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경쟁력이 필요한 이유
1. 한국 콘텐츠 산업의 현재: 디지털 혁신을 통한 산업 성장의 성과
한국의 콘텐츠 산업은 지난 20년간 산업적 측면에서 상당한 수준의 양적 질적 성장을 이룩해냈다. 세계 7위 규모의 콘텐츠 산업 시장이 형성된 것을 비롯하여, 다양한 장르에서 창의적 결과물을 창출해냈고, 이는 세계 시장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국가의 전략적 투자와 개인 및 기업의 도전적 노력이 결합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기술적 변화와 글로벌 시장 개방이라는 외적 환경 변화에 대해 기존에 축적된 창의적 인재들이 혁신적 시도로 대응해 온 결과였다. 한국은 디지털 전환의 초기에 산업적 우회(detour)의 기회를 얻으며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4차 산업혁명이 콘텐츠 산업에게 ‘오래된 미래’인 것은 이미 우리는 디지털 전환기에 우회적 혁신을 통한 성장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음악 산업과 만화 산업이다.
음악 산업의 경우, 1990년대 음반 산업의 유래 없는 호황을 통해 축적된 역량들이 2000년대 디지털 음원인 mp3가 등장하면서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인터넷 망을 통해 디지털 음원 파일이 무료로 공유되면서, 음반 판매량이 크게 위축되는 등 사업성에 큰 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디지털 전환으로 인한 파괴가 이미 벌어진 상황에서, 국내 음악 산업은 지속적으로 유료 음원 시장 정책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방송 콘텐츠와 공연 등 부가 활동의 비중을 높이고 아이돌 시스템을 정교화하는 전략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로 구축한 체계적인 아이돌 육성 시스템은 이후 전 세계적인 Kpop열풍의 토대가 되었다. 디지털 음원과 뮤직비디오 등 영상의 생산과 공유를 선도적으로 진행한 결과, 유튜브라는 글로벌 플랫폼의 등장과 더불어 전 세계로의 확산과 인기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만화 산업 역시 2000년대 디지털 이미지와 인터넷 문화의 확산 속에서 위기를 맞이했다. 스캔 만화의 공유가 확대되면서 기존의 출판 및 대여점 유통 시스템이 붕괴하기 시작했고, 잡지 시장이 위축되면서 작가들은 작품을 연재할 기회를 잃어갔다. 한편에서는 인터넷 공간에서의 공유 문화를 토대로 웹툰이라는 새로운 만화의 형식이 실험되기 시작했다. 웹툰은 트래픽 확보를 필요로 했던 포털 기업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새로운 만화 산업으로 성장했다. 파괴적 혁신을 거친 만화 산업은 이제 글로벌 시장으로 웹툰 플랫폼이 진출하는 단계로 성장하고 있다.
디지털 전환과 혁신을 미리 경험하며 우회적 성장의 계기를 얻었던 한국 콘텐츠 산업은 이제 한류라는 디지털 문화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홍석경(2013)은 한류를 디지털 플랫폼 확산에 따른 문화 소비의 변화 양상 중 하나로, 다양성을 가치로 삼는 문화적 소비 방식의 확대의 결과로 이해한다. 국경을 넘어서는 콘텐츠를 손쉽게 만날 수 있게 된 환경에서, 각자 나름의 취향에 따라 콘텐츠의 레퍼토리를 구성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고, 한류는 바로 그러한 환경에 최적화된 콘텐츠의 공급과 더불어 전 세계적인 팬덤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회자되는 4차 산업혁명은 기존에 시작된 디지털 전환의 완성이란 점에서, 이미 혁신적 변화를 경험한 한국 콘텐츠 산업에게 기회로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혁신이 관행이 되어 이후의 변화를 제약하는 조건으로 작동한다면, 우리를 오히려 우회를 통한 추격의 대상이 되어 경쟁력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속적인 추격과 선도를 위해 지금의 디지털 혁명이 가져온 기회 요인과 위협 요인을 정확히 진단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기회 요인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여러 변화 중, 우리 콘텐츠 산업에게 가장 중요한 기회 요인을 꼽는 다면 글로벌 시장의 확대가 될 것이다. 국내 콘텐츠 산업은 내수 시장으로는 지속적인 성장을 이어가기에 한계가 있다. 산업의 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방법은, 규모의 경제가 작동할 수 있도록 시장을 넓히는 길이고, 이를 위해선 글로벌 시장으로의 진출을 이어가야만 한다.
1) 디지털 전환에 따른 글로벌 시장 확대
최근의 디지털 혁명에 있어서 전 세계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지난 3차 혁명 시기에 디지털 전환이 미진했던 국가들도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스마트폰과 무선 인터넷 망의 보급이라는 변화를 통해 가능하다. 유선 망 시대에 뒤쳐졌던 국가들이 전략적으로 무선 망의 보급을 앞당기고 있고, 스마트폰의 가격이 점차 내려가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 대부분이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인터넷으로의 접속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동남아시아 시장에 대한 관심은 바로 이러한 변화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 것이다. 개인 스마트폰을 통한 연결이 확대되면서, 이들 디바이스를 통한 콘텐츠 유통의 기회는 확대되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 벌어지는 파괴적 혁신은, 기존에 얻기 어려웠던 시장 진출의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디지털 전환을 통해 형성되는 음악 스트리밍, 웹툰 등 디지털 만화, OTT 서비스를 통한 오리지널 영상 콘텐츠 등 새로운 유통의 기회가 제공되고 있다.
디지털 혁명이 확대되고 글로벌 기업 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콘텐츠 생산국으로서 한국의 전략적 위치 역시 재조명받고 있다. 기존에는 값싸게 질 좋은 콘텐츠를 수급할 수 있는 생산국으로서의 장점이 두드러졌다면, 이제는 아시아 시장에서 수요를 확보할 수 있는 오리지널 콘텐츠 IP로서의 강점이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중국에서의 한류는 글로벌 미디어 기업들이 한국 콘텐츠 산업의 크리에이티브의 강점을 인정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2) 한국 콘텐츠 산업의 글로벌 위상 변화
콘텐츠는 국경을 넘어설 때 ‘문화적 할인(cultural discount)’의 영향을 받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원작 그대로 수출하는 방식 보다, 이를 현지에서 리메이크하거나 포맷을 판매하는 방식의 IP 전략이 점차 확대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권역별 크리에이티브의 리더들이 분명해졌고, 한국은 한류를 통해 그 위상을 확보하고 있음을 증명해왔다. 넷플릭스, 디즈니 등 글로벌 미디어 플랫폼 기업들은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의 창작 능력에 주목하고 있다. 넷플릭스가 아시아 시장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목표로 하는 가운데, 봉준호 감독과 ‘옥자’를 제작하고, 천계영 작가의 ‘기다리면 울리는’ 웹툰 원작의 드라마를 만들며, 유재석이 출연하고 런닝맨 출신의 PD가 만드는 오리지널 예능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2016년에 인기를 끌었던 영화 ‘밀정’과 ‘곡성’이 각각 할리우드 영화 직배사의 제작 투자를 통해 만들어진 작품이란 점도 이러한 변화를 지지한다.
3) 한국 콘텐츠 산업의 글로벌화 가속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 방식에 있어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과거에는 개별 작품 중심의 판매가 중심이었다면, 현재는 플랫폼 자체가 진출하거나, 콘텐츠 IP 단위의 진출이 이루어지고 있다. 콘텐츠 플랫폼이 성공하기 위해선 현지에서의 콘텐츠 수급 없이는 어렵다. 즉 플랫폼 중심의 진출 전략은 현지 콘텐츠 기업들과의 협업은 물론, 현지의 창의성을 높여주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IP 진출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인도네시아에서 인기를 끌었던 #Baby Shark Challenge 태그의 경우, 국내 기업인 핑크퐁의 ‘상어 가족’ 율동에 맞춘 개인 영상이 바이럴 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이 경우, 핑크퐁 IP는 분명 우리나라의 것이지만, 그것을 전유하며 문화적 현상을 만들어낸 것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이기에, ‘Baby Shark’은 그들의 문화 코드 중 하나가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IP는 현지 팬덤의 사랑 없이는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즉, 그들의 문화가 될 때, IP는 비로소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현지 팬덤과의 관계 형성을 비롯한 적극적인 현지화 전략이 필요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상의 변화는 한국 기업이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시장의 규모를 확대하여 지속 가능한 성장의 계기를 만들어 준다. 이런 점에서 4차 산업혁명은 한국 콘텐츠 산업에게 기회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3. 위협 요인
1) 후발국의 추격 및 경쟁 심화
위협 요인 역시 존재한다. 한국이 3차 산업혁명 당시 형성된 ‘레거시’로 인해 혁신이 지연된 사이에 이를 우회하며 성장한 경쟁자가 등장하는 것도 중요한 위협 요인 중 하나다. 중국은 현재 한국이 직면한 가장 강력한 경쟁자이다. 한한령은 비록 사드 배치라는 정치적 국면을 통해 돌출된 사건이지만, 이미 예견되어 있던 중국의 산업적 목표의 조치를 포함하고 있다. 중국은 이제 한국의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콘텐츠 산업에서 경쟁력과 역량을 축적했다. 한한령은 중국이 더 이상 시장이 아닌 경쟁자임을 명백히 알려주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중국은 목표 시장에 있어서도 우리와 중첩된다. 우리가 주목하는 동남아시아 시장에 대한 관심은 중국 기업들에게도 높다. 동남아시아 시장을 두고 한국과 중국이 점차 경쟁 국면에 돌입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때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중국과의 경쟁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의 우위가 우리에게 얼마나 남아 있느냐일 것이다. 국내 콘텐츠 산업의 경쟁력과 역량을 지속적으로 추적하며 조사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책적 방향 설정 및 개입을 위해 기본적인 현실 진단이 필요한 것이다.
2) 혁신기반 위축: 혁신성 약화 및 생태계 활력 감소
혁신 기반과 성장 동력의 측면에서 한국 콘텐츠 산업에 대한 우려는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먼저 혁신 기반의 측면에서 보면, 국내 산업이 혁신성을 잃고 손쉬운 비즈니스 모델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최근 국정감사를 통해 논쟁이 된 게임 산업에서의 확률형 아이템이 대표적이다. 확률형 아이템을 ‘도박’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를 떠나서, 게임의 본질적 가치인 재미를 높이기보다, 확률형 아이템을 통해 과금을 높여서 손쉽게 이익을 보려는 관성이 게임 업계 전반에 확산되어 있다는 것이 보다 심각한 문제이다. 중국 게임인 ‘소녀 전선’의 폭발적인 인기는 이러한 우려가 실제 경쟁력 약화로 이어졌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사건이다.
산업 생태계의 활력 역시 약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존재한다. 혁신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장르들에서는 관성적으로 정부의 지원 사업 자체에 주목하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다. 보조금 중심의 생존 전략이 확대되면, 산업으로서의 역동성을 상실하게 된다. 성장성을 잃어버린 산업이 정부의 보조금에 의존하는 지대추구적 행위를 반복하게 될 때, 콘텐츠 산업 정책의 정당성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
3) 성장동력 약화: 불공정 산업 생태계 및 열악한 노동 환경
불공정한 산업 생태계와 열악한 노동 환경은 콘텐츠 산업의 성장 동력을 약화시키는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받고 있다. 대기업과 플랫폼 중심의 성장이 지속되면서, 이들의 생태계 내에서의 권력 역시 강화되고 있다. 중소기업의 협상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으며, 수익의 비중 역시 권력을 가진 대기업과 플랫폼 기업에게 더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권력의 집중과 불공정한 생태계 고착은 종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심각한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다양성은 창의성이 발현되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다. 다양성의 위축은 결국 획일적인 콘텐츠를 양산하게 될 것이며, 이들이 경쟁력을 잃게 되는 순간 산업 전반에 심각한 타격을 가져올 위험이 있는 것이다.
열악한 노동 환경 역시 성장의 지속이란 측면에서 중대한 위협이다. 가혹한 근로 조건 및 환경은 인재를 끌어들이기에 매우 부적합한 것이다. 한국 콘텐츠 산업의 성장을 이끈 것은 다름 아닌 혁신적 인재의 활발한 유입과 활동이었다. 이러한 인재 유입이 축소된디면, 한국 콘텐츠 산업의 성장 동력은 심각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4. 나가며: 다시, 경쟁력이다
한국 콘텐츠 산업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글로벌 규모의 거대한 전환을 맞이하며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정책적 개입은 시장의 자생적 움직임 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시장 실패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다. 현재 한국의 콘텐츠 산업은 혁신성 약화와 성징 기반 훼손이란 위기에 직면하고 있으며, 기회 요인을 활용하기 위한 도전과 혁신을 위한 역량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