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해서 일하기 위해 준비 중인 나를 보고 동료직원이 말을 건넸다.
“오늘이 대보름이래요.”
뜬금없는 직원의 말에 나도 모르게 책상에 놓여 있는 탁상용 달력으로 눈이 갔다.
그런데 달력을 보고 있는 내가 떠올린 것은 정월대보름이라는 음력절기가 아니었다. 달력에 나타난 숫자 3을 보면서 내가 떠올린 것은 삼겹살데이였고,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오늘이 삼겹살 데이였구나 ~?’
이런 내 행동을 보고 있던 직원과 눈이 마주치자 계면쩍어진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
사실 90년대부터 상품을 팔기 위한 기업의 마케팅 노력의 결과 밸런타인데이를 시작으로 많은 기념일이 생겼다.
삼겹살 데이도 그중에 하나였는데, 기념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내가 정월대보름보다 먼저 삼겹살 데이를 떠올리게 된 것은 20년도 지난 한 친구와의 사건 때문이었다.
♣ ♣ ♣
그 친구와 친해진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고 진학한 대학도 달랐다. 게다가 학력고사 때 사건이 있었던 내가 재수를 하는 바람에 학번마저도 달랐지만 주변에서는 그 친구와 나를 단짝이라고 불렀다.
사실 그 친구는 언뜻 보기엔 까칠해 보였는데 아마도 남다른 승부욕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반대로 고교시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은 것도 승부욕의 영향 때문이었으니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와 가까워진 가장 큰 원인이 머리를 써서 승부를 내는 그런 종류의 게임을 좋아하는 성향이 닮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3학년이 되자 학교에서는 처음으로 야간 자율학습이라는 제도를 시행했는데, 그 시간은 놀기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딴짓을 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렇게 수험생으로서의 시간을 보낸 뒤 대학생이 된 친구와 달리 나는 재수를 선택했다.
…
학력고사를 앞두고 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일 년 동안의 대학생활을 하면서 술을 마시는 즐거움에 푹 빠졌던 친구는 나와 같이 술을 마시기 위해 학력고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말을 던졌다.
하지만 술 마시는 것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던 나는 친구에게 툴툴거렸다.
“난 술 별로야, 쓰기만 하고~”
그러자 그 친구는 나에게 술이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
학력고사가 끝났을 때, 수험장 앞에서 기다리던 친구는 나를 신림동으로 데리고 갔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동기들 몇 명이 합류하자 단골인 듯 술집으로 향했다.
녀석이 시킨 것은 패 OO트라는 양주였다.
다른 고등학교 동기들은 그 친구의 행동에 환호를 했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쓰기만 했다.
“야 이게 뭐가 맛있냐? ㅠ.ㅠ , 쓰기만 하잖아?”
그날 그 친구는 나에게 재수하느라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두주불사를 외쳐대다 뻗어버렸다.
…
술을 좋아하는 친구와 달리 조금만 마셔도 속이 뒤집어져버리는 나에게 술은 곤혹스러움을 주는 대상이었다.
그 친구는 술자리에서는 누구와도 잘 어울렸다.
그러다 보니 학교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불쑥 우리 학교에 찾아와 내가 속한 동아리 후배들과의 술자리에도 스스럼없이 합석했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나는 그 친구와 만날 때는 자연스레 따로 술을 마셔줄 사람을 동석하는 경우가 늘어났고, 나와 친한 한 후배는 어쩌면 나보다 더 많은 양의 술을 그 친구와 마셨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 ♣
2000년대 초반의 어느 날이었다.
사무실에 있는 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저녁 뭐 하냐?~”
“별 약속은 없어~”
그러자 녀석은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는 말과 함께 같이 나올 사람이 있는지를 물었다. 모르겠다는 나의 대답에도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는 말을 건넸다.
“그러든지~ 근데 어디서?....... 알았다.”
그렇게 무심하게 우리는 약속을 잡았다.
…
“띠~리~리~링~”
퇴근할 무렵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약속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있던 차였는데,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기에 나는 지레짐작으로 툴툴대며 수화기 너머 상대방에게 말을 했다.
“걱정 마라, 곧 나갈 테니 늦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나의 짐작이 틀렸는지, 그 친구는 나의 말을 자르더니 함께 만나기로 한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자고 했다.
술을 마시고 지하철을 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순순히 그러자고 대답하면서도 갑자기 상황이 바뀐 이유가 궁금했던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알았다. 근데 왜?”
친구의 대답은 너무도 명확했다.
“사람들이 오늘이 삼겹살 데래”
“삼겹살 데이? 그래서?~”
“너는 술을 잘 못 마시잖아, 오늘 같은 날은 술을 듬뿍 마셔줘야 해”
삼겹살 옆에는 반드시 소주가 지켜야 하는데, 혼자서 술을 먹기는 싫다는 설명이었다.
“.........”
녀석의 이유가 너무도 분명했기에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그 친구로 인해 삼겹살 데이는 다른 어떤 기념일보다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