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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하 Dec 12. 2023

9화 _ 합숙

"출발합니다. 모두 안전띠 메 주세요." 선배의 말에 버스가 부산스러워진다. 이제 합숙 장소로 들어가면 한 달은 못 나오니 바깥세상을 찐하게 바라보는 동기들과 수현이었다. 취업한 이후 수현은, 그룹 합숙, 계열사 합숙에 이어 신입사원 수련회 준비를 위한 멤버로 뽑혀 마지막 합숙에 참여 중이었다. 대기업이란 타이틀만 아니었으면 회사 일은 하지도 않고 전국 여기저기로 합숙만 시키는 모습이 영락없는 다단계 회사처럼 보이는 것도 억지가 아니었다. 합숙 4개월 차 수현이 입사 이래 제일 많이 한 일은 캐리어 짐 푸르기와 꾸리기였다. 어쨌든 신입사원의 특혜라고 하는 합숙도 이제 한 달 남았다.

버스에 탄 동기들과는 합숙 2개월 차로 워낙 규제가 심한 곳에 있다 보니 함께 한 시간보다 더 친해지고 있다. 공연 준비를 위해 오전은 체력단련, 오후는 아이디어 회의 및 춤, 저녁 이후는 단체 연습에 하루 4~5시간 자는 고강도 훈련이 이어진다. 대학원 생활 내내 엉덩이 힘만 키우다가 엉덩이는 붙이지도 못하는 상황에 적응하려니 체력적으로 힘들지만 재미있는 수현이었다.

"이야, 이거 너무 한 거 아니냐? 간식도 없어, 과자도 없어. 체력 올리라고 단백질만 먹고 계속 운동해. 우리가 회사에 입사한 건지 운동선수가 된 건지 모르겠어."

"난 제발 원 없이 자고 싶어.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온몸이 아파서

한 번에 일어날 수가 없을 정도야. 대회 끝나면 잠만 잘 꺼야. 수현, 너는?"

"나도.. 아침마다 온몸이 아파. 그런데 좋기도 해."

"뭐??"

"좋잖아. 이렇게 원 없이 아이디어 내고, 즉각 반영되고, 운동하고, 아이 몰라. 그냥 함께하는 이 시간이 좋아. 이제 곧 끝날 거잖아. 끝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

"그렇지, 이제 일주일 남았네. 공연 끝나면 우리 진짜 회사 생활 시작이야. 으악. 그거보단 이게 좋지 좋아"

"너네, 여기 있을 때 즐겨라. 현업 가면 얄쨟없다. 카르페디엠 캬"

"오, 선배님 정말 느끼해요."

지나가는 인사과 선배의 충고에 다들 몸서리치며 한 바탕 웃음소리가 들린다. 수현과 동기들은 한참을 웃고 나서 다시 아이디어 회의를 시작했다. 수현은 동기들과 함께 에너지를 모으며 시너지를 내는 지금의 순간들이 즐거웠다. 이 순간 속에 있지만 흘러가는 시간을 잡을 수 없어 아쉬운 마음도 컸다. 선배 말이 맞다. 카르페디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 수현에게 지금까지 이런 순간이 있었나?


연구원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막상 시작한 공부와 연구는 수현 체질이 아니었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좋고 배움이 좋아서 더 공부를 할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남들 때문에 시작하는 일은 어리석은 것임을 깨달았다. 더욱이 끝마무리도 제대로 못했다. 탄탄대로라고 생각했던 인생이 곤두박질쳐 어두 컴컴한 지하에 갇혀버렸다. 수현은 선택을 했다. 서한대의 옷을 벗고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학위를 포기하고 회사에 입사를 했다. 남들보다 4년 늦은 출발이었다. 신입사원 중 나이도 많은 부류에 속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왜 이제 입사했어요?"

"대학 졸업하고 지금까지 뭐 했어요?"

누구보다 치열하게 달려온 시간들을 버리고 나니 쓸데없이 허송세월한 늦깎이 신입사원이 되었지만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수현에게 터널 밖의 세상은 끝없는 푸른 바다였다. 물이 없어 절박하게 팔딱대던 물고기는 넓은 바다로 던져져 원 없이 헤엄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터널 밖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기뻤다. 에너지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주어진 시간들이 감사했다.


적어도 합숙 기간의 회사는 수현에게 푸른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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