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프로레슬링의 위상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한마디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핫한 종목이었다.
당시 최고의 스타는 박치기를 전매특허로 하는 김일이었는데,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와 함께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역도산의 제자였다고 한다.
김일을 정점으로 약간은 답답했지만 당수의 명수였던 천규덕, 몸동작이 빨랐던 여건부나 박송남 등 숱한 레슬링선수들이 아이들에게는 우상과 같았다.
그래서인지 모든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우리 어머니까지도 프로레슬링을 좋아하셨다.
어쩌면 당시의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참 맞고 지쳐있던 주인공이 마침내 승리하는 프로레슬링의 권선징악이라는 스토리- 그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프로레슬링의 대부분의 레퍼토리는 약속된 것으로 권선징악을 표방하는 것 같다. -가 희망을 준 것처럼 어머니에게도 그랬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매번 위기를 당하고서도 박치기 한방에 화끈하게 역전하는 김일의 모습은 영웅적이었다, 가끔은 이마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짜 피였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붕대를 감고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줬기에 김일 선수에 대한 믿음은 대단했다.
당시 레슬링의 대단한 인기를 이용한 마케팅은 대단했고, 다른 종목에도 영향을 줬다. 지금 유행하는 이종격투기처럼 당시 프로복싱 최고의 스타였던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라는 말을 남겼던 최고의 테크니션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알리와 일본 프로레슬링을 대표하는 안토니오 이노키의 대결을 했던 적도 있다, 물론 경기 내내 링바닥에 누워서 알리의 주먹을 피하기만 했던 이노키 때문에 경기는 지루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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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3, 4학년쯤 된 어느 날이다.
집에 놀러 온 큰 외삼촌은 레슬링 선수를 영웅처럼 생각하던 어린 나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TV의 레슬링을 가슴을 졸이며 보고 있던 어머니에게 삼촌이 한마디를 던졌다.
“아따! 누님, 레슬링은 쇼여”
화면에는 피를 흘리는 선수도 있다며, 엄마는 삼촌의 말에 반문했고, 평소 허풍이 심한 외삼촌인지라 나도 삼촌의 말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삼촌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날 동네 벽에 붙은 광고를 본 아이들로부터 학교 근처에 있던 19번 버스의 종점에서 프로레슬링 시합이 열릴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8시쯤이었나 여하간 밤늦은 시간이라 부모님이 허락할 리 만무했다. 하지만 당시 최고 스포츠인 프로레슬링을 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렇게 늦도록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혼날 것을 알면서도 학교가 끝나고 난 후 집에도 가지 않은 채 버티다 레슬링 경기가 열리는 곳으로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의 호기심은 매를 맞는 것보다는 궁금한 것을 해소하는 쪽을 택했던 것 같다.
경기를 위해서 버스종점엔 가설무대가 만들어졌고, 경기를 보기 위해서 천막에 들어가기 위해선 입장료가 필요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장막이 열렸고, 나처럼 주변에서 서성대던 아이들도 경기를 보기 위해서 몰렸다.
우리가 아는 최고의 선수였던 김일은 빠졌지만 여건부와 박송남 등 꽤나 유명한 선수들도 있었기에 우리들은 모두 기대에 차 있었다.
하지만 화면이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레슬링을 보던 나는 이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연습이 부족했는지 드롭킥이 몸에 닿기도 전에 쓰러졌고, 손을 맞지 않은 부분을 부여잡는 등 한 눈에도 짜인 각본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여건부 특유의 빠른 머리 때리기 전혀 힘조차 실려 있지도 않아 보였다. 한 마디로 내가 그 날 봤던 프로레슬링은 어린 나에게 엄청난 실망과 충격을 선사했다.
밤 10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간 나는 늦은 이유를 밝히지 않아 매를 더 많이 맞았지만 매를 맞는 상처의 아픔보다 평소 허풍쟁이였던 삼촌의 말처럼 레슬링이 쇼였다는 사실에 더 많은 상처를 받았다.
정말 그 사건 이후 나의 레슬링에 대한 관심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레슬링의 인기는 점점 사라졌는데, 카메라의 발달과 컬러 TV의 보급으로 인해 짜인 각본이라는 사실이 쉽게 드러난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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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프로레슬링이 쇼라는 말을 믿지 않은 채, 요즘은 왜 방송에서 레슬링을 하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요즘 새로운 볼거리가 생겨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우연히 WWE 등 미국 프로레슬링을 하는 방송채널을 찾았기 때문이다.
말을 알아듣지는 못 하면서도 열중해서 보고 있는 어머니를 보면 나는 장난스럽게 예전 삼촌이 한 말을 툭 던진다.
“엄마, 그렇게 가슴 졸일 필요가 없어요, 레슬링 쏘라고요”
90이 넘으신 어머니에게 기쁨을 주는 방송이 있어서 기쁘다.
그래서 가끔은 인터넷으로 그 방송사의 편성표를 확인해서 프로레슬링이 할 시간을 알게 되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 오늘 저녁 9시 OO번 채널에서 레슬링한대요”, 그럴 때마다 프로레슬링을 제일 좋아하며 여전히 진짜라고 믿고 있는 엄마는 반색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