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괴팍한 아이였다. 괴팍해도 너무 괴팍했다. 투철한 탐험정신으로 온 동네를 들쑤시며 사고 치기 일쑤였고 엄마는 그런 나를 잡아 오느라 진땀을 뺐다. 나이를 조금 먹자 내 활동영역이 이웃마을까지 확대되자 엄마는 수도 없이 기도를 했다고 한다.
제발 이 녀석이 빨리 학교에 입학하게 해 달라고.
엄마의 소원대로 몇 년 뒤 국민학교에 입학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동네를 들쑤시던 괴팍함이 학교라고 차별할 리가 없었으니까. 나는 수업을 들어야 할 이유도 선생님의 말을 들어야 하는 사실도 특히 그 숙제라는 것의 의미도 이해를 하지 못했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내 멋대로 하고 다녔다. 결국 선생님도 나의 괴팍함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고 구제불능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삼 학년이 된 어느 날. 아무리 발바닥을 때려도 숙제를 해오지 않은 나의 꾸준함에 감탄한 선생님은 결국 도서실 청소 담당이라는 포상을 내렸다. 졸지에 청소구역이 하나 더 생긴 난 친구들이 모두 집에 간 시간에도 도서실에 남아 청소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거기서 우연히 책 한 권을 접하게 됐다. 어딘지 모나 있던 나처럼 홀로 삐죽 나와 있던 책. 바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었다. 아동 축약본이라고는 믿기기 힘든 어딘지 그로테스크한 표지에 반한 나는 주저 없이 책을 펼쳤고 이것은 나와 소설이라는 장르의 첫 만남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책을 감명 깊게 읽어서였을까? 나는 갑자기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학교에는 가을이면 교내 학생들의 글을 모아 책으로 만드는 전통이 있었는데 거기에 출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영감을 얻기 위해 산과 들과 하천 주변을 들쑤시고 다녔고 결국 구름을 소재로 한 동시를 써서 선생님에게 제출했다.
다음날 선생님은 글을 제출한 아이들을 교탁으로 불렀고 나도 당당하게 그 무리에 끼어 있었다. 선생님은 친절한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맞춤법이 틀린 부분이나 표현이 어색한 곳을 교정해 줬고 나는 내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교정을 마친 아이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내 차례는 오지 않았다. 나만 덩그러니 교탁 앞에 서 있었지만 선생님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마치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결국 나는 감정 하나 없는 얼굴로 원고지 뭉치를 정리하는 선생님의 모습만 물끄러미 보다 조용히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 모습에 짓궂은 애들 몇 명이 킥킥거리며 놀렸지만 화가 난다거나 슬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때 내가 받은 감정은 복잡했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놀랐다에 가까웠다.
‘어? 나는 이런 걸 하면 안 되나?’
덕분에 모처럼 뭔가에 집중했던 나는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면에 어떤 찜찜한 무언가가 자리를 잡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야 나는 그 찜찜함이 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던 친구의 작가가 되고 싶다는 뜬금없는 고백에 다른 친구 한 놈이 웃음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마치 그건 전혀 너 답지 않다는 것처럼.
딱히 악의가 있는 웃음은 아니었지만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가워졌고 급격하게 표정이 굳어버린 급우의 얼굴에서 나는 발견했다. 열 살 때 선생님과 몇몇 아이들의 비웃음을 받으며 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던 내 모습을. 그리고 수 년동안 도무지 털어내려 해도 사라지지 않던 찜찜함이 알고 보니 열등감이었다는 사실까지도.
그것은 쉽게 말하자면 외모가 평범한 사람이 배우가 되겠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이 비웃을때 받을 열등감이다. 잘생긴 사람이 배우와 어울리는 걸 당사자도 알고 있지만 굳이 그 사실을 비웃는 것으로 알려줌으로써 당사자를 한없이 비참하게 만드는 열등감. 외모가 평범한 배우도 얼마든지 있는 건 알고 있지만 그게 자신들의 주변 사람은 아닐 거라 단정 지으면서 그 사람이 성공하면 누구보다 먼저 꽃다발을 건넬 저속한 족속들이 주는 열등감 말이다.
평범함의 범주를 넘어선 일들은 재능이 차지하는 바가 압도적이다. 그래서 재능도 없고 뭔가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자가 그런 일을 꿈꾸면 마치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모난 돌 취급을 받는다. 참 슬픈 일이다. 열 살 때의 나야 실제로 모난 돌이었기에 정을 맞아도 그렇다 치지만 오랫동안 품어온 꿈을 용기 내 고백한 친구는 대체 뭘 잘못했길래 저런 취급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이런 질문에 속 시원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대부분의 모난 돌들은 정을 맞으면 그 부분을 영원히 상실해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평범한 돌 사이에 숨어 다시는 수면 위로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그게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처럼.
졸지에 정을 맞은 친구는 다시는 작가가 되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몇 년 전 레미제라블을 읽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멋대로 나 다움을 규정한 그들의 비아냥은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 있을 만큼의 배짱이 나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재능이 없어 뒤쳐진 만큼 노력하겠다는 다짐이 타자의 비아냥에 죄다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 다짐은 오래되지 않아 사라지고 말았다. 입시에 실패한 탓에 한가롭게 꿈이나 선택할 기회가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내가 작가라는 직업과 어울리기는 하나라는 의구심이.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작가가 되기를 꿈꾼다는데 뭔가 거창하게 생각했던 내 꿈도 결국 그런 평범한 생각들 중 하나는 아닌가 라는 의구심이. 결국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던 난 수년간 진지하게 품어왔던 꿈을 저버렸다. 외부가 아닌 내부의 정에 맞아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매끈한 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매끈한 돌이 되기는 생각보다 수월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 세상을 살아가기도 편해졌다. 괴팍함을 버리자 주변으로 사람들이 다가오기 시작했고 글을 쓰기 위해 심상 세계에 쏟아붓던 에너지를 외부로 쏟아내자 뭔가 의욕적인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가끔은 머릿속에서 어떤 문장이나 이야기가 흘러오기도 했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것은 이제 나와 어울리지 않았고 그런 일에 내 시간을 더 이상 허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십 수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욕망의 화신처럼 인생의 성공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했던 나는 결국 처참히 실패했다.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수년 동안 모은 돈을 주식과 지인의 가게 지분으로 모두 투자했지만 주식은 휴지조각이 됐고 믿었던 지인이 뒤통수 쳐 지분마저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산산이 부서졌고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 버렸다.
졸지에 계약직 사원이 된 나는 서울 곳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수도승처럼 살아갔다. 퇴근 후 홀로 맥주를 마시며 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달려온 건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러자 갑자기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억울함의 이유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했다. 단 한 번만 이라도 좋으니 나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나는 단 한 번도 나답게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토록 발버둥 치며 손에 쥐고자 했던 것들도 결국 내 의지가 아닌 타인들이 다들 그렇게 살고 있어서였다. 그렇다면 대체 나 답게 사는 것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너무나 우습게도 그것은 나답지 않다는 생각에 스스로 지난 시간 어딘가에 두고 온 꿈이었다. 십 수년 동안 그토록 부정하고 떨쳐냈지만 결국 내가 원하던 것은 글을 쓴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시나리오든 칼럼이든 소설이든 그 뭐가 됐든 단 한 편이라도 완벽하게 써보고 싶었다. 그런 내가 단 한 줄의 글도 써보지 못하고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어찌 억울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십 수년의 시간을 돌고 돌아 비로소 나는 진정한 나의 모습과 마주 할 수 있었다. 진정한 나 다움이란 타인의 의지가 아닌 내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자크 라캉이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너무나 유명한 이 말이 너무나 유명해진 이유는 단순하다. 수많은 사람이 거기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학벌, 안정적인 직장, 내 소유의 집, 차, 좋은 배우자 등등 성공한 인생을 상징하는 수많은 척도들이 알고 보면 자신이 아닌 타인들의 입에서 나온 욕망이고 우리 대부분은 그 타자의 욕망에 편승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살고 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그 강박 때문에 주변에 있는 모난 돌들을 그토록 비난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타자의 욕망에 눈이 멀어 간과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모난 돌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매끈한 돌은 없다. 그저 매끈해야만 산다는 강박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자기 다움을 찾을 수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