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에서 살아남기 #15, 스톡홀름 여행기 #4(완)
실패는 부끄럽고 창피하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상투적인 격언이 있지만, 상투적인 만큼 지키기 어렵다. 실패를 두 눈으로 직면하고 다시 복기하는 건 예상보다 힘든 일이다. 복기한다는 건 곧 목표한 것을 이루지 못한 것을 다시 한번 더 경험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실패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말은 자기개발서에 흔하게 볼 수 있지만 흔히 볼 수 있다고 행동이 쉽다는 건 아니다. 정말로 원했던 것을 놓친 상황을 다시 체험하는 건 자기개발서에 나온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 원하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복기로부터의 고통은 더 커진다. 나는 그래서 자기개발서를 믿지 않는다. 자기개발서에 흔히 등장하는 '실패로부터 배워라'라는 말, 그 말이 단순히 한 문장으로 제안할 수 있을 만큼 손쉬울까?
개인적으로 실패로부터 배우는 것도 자신의 뼈를 치는 고통스러운 행위지만, 이걸 공식적으로 전시하는 건 어떨까? 몇 십배는 더 고통스럽다. 자신의 뼈를 스스로가 고통스럽게 공격하는 걸 넘어 타인이 자신의 실패를 보는 시선을 견뎌야 한다. 타인의 시선은 비판 혹은 비난을 넘어 조소와 조롱일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어떤 시선인지 시선의 대상은 알 수 없다. 시선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고통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설령 타인의 시선이 조롱이 아니더라도 조롱을 넘어선 더 심한 비난을 상상할 수 있고, 실패로 인한 고통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나도 다른 사람이 내 실패를 알 때, 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까에 대해서 생각이 깊어진다. 심지어 내가 다른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저 사람은 내 실패에 대해서 한심하다고 생각하겠지? 나 빼고 내 실수를 조리돌림 하는 거 아닐까? 얼마나 많은 조롱과 조소가 펼쳐졌을까?
스톡홀름에는 바사 박물관이 있다. 바사 박물관은 스웨덴 과거 왕실의 가장 거대한 실수를 전시한 곳이다. 출항한 지 몇 분 되지 않아 침몰한 거대한 배를 인양해서 복원해 놓은 박물관이다. 발트해의 특성상 대부분이 부식되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권력의 상징처럼 거대해 보이는 이 배는 거대한 실패의 상징물이다. 바사 박물관은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거대한 상징을 떳떳하게 전시한다. 거대한 실패를 이루기 전 성공을 꿈꾸며 배와 함께했던 세계 속 인생 또한 바사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배를 완성하기 위한 노력, 승선했던 사람들의 인생, 그리고 무시당했지만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여성의 삶이 그곳에 있다. 단순한 실패의 거대한 증거물뿐만 아니라 실패의 역사를 펼쳐놓았다.
바사 박물관에 처음 느끼는 압도감은 거대한 실패의 크기에서 기인한다. 엄청나게 거대한 실패의 결과물을 눈으로 보는 순간 실패에 대한 비웃음이 뇌 속에 스쳐가기는 커녕 일단 거대한 크기의 실패가 분위기를 압도한다. 바사 박물관 안에 구현된 결과물보다 더 거대한 세계를 목도하는 순간,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다. 정교하고 면밀하게 재현된 과거 속 실패의 세계는 분명히 현재의 사람을 감화시키는 힘이 있다. 무슨 차이일까? 조소의 먹잇감이 아닌 감탄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뭘까? 바로 실패를 부끄러워하고 감추는 게 아닌, 실패를 완벽하게 재구성해서 전시하는 걸 넘어, 실패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한 데 있다. 제아무리 실패로 이어진 세계라도, 세계 그 자체는 사람을 압도하고 감화한다. 그 당시 사람들의 삶과 목표를 향해 다 같이 달려 나갔던 노력은 제아무리 실패로 끝났더라도 사람을 먹먹하게 하는 힘이 있다. 실패로 귀결된 세계도, 그 세계 속 사람들의 삶은 결코 조소할 수 없다. 실패한 세계의 실패한 삶만으로도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힘이 분명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