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생대회에서 생긴 일

by 별사탕아빠

내가 처음으로 경복궁에 간 것은 중학생 때였다.


사생대회라는 이름으로 2학년 전체가 경복궁엘 간 것이었는데, 맑고 화창한 날씨여서인지 궁 안에는 우리 학교 외에도 여러 학교에서 온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은 바위 같은데 스케치북을 펴놓고 경회루 등의 피사체를 응시하며 붓질을 하고 있었고, 가끔 화가처럼 멋진 이젤을 사용하는 학생들도 보였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그림보다는 난생처음 구경하게 된 경복궁과 고궁에 구경을 온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일차로 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와서 한량처럼 돌아다니던 나의 눈에 띈 것은 미군 병사들이었다. 원래 경복궁엔 외국인이 많았는지, 그날 유난히 많았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는 외국인을 보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고 신기한 것이었다.


갑자기 외국인들에게 중학교에 입학해서 1년 정도 배운 나의 영어가 통할 것인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지금과 달리 그때는 중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영어를 배우는 데다 외국인을 만나는 것 자체가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기에 다른 학생들도 나와 비슷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호기심이 발동하자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지나가는 외국인 병사에게 불쑥 영어로 말을 건넸다.


“캔 유 스피이크 잉글리시?”


난데없는 꼬맹이의 당돌한 질문이었음에도 병사는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말을 했다.


“솰라 솰라 @@, rels?? ??? ??멀??? ”


문제는 그 병사가 하는 말을 내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난 그 친절한 병사의 설명을 듣다가 웃으면서 다시 한 마디를 뱉어냈다.


“쏘리 밧 아이 캔 낫 스피이크 투 잉글리시” ^^;;;;


사실 나의 행동은 무모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무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음에도 병사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기에 나의 당돌한 행동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다.


♧♣


하지만 나와는 다르게 그날 경복궁에 왔던 다른 학생에게는 그날의 사건이 추억이 아닌 뼈아픈 기억으로 남았을 것 같다.


주한미군 병사에게 했던 나의 행동이 벌어지고 몇 분 지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내가 있던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중학생 교복을 입고 있던 학생하나가 덩치가 어마하게 큰 흑인 병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니그로”라는 큰 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지금이야 외국인을 만날 기회도 많아서 사용하지 않아야 하는 단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1980년대에 초반만 해도 그런 에티켓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더구나 당시 TV에서 ‘뿌리’라는 외국드라마가 방영된 직후였는데, 쿤타킨테라는 흑인 노예의 일대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미국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을 니그로라고 불렀기에 당시에 아이들은 그 단어에 포함된 비하적인 뉘앙스를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는 눈치조차 없어서 흑인병사를 화나게 하면 혹독한 대가를 뒤따를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조차 알 턱이 없었다.


정말 순식간이었던 것 같다. 흑인병사의 손이 올라가는가 싶더니 눈치 없이 행동하던 아이는 멀리 나가떨어져 버렸다.


♧♣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나의 무모한 행동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했던 것 같다.


다행히 그날 아무 일도 없었기에 경복궁을 생각할 때마다 처음 외국인에게 말을 걸었던 중학생 시절의 기분 좋은 추억이 함께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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