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박스
2.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사람의 감정에는 총량이 있어서 낭비하듯 써버리면 메말라 버린다고 그래서 결국에는 누구에게도 감정을 줄 수 없는 사람이 된다고 삼촌은 말했다.
무한하지 않은 감정을 의미 있는 사람에게 줘야 한다고 그리고 그 의미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삼촌의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감정 총량의 법칙을 주장하던 삼촌은 그 이론대로 자기에게 온갖 감정을 쏟아 이제는 그것이 메말라버린 가족들 앞에 누워 있었다. 지극히 건조하고 사무적인 장례식이었다.
염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시신을 보여주는 자리에서 아버지는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삼촌의 손에 쥐여 줬다. 한때나마 자식처럼 가슴에 품고 키웠던 동생에게 노잣돈을 쥐여주는 아버지의 얼굴은 감정이 부재한 석고상 같았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어딘지 삼촌과 닮아있었다. 서로 남이라 해도 믿을 만큼 닮은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었던 두 사람.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서로를 저주하듯 살아왔던 형제는 한쪽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서로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고요하게 허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형제를 보며 생각했다. 당신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
장례식이 한창일 때 아버지는 갑자기 어디서 어린 남자아이를 데리고 왔다. 서너 살쯤 돼 보이는 귀엽게 생긴 아이였다. 한 손에 장난감을 든 채 쭈뼛거리며 서 있는 아이 주변으로 금세 가족들이 모였고 아버지는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삼촌의 아이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이의 정체에 가족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깜짝 놀라는 사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 놀란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사람.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사람. 반응은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그 행동이 가진 의미는 비슷했다.
이 미친놈이 마지막까지....
아이 엄마에 대해 온갖 추측이 난무하기 시작했지만, 아버지는 거기에 대해서 말을 아꼈다. 그리고 아버지의 그런 함구는 절대 그것을 거론하지도 말라는 무언의 명령과도 같았다. 하지만 고모 부부는 궁금한 걸 참지 못한 성격이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의 엄마에 대해 추론하기 시작했다.
물론 거론되는 후보들은 많았다. 남매 중 할머니의 외모를 홀로 물려받았다는 삼촌은 그 외모만큼이나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했으니까. 그렇게 거론되는 수많은 이름 중에 내가 기억하는 이름도 있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미장원 집 딸내미 아니야? 그... 이름이 뭐였더라?-
-경희.-
-그래. 경희 말이야. 걔가 막내 없이는 못 산다고 같이 가출도 하고 그랬잖아.-
-그런가? 그러고 보니.. 서울 어딘가에서 산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네..-
-경희네. 경희.-
경희 누나로 확신하는 분위기는 엄마가 끼어들자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아이의 완강한 저항에 결국 밥 먹이는 걸 포기한 엄마는 고모 옆에 앉으며 말했다.
-경희 칠 년 전에 결혼했어요. 애도 둘이나 낳고 잘살고 있는 애를...-
-그러면 말 좀 해줘 봐요. 언니는 오빠한테 들었을 거 아니에요.-
-아무튼... 경희는 아니에요...-
엄마의 말에 고모는 풀이 죽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저 유력한 후보가 사라졌을 뿐 아직도 많은 후보가 남아 있었다. 고모 부부는 또다시 남은 후보 중 가장 유력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고모는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는 아이처럼 온갖 이름이 쏟아냈고 그때마다 번번이 엄마에게 철저히 논파당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고모는 점점 초조해져 갔다. 더는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는지 고모의 미간은 구겨졌다. 때가 되면 아버지가 말해줄 텐데 왜 저렇게까지 집착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 고모가 입을 열었다.
-언니... 걔 아니에요? 예전에 막내가 결혼하겠다고 데리고 온 아이.-
예상치 못한 고모의 말에 나는 놀랐다. 수많은 그녀들이 그렇게 매달려도 계절이 바뀌면 냉정하게 그녀들을 떠났던 삼촌에게 결혼하려던 사람이 있었다고? 도무지 고모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나는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의 당황스러운 표정은 고모의 말이 사실이란 걸 시인하고 있었다.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은 말없이 엄마를 쳐다봤다. 진상을 요구하는 무언의 압박에 엄마를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고모도 참... 언제 적 일을... 어쨌든 그 애도 아니에요..-
때마침 들어온 조문객을 핑계로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모도 그런 엄마를 따라 일어났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체 누구지 라며 중얼거리는 고모에게 다가가 말했다.
-고모. 그게 무슨 말이야?-
-응? 뭐가?-
-삼촌이 여자를 데리고 왔다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너 기억 안 나..? 할아버지 제사 때 막내가 뜬금없이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난리 났었잖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고모는 걸음을 멈추고 또다시 미간을 구기기 시작했다. 뭔가를 떠올릴 때 미간을 구기는 버릇은 삼 남매의 공통적인 버릇이었다.
-그래... 맞아... 넌 그때 오 학년이었어. 그래서 그날 현장학습인가 뭔가 갔었어...-
-뭐? 그럼 삼촌이 열아홉 살에 결혼하겠다며 여자를 데리고 왔다고?-
-왜 아니겠어. 그것도 네 할아버지 제삿날에... 생각해봐라. 네 아빠 성격에 막내 몸이 남아났겠니?-
고모의 말을 듣고 보니 어렴풋하게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현장학습에서 돌아온 나를 침대에 누워 맞이하던 삼촌의 모습이. 어디 아프냐는 내 말에 운동하다가 넘어졌다던 삼촌의 말이.
-그래서... 그 후로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 헤어졌지.-
-결혼까지 생각했다며... 그렇게 쉽게?-
고모의 미간이 또다시 구겨졌다. 차곡차곡 쌓아둔 과거의 서랍장을 한참 동안 열어보던 고모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여자애가... 막내를 떠났어... 한마디 말도 없이.-
***
공직에 몸담은 아버지의 지난 세월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저녁이 되자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가족은 덩달아 바빠지기 시작했다.
조문객을 맞이하느라 정신없던 그때 아이 밥 먹이기에 연달아 실패한 엄마가 나를 불렀다.
-왜? 바빠 죽겠는데.-
-여기는 사람 많으니까 됐고. 밖에 나가서 커피 몇 잔만 사와. 종일 커피를 안 마셨더니 머리가 아프네.-
-커피? 정수기 옆에 잔뜩 쌓여 있던데?-
-세상에... 자식이라고 하나 있는 게... 넌 아직도 엄마 취향도 몰라? 엄마 인스턴트 안 마셔.-
-까탈스럽기는... 알았어. 금방 다녀올게요.-
-그리고 가는 길에 애도 좀 데려가 주스 같은 거라도 사 먹여. 아까부터 뭘 통 안 먹네...-
갑자기 훅치고 들어온 아이의 존재에 놀라 엄마를 쳐다봤다. 부하직원에게 업무를 넘기는 상사처럼 자연스럽게 아이를 넘기는 모습에 약간의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런 배신감을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이 또한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엄마를 올려다봤고 그렇게 두 개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엄마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이 집안 남자들 낯가리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하지만 그렇게 애처롭게 쳐다보는 나와 아이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우리의 등을 떠밀어 장례식장 밖으로 나가게 했다. 졸지에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 우리는 길 건너편 카페라는 긴 여정의 첫 발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없었다.
자박 거리는 아이의 보폭에 맞춰 겨우 도착한 카페에는 사람이 많았다. 아메리카노와 과일주스를 주문하자 여자 직원이 주문이 밀려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아이는 친절하게 설명하는 여자 직원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아이와 눈이 마주친 직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에구. 예뻐라. 몇 살이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는지 아이는 수줍게 손가락 네 개를 보여주곤 후다닥 내 뒤로 숨어 버렸다. 부끄러워하는 아이를 데리고 빈자리를 찾아가자 여자 직원의 시선도 덩달아 우리를 따라왔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집요했다.
아이를 자리에 앉히고 맞은편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건만 여자 직원의 시선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있었다. 나는 우리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싶어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여자 직원은 잠시 민망한 표정을 하더니 이내 흐뭇한 미소를 보여줬다. 그 미소를 본 순간 나는 그녀가 뭔가를 오해해도 단단히 했다는 걸 알게 됐다.
직원의 미소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참 귀여운 아드님을 두셨네요.
졸지에 나는 잠투정을 부리는 아이를 데리고 나온 다정한 아빠가 된 것이었다. 악의 없는 그녀의 오해에 씁쓸한 웃음이 밀려 나왔다. 그러다가 문득 그렇게 보여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 년 전 이혼이라는 결정만 하지 않았어도 분명 이만한 아이가 있었을 테니까. 아니... 이런 아이가 있었으면 이혼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까?
그 순간 이혼 전 아내가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아이...? 오빠는 지나간 시간 어딘가에 뭔가를 두고 온 사람이야. 그리고 그런 사람은 그 어떤 것도 담을 수가 없지... 사랑도.. 우정도.. 가족도... 그리고.. 자기 자식도.
기습적으로 떠오른 아내의 비난에 갑자기 심박동 수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그 느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을 돌렸다. 발작을 일으킨 사람처럼 주변을 둘러보던 내 눈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남녀가 들어왔다. 뭐가 됐든 도피처가 필요했던 나는 일면식도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두 사람의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두 사람은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였다. 취향이 비슷해 둘은 금세 친해졌고 빠른 속도로 주변에서 인정하는 베프가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성 베프가 그렇듯 아슬아슬한 경계에 걸쳐있는 그 관계는 조금이라도 아차 하는 순간 사정없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경우에는 양쪽 모두가 그랬다.
두 사람은 비슷한 취향을 공유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함께 만화책방에 들르는 걸 좋아했고 주말이면 영화관에서 덜덜 떨며 공포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다. 코인 노래방에 가서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고 좌판에서 파는 오렌지를 교실에서 까먹는 것을 좋아했다. 치킨버거를 반으로 잘라 나눠 먹는 것을 좋아했고 같은 향수를 사서 뿌리는 걸 좋아했다. 어느덧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게 됐고 그런 남자를 여자는 좋아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감정의 관성에 미끄러져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친구와 연인 사이의 어느 지점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쩍 가까워진 두 사람의 관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각변동을 맞게 됐다.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그 애매한 관계에 나름 만족했던 남자와 달리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여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으니까. 여자는 고백의 여부가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사춘기 소녀였고, 남자는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감을 이길 용기가 없던 사춘기 소년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치명적인 차이는 이제 막 만개하기 시작한 청춘이란 꽃을 순식간에 시들게 했다.
남자가 회한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솔직히 이해할 수 없더라. 네가 갑자기 그 동아리 선배라는 놈한테 고백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는데 머리를 한 대 쾅 얻어맞은 것 같았거든.-
아무래도 여자는 기다림에 지쳐 그 또래의 소녀들이 즐겨하는 방법의 하나를 썼던 모양이었다. 성숙한 은유로 소년들의 질투심을 유발하는 방식. 하지만 애석하게도 여자보다 성장이 느린 그 또래의 소년들은 그런 세련된 은유를 읽어 낼 만큼 성숙한 구석이 없다. 대부분의 소년은 그 상황이면 이렇게 반응한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그냥. 이런 생각이 들더라. 얘는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지? 그래도 그동안 우리가 뭔가 그럴듯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나만의 착각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남자의 말에도 여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단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처럼 주절거리는 남자의 얼굴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미소는 남자의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걸 함축하고 있었다. 그 시절 자신들이 함께 쌓아온 추억이라는 시간과 성숙함의 차이로 그것을 놓쳐버렸다는 상실감과 어쩌면 그 순간만 잘 넘겼더라면 다른 미래를 맞이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그리고 어쩌면 연인이 됐을지도 모르는 이 두 남녀의 모습은 몇 년 전 봤던 어떤 영화를 떠올리게 했다.
그 순간 남자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렸어. 그때가 고백할 타이밍이었는데 멍청하게도 그걸 전혀 알아차리질 못했거든.-
-........-
-남자라는 건 늘 이 모양인가 봐. 어떤 영화에서도 이런 말이 나오더라. 성장하는 동안 가장 잔인한 일은 여자들은 남자보다 성숙하고, 그 성숙함을 견뎌낼 남자는 없는 거라고.-
시종일관 남자의 말에 묘한 미소로 답하던 여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 나오는 대사네.-
***
학교에서 유명한 악동들인 커징턴과 개성이 넘치는 그의 친구들. 그야말로 천둥벌거숭이 같은 그들에게도 유일한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학급 최고의 모범생이던 션자이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었던 그들의 학창 시절은 그렇게 션자이라는 소녀로 인해 의미를 가졌다.
이른바 청춘의 시절. 그리고 선쟈이는 그 시절의 상징이었다.
혈기 넘치는 우리의 악동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션자이에게 들이댔다. 누군가는 돌직구로, 누군가는 마술로, 누군가는 자기 마음대로, 또 다른 누군가는 다정한 방법으로.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커징턴은 달랐다. 그는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흔하디 흔한 방식을 택했다. 이름하여 관심 없는 척하며 괴롭히기. 보다 못한 친구가 선쟈이를 괴롭히지 말라고 말하지만 커징턴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얼핏 보면 가장 유치한 행동이지만 오히려 이 유치한 행동으로 커징턴은 자신이 소년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여자가 좋아할 만한 공연을 보러 가자는 닳고 닳은 어른스러운 방식이나, 늦은 밤 그녀의 집 앞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희극적인 방식이 아닌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투박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소년스러운 방식. 바로 이것이 고등학생이 할 법한 행동이었고 그래서 커징턴은 이 영화에 나오는 유일한 소년이었다.
그 시절, 소녀가 좋아했던 유일한 소년 말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여자는 남자보다 성숙하고, 그 성숙함을 견뎌낼 남자는 없었다.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진 소년과 소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해피엔딩이 아닌 성숙함의 불균형이 만든 갈등이었으니까.
사귀고 나면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질까 걱정할 만큼 소녀는 성숙했고, 그런 고민을 이해하기에 소년은 아직 유치했다. 그리고 그 차이가 얼마나 치명적인 건지 알지 못했던 소년은 남자다움을 어필한다는 이유로 격투대회를 개최하는 악수를 두고 만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소녀는 아무 의미 없는 격투대회로 다친 소년의 유치함에 화가 났고 소년은 그렇게라도 잘 보이고 싶었던 자신의 행동을 유치하다고 비난하는 소녀의 성숙함이 야속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크게 싸우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두 사람의 싸움이 순전히 커징턴의 유치함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선쟈이가 화가 난 건 커징턴의 유치함 때문인 것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를 좋아하게 된 것도 바로 그 유치함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는 남자가 눈앞에서 다치는 모습이 달가울 여자는 세상에 없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철없이 다친 커징턴의 모습에 그녀는 화가 났던 것이다. 그것은 유치함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무심함에 가까운 행동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가 말한 유치 하다는 문장에는 성숙한 은유가 담겨있다. 왜 너는 그렇게 다쳐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거니 라는 은유가. 또는 왜 너는 내가 이렇게 놀랬는데 오히려 네가 화를 내는 거니 라는 은유가. 그리고 나 이렇게 화났고 서운한 상태니까 이번 한 번은 받아줘 라는 은유가.
미숙함을 지나 성숙함이라는 구간을 넘어서기 시작한 어른이라면 누구나 이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건 너무 뻔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존심을 부리는 것처럼 쓸데없는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너무나 뻔한 이 공식에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붙는다. 바로 앞에 말한 대로 성숙함이라는 구간을 넘어서기 시작한 어른이라는 전제 조건이 말이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커징턴은 아직 한참 미숙함의 어딘가를 지나고 있는 소년이었다.
결국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두 사람은 끝내 그 간격을 좁히지 못했고 풋풋했던 청춘의 시절은 너무나 허무하게 끝이 났다.
그렇게 한순간에 끝나버린 청춘의 아픔을 격은 두 사람. 그리고 그런 순간을 경험한 모두가 그렇듯 커징턴과 선쟈이도 각자의 방식으로 그 아픔을 이겨낸다.
몇 년 후, 전국을 강타한 지진이 발생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실로 오랜만에 통화를 하게 된다. 마치 어제까지 통화했던 사람들처럼 금세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마냥 예전 같지만은 않았다. 유치함을 버리고 성숙함을 택한 커징턴은 어느덧 어른이 되어있었고 이제야 비로소 두 사람은 같은 언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커징턴의 성숙함은 늦은 감이 있었다.
남자는 여자보다 늘 늦게 성숙하고 그 더딘 성숙함을 기다려줄 청춘이란 없으니까.
그리고 어른이란 그 달갑지 않은 현실을 인정할 수는 없어도 이해를 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두 사람은 그때 선택하지 않아 영영 상실해버린 만약이라는 가상의 미래를 공유하는 거로 서로의 마음이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서로의 처음을 나눠 가졌던 그 시절이 미완으로 끝나 버렸음을 깔끔하게 인정한다.그렇게 수년간 애매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비로소 친구라는 이름으로 결론이 나게 된다.
하지만 막상 그런 친구가 결혼한다고 하자 커징턴은 자신의 청춘이 허무하게 끝나버린 그 순간이 내심 아쉬웠던 모양이다. 선쟈이의 결혼식이 끝난 후, 선쟈이에게 뽀뽀를 하게 해 달라는 친구들의 성화에 그러려면 자기에게 먼저 뽀뽀를 해야 한다는 그녀의 남편 말에 득달같이 달려가 진한 키스를 퍼붓는 걸 보면 말이다.
오래전 어딘가에 두고 온 개구쟁이 같은 모습으로 연적에게 키스를 퍼붓는 커징턴. 그리고 그런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션자이. 그때 두 사람의 머릿속에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그 시절 두 사람이 서로의 차이를 좁히지 못해 영영 상실해 버린 만약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는 가상의 미래가 말이다.
성숙함의 은유를 이해하지 못해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린 커징턴을 원망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선쟈이. 그 순간 유치한 자존심 따위는 버리고 그녀에게 다가와 어른스럽게 사과하는 커징턴. 그 극적인 순간을 지나 마침내 결혼에 성공한 두 사람.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뜨거운 키스를 나누는 자신들의 모습까지.
이쯤 되면 관객들의 머릿속에도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청춘의 그 시절, 그 순간, 차마 선택하지 못해 영영 상실해 버린 만약이라는 이름을 가진 가상의 미래가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의문도 떠오를 수 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년 소녀는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하지만 그건 의미 없는 생각이다. 어차피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설사 돌아온다 해도 그래서 성숙함과 유치함의 간격을 좁혀 해피엔딩이 찾아온다 해도 그건 그 나름대로 문제점이 있다. 이미 완성돼 버린 이야기는 더 이상 청량하지 않으니까.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사람과의 추억은 행복할지언정 애틋하지는 않으니까. 결국, 그 시절이 아름다운 건 이야기가 완성되지 못하고 거기 멈춰있기 때문이니까.
그래서일까. 놀란 표정으로 커징턴을 쳐다보던 선쟈이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커징턴의 의도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가 남편에게 키스를 퍼붓는 건 질투가 나서도 그녀에게 미련이 있어서도 아니라는 걸.
잠시 후, 키스를 마친 커징턴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선쟈이에게 말한다.
-난 계속 유치하게 살 거다.-
그렇게 커징턴은 미완으로 끝나버린 그 시절의 모습으로 선쟈이의 결혼을 축하해준다.
그 시절, 소녀가 좋아했던 유일한 소년의 모습으로.
***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문득 나에게도 있었을 그 시절이 떠올랐다. 커징턴에게는 선쟈이. 삼촌에게는 제사 때 데리고 왔다는 여자. 카페에서 본 남자에게는 마주 보며 미소를 짓던 여자가 있었듯이 나에게도 있었던 그 시절이 말이다.
그러자 갑자기 무언가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누구에게나 있는 청춘이란 이름의 그 시절이란 적어도 나에겐 아름답지도 풋풋하지도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이 아름다운 건 이야기가 완성되지 못하고 거기 멈춰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멈춰있는 그 시간에 붙잡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절이란 누구에게나 마냥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커징턴과는 달리 지나간 시간에 붙잡혀 사는 나 같은 사람에게 그 시절이란 단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하는 족쇄 같은 것이니까.
신호가 바뀌고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순간 뭔가 내 손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뭐지 하고 쳐다보자 아이가 내내 아껴뒀던 그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놀라 가만히 있자 아이는 동그란 눈을 뜨며 나를 쳐다봤다.
내가... 손잡아 줄까?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아이의 표정에 나는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지금 잡지 않으면 그 작고 조그마한 손이 사라져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두려워 소중한 물건을 쥐듯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