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미술이라도 배워볼래?

by 별사탕아빠

“응~제발, 하나 정도는 다녀보는 게 어때~?”


“엄마는~ 내가 싫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_<*”


울상에 가까운 찌푸린 얼굴을 한 아이는 답변에는 아내에 대한 짜증도 약간 섞인 듯했다.


아내가 퇴근한 후 시작된 이런 실랑이는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도 계속되고 있었는데, 조용해야 할 저녁의 평화를 깨뜨리는 사달이 발생한 이유는 학교에서 보내온 안내문자 때문이었다.


문자의 내용은 방학 중에 편성될 방과 후 학습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었고, 평소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시키고 싶었던 아내는 내용을 보자마자 더 안 날이 났고,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채근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노는 것에 빠진 우리 아이는 엄마의 마음도 모른 채 아내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갑자기 아내는 설득의 대상을 바꿨다.


“이거 당신 책임이니까 당신이 알아서 타일러 봐~”


주변 친구들까지 영어나 수학, 논술을 배우기 위해서 학원에 다니고 있을 정도로 사교육이 만연한 세상에 아이가 학원에 가지 않은 것은 어린 시절부터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나의 고집 때문이었으니 아내에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아내는 그동안도 수시로 피아노나, 미술 아니면 컴퓨터를 배울 수 있는 방과 후 학습을 신청하자고 아이를 꼬드겼음에도 아이는 눈도 끔뻑하지 않았고, 친한 친구들이 다니는 축구교실이나 좋아하는 야구를 배우게 해 주겠다는 제안에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본인이 의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도리어 아이의 역성을 들었으니 아내의 화살이 내게로 향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결국 아내의 재촉에 잠시 생각을 하고 나서 조용히 아이의 의향을 다시 물었다.


“너 유치원 다닐 때는 그림 그리는 거 굉장히 좋아했잖아~!, 엄마 말대로 미술이라도 배워 보는 건 어때~?”


하지만 이런 나의 회유책에도 학원에 가지 않겠다는 아이의 의사는 확고했다.


문득 아이가 나를 닮았으면 미술학원에 갈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의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정말로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당장 성적에서 티가 났는데, 필기로만 평가를 할 때는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실기가 포함될라치면 성적은 뚝 떨어져 보란 듯이 ‘미’가 자리를 차지하기 일쑤였으니 미술은 초등학교 내내 나를 괴롭힌 과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나이 아이들에게는 너무도 흔한 예쁜 선생님 때문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느낀 가장 크게 차이점은 선생님이 많다는 것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모든 과목을 가르치는 초등학교와 다르게 과목마다 선생님이 바뀌었는데, 미술선생님은 학교에서 가장 미인으로 소문나 있었다.


첫 미술시간 우리에게 데생을 시키고 교실을 돌아보시던 선생님의 한마디가 미술시간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여~어, OO는 열심히 그림을 잘 그리는구나~”


미모와 다르게 굵직한 선생님의 그림에 대한 칭찬은 그때까지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이후 나는 미술시간이 즐거워졌다. 그리고 그림과 관련된 글이나 책을 읽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하지만 데생이 끝나고 수채화를 배우면서 나의 얄팍한 그림실력은 금세 바닥을 드러내버렸는데, 밑그림 작업이 끝난 후 채색하는 과정이 문제였다.


형의 책상에 놓여있던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읽었던 기사와 해돋이라는 작품의 강렬한 인상 때문에 당시 모네라는 작가의 그림에 빠져있던 나는 그런 식으로 색을 칠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림실력도 그렇지만 기본적인 자질조차 없었는데, 거기에 성급한 성격이 결과적으로 기름을 부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반적으로 수채화는 한 가지 색을 칠한 후 마른 다음에 칠을 해야 물감이 섞이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그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몰랐던 나는 한 번 붓질이 끝나면 수건에 붓을 쓱 닦은 후 곧바로 다른 색을 칠했다.


하지만 색의 차이를 강렬히 내고 싶다는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두 색은 도화지에 남은 물길을 통해 섞여버렸고, 원하는 색을 내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는 덧칠에 덧칠을 계속 더해갔다.


도화지에 있는 여러 가지 색은 계속 번지기 시작했고, 나의 계속되는 덧칠의 결과 버티지 못한 도화지는 구멍이 나버렸다.



더군다나 울고 싶은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니 그렇게 잘 보이고 싶었던 미술선생님이 서 계셨다. 구멍 난 도화지를 손에 들고 울상을 짓고 있는 나를 보면서도 선생님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행복한 미술시간은 길지 않았다.


겨울방학이 다가올 무렵 선생님은 결혼을 했고, 동시에 교편을 놓는 선택을 했다는 선택이 나는 못내 아쉬웠다.



♣ ♣ ♣



아내와 나는 결국 학원에 가지 않겠다는 아이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아이는 느긋한 성격을 가진 데다 손재주가 좋은 것을 보면 아내를 닮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림이라도 좋고, 운동이라도 좋고, 공부든 뭐든 좋으니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찾아내길 바라고, 또 자신이 찾아낸 것을 선택함에 주저하지 않고, 열심히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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