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 중심의 생각을 넘어 활용과 육성의 관점이 필요하다
뜨거운 영유아 콘텐츠 산업의 열기
‘엔젤산업’으로 불리는 영유아 콘텐츠 산업의 열기가 뜨겁다. 출산율은 낮아진 반면, 아이에게 투자하는 비용은 늘어나고 있다. 전체 지출 중 교육비 비중을 지칭하는 엔젤계수는 2009년 정점을 찍은 후 다소 둔화되고 있지만, 전체 교육비 지출 규모 자체는 여전히 늘어나는 추세다. 출생아 수가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유아용품 시장 규모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부모와 양가 조부모에 더해 사촌까지 합세하는 ‘에잇 포켓’이란 신조어가 유행할 정도로 아이에 대한 지출 규모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엔젤산업이 성장한다는 소식에 발 빠르게 움직이는 기업들도 있다. 학령인구 감소로 골머리를 앓던 교육 전문기업들이 영유아 교육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고 나선 것이다. 공급은 늘어나고 경쟁은 심화되면서 영유아 교육 시장은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영유아 교육 콘텐츠가 총집결하는 ‘영유아 교육전’은 교육 정보를 얻고 저렴한 가격에 교구를 구매하거나 가입하려는 부모들로 붐빈다.
비단 교육산업만의 일은 아니다. ‘키즈 콘텐츠’는 콘텐츠 산업의 핵심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의 캐릭터, 애니메이션 산업은 2007년을 기점으로 창작 업 중심으로의 전환을 이룬 뒤 영유아 시장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해왔다. ‘뽀통령’(뽀로로)의 독주 시대를 지나 ‘타요’, ‘폴리’에 이어 ‘핑크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캐릭터들이 아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러한 관심은 실제 '수익'으로도 이어진다. IPTV 시청자의 주문형 비디오(VOD) 이용에서 키즈 애니메이션 분야는 TV 다시 보기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키즈 콘텐츠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지면서, 미디어 사업자들은 키즈 콘텐츠 방영권 확보를 위한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특히 SK브로드밴드는 IPTV 독점 방영권 확보를 위한 애니메이션 제작 투자를 2002년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오고 있다. KT와 LG U+도 디즈니, 드림웍스 등 해외 콘텐츠 기업과의 계약을 통해 키즈 콘텐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영유아 콘텐츠 산업에서 나타나는 혁신들
이러한 키즈 콘텐츠에 대한 높은 관심과 실질적인 소비 증가는 산업 혁신의 중요한 토대가 되어 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경쟁이 심화되면서, 전반적인 콘텐츠의 질도 상승하고 있다. 산업 간 경계도 점차 얕아지고 있다. 유튜브에서 출발한 캐리와 장난감 친구들은 지상파와 뮤지컬 등 무대를 넓히고 있고, 캐릭터 브랜드를 토대로 교육 상품 시장으로 점차 진출하고 있다. 폴리로 유명함 로이비주얼은 도서 사업을 시작하고 있고, 앱에서 출발한 '핑크퐁'의 스마트스터디도 최근 도서 등 오프라인 상품의 비중을 높여가고 있다. 재능교육 등 기존 교육 기업들과 전통적인 영유아 교육 기업, 그리고 캐릭터 애니메이션에서 출발한 기업들이 모두 영유아 대상 콘텐츠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IT분야에서도 엔젤산업은 중요한 키워드다. 키즈 태블릿과 키즈폰이 대표적인 사례다. 아이들의 인기 방송인 "보니하니"에서 진행하는 경품 시간이 돌아오면 "키즈폰"을 갖고 싶다는 아이들의 사연이 줄을 잇는다. 손목이나 목걸이로 키즈폰을 갖고 다니는 아이들을 보는 건 이미 어려운 일이 아니다. 키즈 전용 IT상품의 출시도 이어지고 있다. 웅진 북클럽은 태블릿을 기반으로 한 전자책 대여 서비스다. ‘핑크퐁’ 브랜드를 가진 스마트스터디는 ‘핑크퐁 빔’이라는 스마트 빔프로젝터를 얼마 전 출시했다. 스마트빔의 경우 오프라인 경험이라 할 수 있는 그림자놀이와 디지털 콘텐츠가 결합된 융복합 콘텐츠이다. 아날로그 감성과 디지털 콘텐츠의 편리함이 더해져서 상호작용의 깊이를 더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 미디어 경험에 매이지 않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를 공략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교육 콘텐츠의 1차 수요자라 할 수 있는 부모 세대가 디지털 경험에 대한 거부감이 낮아진 것도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디지털 경험에서 출발한 교육 혁신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 더 많이 어필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유아 콘텐츠 시장은 신기술 들의 경연장을 보듯 다양한 제품들이 가득하다. AR그림책, 스마트 교구, 코딩을 통해 움직이는 로봇 교구 등 융복합 콘텐츠의 실험장과 같다.
보호 중심의 시각만으론 어려운 이유
이러한 영유아 콘텐츠 시장의 성장과 혁신은 우리에게 이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키즈 콘텐츠에 대한 접근은 디지털 중독에 대한 보호의 관점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 혁신은 키즈 콘텐츠에서 디지털-아날로그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상호작용을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키즈 콘텐츠에 대한 우려도 많이 있지만, 보호 중심의 시각만으로는 현재의 다양한 혁신과 시도들을 담아내기 어렵다.
콘텐츠의 수용은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다양한 상징들을 습득하고, 이를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내며 활용하는 적극적인 창조의 과정이다. 물론 성장기의 어린이들의 상징 활용이 충분할 수는 없고, 미성숙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여기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할 것인가이다. 교육의 본질을 놀이와 연결시키는 시각이 필요하다. 콘텐츠는 놀이의 매개이고, 개별적인 소비가 전부가 아니다.
뽀로로 GO는 교육용이어서 다르다, 라는 광고 문구는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지만, 실제 구매력이 존재하는 시장 영역에 대한 현실을 분명히 드러낸다. 교육용과 비교육용 콘텐츠가 구분되는 시장, 교육은 허락되고 비교육은 배제되는 시장이 키즈 콘텐츠의 영역이다. 그러나 오늘날 창의력은 순수한 '교육'을 통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중문화에 대한 오랜 비하와 우려, 순수한 즐거움에 대한 오해가 쌓여서 만들어진 이분법적인 틀이 키즈 콘텐츠에서도 작동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콘텐츠를 통한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있다
아이들은 콘텐츠를 통해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있다. 좋은 콘텐츠는 단순히 즐거움만이 아니라 문화적 자본을 습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키즈 콘텐츠 산업이 성장하는 듯 보이지만, 출판 산업 등 기존 매체 영역의 불황으로 인해 우수한 콘텐츠 창작자들이 시장에서 밀려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해 매체 중심의 접근이 아닌 키즈 콘텐츠 산업이란 포괄적 접근을 통해서 해당 생태계의 활력을 회복시키고 문화적 다양성을 보존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의 키즈 콘텐츠는 디지털 혁신이 가져온 국가 경계의 약화를 기회로 삼아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앱스토어와 유튜브라는 글로벌 콘텐츠 플랫폼은 한국의 콘텐츠 기업에게 중요한 기회로 작용했다. 상대적으로 문화적 할인의 영향이 낮은 키즈 콘텐츠는 영토 단위가 아닌 언어 단위로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글로벌 명품 키즈 콘텐츠가 탄생하고 있고, 계속해서 탄생할 토양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이를 이어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인재가 늘어나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키즈 콘텐츠 산업에 필요한 인재는 소프트웨어를 다룰 수 있는 인재들이다. 디지털에 익숙한 인재들이 다양한 콘텐츠 산업, 특히 키즈 콘텐츠 영역으로도 들어와서 혁신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또한 기존 매체 전문가들의 디지털 적응력을 높일 수 있는 재교육의 기회도 마련되어야 한다.
키즈 콘텐츠의 효과와 영향력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다. 뉴미디어 혐오적인 담론의 재생산이 아닌, 실질적인 콘텐츠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엄밀한 분석들도 요구된다. 콘텐츠가 나쁜 게 아니라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이 나쁜 경우가 많은 현실을 직시하고, 부모를 위한 콘텐츠 활용 교육도 병행되어야 한다.
한편에서는 완구와 결합된 소비 지상적 콘텐츠로 획일화되는 현상에 대한 우려도 있다. 일본의 제작 위원회 방식과 유사한 OSMU 모델은 현재 키즈 콘텐츠 분야에 가장 유력한 비즈니스 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 인지도 확보에서 여전히 애니메이션의 영향력이 크고, 지상파 방영권 판매로는 제작비를 충당할 수 없는 산업 구조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완구 업체들이 스스로 오리지널 IP를 만들어가려고 하는 시도도 이런 변화를 부추기고 있다. 이렇게 완성된 콘텐츠들이 질이 낮거나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획일성의 문제다. 콘텐츠가 완구 판매에 얽메이다보면, 자칫 콘텐츠의 방향성에 편향과 편중이 생겨날 수 있다. 이러한 편중을 보완할 수 있는 정책적 개입이 필요한 지점이다.
규제에 대한 우려도 존재한다. 사교육비의 지나친 상승이나 과도한 콘텐츠 몰입 등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국가 정책의 개입은 자칫 성장하는 산업에 대한 발목 잡기가 될 수 있다는 불신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캐릭터와 애니메이션 등 산업 육성 정책을 통해 뽀로로를 비롯한 영유아 캐릭터 산업의 성장에 기여한 바 있다. 그러나 영유아 콘텐츠의 수준이 높아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과거와 같은 "우수 콘텐츠 집중 육성" 방식의 지원 정책이 자칫 시장을 교란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기 시작했다. 소수의 스타 콘텐츠를 육성하는 시기를 지나 저변을 확대하고 지속적 혁신의 토대를 만들어가는 방향으로의 정책 요구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보호를 넘어, 활용과 육성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젤산업을 문화산업의 일부로 보고 적극적인 육성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영유아 시절은 문화적 정체성 형성의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선진국들에서 자국의 영유아 콘텐츠 분야를 지켜내려는 노력들이 계속되는 건 이러한 이유에서다. 물론 글로벌 시대에 요구되는 문화적 정체성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도 존재한다. 그것이 과도한 민족주의에 경도된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는 지적도 유효하다. 지금 필요한 건, 더 깊은 연구와 사려 깊은 정책일 것이다. 영유아 콘텐츠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국가는 미래세대인 아이들에게 어떤 (매개된) 경험들을 공급하고 싶은 것인가? 시장에 맡겨두었을 때 생길 수 있는 시장 실패는 무엇일까? 비영리적 콘텐츠에 대한 지원은 지금과 같은 미디어 혁신 시기에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가? 무엇이 영유아 콘텐츠 생태계에 균형을 가져올 수 있을까? 섣부른 규제보다는 영유아 콘텐츠 활용과 저변 확대, 콘텐츠 향유 격차 해소, 산업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