 타일렀다.
여느 때처럼 또다시 새로운 적성을 발견한 삼촌은 저녁식사 후 거실에서 뉴스를 보고 있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형님. 드릴 말씀 있어요.-
-해봐.-
-드디어 제 적성을 찾았어요. 회사 그만두고 락커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의 반응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살얼음판처럼 겨우 유지되고 있던 집안 분위기는 삼촌의 락 스피릿 때문에 산산조각 났다. 불똥은 쥐 죽은 듯 방에 숨어있던 나에게도 튀었다. 흥분한 아버지는 날뛰었고 엄마가 그런 아버지를 막는 사이 삼촌과 나는 집 밖으로 몸을 피했다.
집 밖으로 피신한 삼촌의 계획은 단순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밤 열한 시가 되면 잠자리에 들었고 그때 까지만 버티자는 것이었다. 단순하지만 명료한 방법에 내가 놀라자 삼촌은 웃으며 말했다.
-락커는 언제나 돌파구를 찾기 마련이지.-
하지만 밤 열한 시까지 버티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쫓겨난 우리의 옷차림은 허술했고 천년의 마지막 겨울은 차가웠으며 우리의 주머니는 가벼웠다. 두 사람의 주머니를 탈탈 털자 현금 만 이천 원이 나왔다. 우리는 어떻게든 이 돈으로 서너 시간 버틸 궁리를 했다.
생각보다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PC방을 가기에 우리 모두 게임에 관심이 없었고 그렇다고 남자 둘이 카페에 가기에는 아직 이른 시대였다. 락 스피릿이 물씬 풍기는 당구장이나 술집에 가기에는 내가 어렸다. 결국 우리가 선택한 건 영화였다.
삼촌과 나는 집 근처에 있는 맘모스 극장까지 걸어갔다. 이름만큼이나 거대한 외관을 자랑하던 그곳은 우리 지역에서 가장 큰 영화관이었다. 그리고 늦은 밤까지 상영하는 곳이기도 했다. 싸늘한 대기를 가로질러 겨우 극장 앞에 도착한 우리는 얼어붙고 말았다. 손으로 직접 그린 거대한 영화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러브레터.
너무 간질거리는 제목에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차 성징기의 한 복판에 있는 열여섯 소년과 스물셋의 예비 락커가 함께 보기에 적합한 영화가 아니었다.
나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삼촌을 쳐다봤다. 삼촌은 락 스피릿에 어울리지 않는 장르에 화가 났는지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선택권은 만 이 천 원에서 지분이 좀 더 많은 삼촌에게 있었다. 난 어떤 선택을 하던 삼촌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날 둘러싼 세계는 종말에 가까웠고 더 깊은 수렁으로 추락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타락하기로, 끝없이 추락하기로 결심했고 오늘 하루는 삼촌의 락 스피릿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술집. 당구장. 뭐가 됐든 와라. 난 준비가 됐으니.
내 마음의 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삼촌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거친 눈빛, 거친 표정, 거친 목소리로 내게 뭐라 말하려던 찰나 차가운 바람이 주변을 흔들었다. 뼛속까지 시리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쓴다는 걸 깨달았을 때 삼촌은 번뜩이는 눈빛으로 말했다.
-어우... 야. 춥다. 그냥 들어가자.-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은 우리였지만 영화가 시작하자 곧 넋을 잃었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등장하는 히로코의 미모도 미모였지만 그녀를 둘러싼 순백의 풍경에 압도당했다. 히로코가 족적을 남기며 설원을 가로질러가는 롱테이크 신이 우리에게 속삭였다.
웰컴 투 이와이 월드.
사고로 세상을 떠난 남자 이츠키를 잊지 못한 히로코가 그의 옛 주소로 편지를 보내며 모든 이야기가 시작됐다. 하지만 편지는 히로코와 쌍둥이처럼 닮은 여자 이츠키에게 전달됐고 덕분에 작은 오해도 생겼지만 두 여자는 잘 해결했다. 히로코는 남자 이츠키의 첫사랑이 여자 이츠키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고,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와 관련된 학창 시절 일화를 편지로 보내 두 여자는 추억을 공유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생소한 일본 영화였지만 거부감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잘 짜여진 스토리. 배역에 어울리는 배우. 스토리에 걸맞은 색감. 너무 지루하지 않게 알맞게 들어간 개그 씬. 그리고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까지. 모든 게 하나같이 완벽했고 한데 어우러져 더욱 완벽한 서사를 보여줬다.
나도 나였지만 삼촌은 영화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평소 거칠고 어딘지 반항적인 눈빛이 아련해 보였다. 더 이상 락커가 아닌 발라더에 어울리는 눈빛이었다.
영화 내내 좋은 장면들이 많았지만 후반부에 이르자 명장면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남자 이츠키의 친구들이 버릇처럼 흥얼거리던 노래가 사실 그의 유언이었다는 걸 알게 된 히로코.
내 사랑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간다
그 노래를 들은 히로코는 남자 이츠키가 죽는 순간까지 여자 이츠키를 잊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된다. 심증이 물증이 된 순간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는 차분했다. 도리어 사실 남자 히로코에게 청혼받지 못했던 비밀을 사람들에게 말한다. 여자의 자존심이란 이유로 평생 감추고 싶었을 비밀을 스스로 말한 건, 어쩌면 그녀가 더 이상 과거에 살지 않기로 결심한 건지도 모른다.
잘 지내나요. 저는 잘 지내요.
다음날 아침 설원에서 남자 이츠키에게 외치는 히로코의 저 대사 속에서 나는 내 가설이 맞다고 확신했다. 영화 내내 이츠키에 대한 기억으로 잘 지내지 못해 연적과 추억을 공유하는 걸로 위안을 삼던 그녀가, 더 이상 과거에 살지 않기로 결심함으로써 잘 지낸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거라고.
모든 걸 알고 훌훌 털어버린 히로코와 달리 여자 이츠키는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비밀을 알게 됐다. 느닷없이 찾아온 중학교 후배들이 내미는 책을 받은 여자 이츠키. 그녀는 오래전 남자 이츠키가 반납을 부탁했던 책의 독서카드에 그려진 자신의 초상화를 발견한다. 뒤늦게 전달된 감정에 어쩔 줄 몰라하던 그녀의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자정이 넘은 시간,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과거를 털어낸 히로코도 뒤늦게라도 감정을 전달받은 이츠키도 모두가 행복해진 영화라는 내 말에 삼촌은 고개를 저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뭐가 맞고 뭐가 틀렸는데?-
-히로코는 행복해졌지만.. 적어도 여자 이츠키는 아니야.-
-왜?-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두 사람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어. 남자 이츠키의 죽음과 여자 이츠키 아버지의 죽음에서.-
생각해보니 삼촌의 말이 맞았다. 영화의 주요 인물들 모두는 두 사람의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남자 이츠키의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한 히로코와 그의 친구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자 이츠키와 그녀의 가족들.
-영화 내내 벗어나지 못하다가 결국 마지막에 벗어나게 되잖아. 히로코는 설원에서 외치며. 이츠키는 제시간에 병원에 도착하며.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과거의 굴레를 벗어나게 되지.-
-그러니까... 모두가 행복해 진거 아니냐고.-
-그럴 뻔했는데.. 여자 이츠키가 마지막에 알게 됐잖아. 남자 이츠키가 자기를 좋아했다는 걸. 그 순간 여자 이츠키에게는 새로운 과거의 굴레가 생긴 거야... 남자 이츠키라는 과거의 굴레가 말이지...-
추위에 몸을 덜덜 떨어가며 툭 던지듯 뱉은 삼촌의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삼촌은 가끔씩 저렇게 번뜩이는 발상을 할 때가 있었다. 그게 정말 가끔이어서 문제였지만.
아파트 입구에 들어선 우리는 고개를 들어 집을 쳐다봤다. 거실까지 불이 꺼져 있는 걸로 봐서 모두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너무 추워서 빨리 들어가고 싶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삼촌은 불이 꺼져있는 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과거를 벗어나지 못한 다는 건.. 끔찍한 일이야.-
-아직도 영화 이야기야? 삼촌.. 나 추워.-
-아니. 현실. 너.. 내 말 새겨들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과거에 붙잡혀 살지 마. 형님이 나온 그 잘난 학교 못 갔어도 너 잘못한 거 하나 없어. 아직도 과거에 붙들려 있는 형님 잘못이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삼촌의 말에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세계에 종말이 왔다고,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해 죄인처럼 마음이 무거웠지만 삼촌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다정함 하나 없이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충분히 부드러웠고 따뜻한 위로였다.
하지만 나는 위로받았다는 사실이 괜히 부끄러워 말을 돌렸다. 사춘기 소년 특유의 허세였다.
-삼촌이나 잘해. 삼촌은 안 붙잡혀 살았어?-
-나라고 별수 있냐. 내내 붙잡혀 살았지. 근데 이제부터 그렇게 안 살려고. 과거에 붙잡혀 살 바에야 차라리 종말론자가 되겠어.-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종말론자는 종말이 오기를 기다리며 내일을 보고 살잖아. 훨씬 진취적이지.-
***
삼촌은 구로에 있는 한 장례식장에 있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물론 고모와 고모부까지 와 있었다. 몇 년 만에 본 아버지와의 만남이 거북하다 느낄 새도 없이 나는 삼촌이 안치되어있는 곳으로 갔다.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는 삼촌의 모습은 어딘지 낯설었다. 내가 알던 삼촌이 아니었다.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웠던 삼촌이 까맣게 말라있었다.
도무지 모든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흔들어 깨우면 금방이라도 삼촌이 일어날 것 같았다. 나는 삼촌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미 너무 늦어 버렸지만.. 그 시절, 그때, 잠적한 삼촌을 어떻게든 찾아가 직접 전해야 했던 말을.
-삼촌... 잘 지냈어? 나는... 잘 못 지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