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정>, 애정 어린 시선과 그로 인한 근원적 한계

그럼에도 영화의 목표는 충분하고도 넘치게 달성한다.

by 조현서

<밥정>의 약한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영화 시놉시스에 나온 정도의 스포일러입니다)


<밥정>은 일종의 로드무비 형태를 띠는 다큐멘터리다. <밥정>은 임지호 셰프가 이리저리 다니면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밥을 대접하는 흐름을 띤다. 요리를 대접받기도 하고, 요리를 대접하기도 하면서 그 집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특히나 할머니)와 교감한다. 계속해서 걸음을 이어가면서 여러 할머니와 요리를 통해서 교감하는 이유는 중간중간 임지호 셰프의 내레이션으로 드러난다. 어릴 적 친어머니의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 후 양어머니께 소홀해지고, 결과적으로 양어머니의 임종도 보지 못한 일종의 죄책감 혹은 그리움을 그 이유로 꽤나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이 흐름은 영화 후반부에 한 차례 중요한 변곡점을 마주한다. 바로 김순규 할머니의 죽음이다. 특정 목적지 없이 방랑하는 구성의 초중반부에 비해 제사 음식을 준비한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생긴 이후의 후반부는 완전히 다르다. 일종의 구체적 목표는 초중반부의 여정의 마무리자 마침표로 다가온다.

<밥정>의 가장 큰 특징은 오롯이 임지호 셰프의 여정과 그 이유에만 서사를 집중했을 뿐 아니라 임지호 셰프의 방랑자로서의 모습만을 강조했다는 데 있다.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영화 상에서 보이는 임지호 셰프의 모습은 산을 떠도는 방랑자의 모습뿐이다. 그렇기에 몇몇 장면이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영화 오프닝의 눈밭을 헤치면서 산나물을 수확하는 모습과 중간에 중요한 자리에서 셰프로서 역량을 드러내는 장면은 별다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분명 방랑자 이외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었고, 분명히 그 장면은 목표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영화 내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영화의 가장 주요한 장점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일단 영화가 엇나가는 느낌을 전혀 느낄 수 없고, 목표하는 바를 정직하게 수행하는 장점이 있다. 이는 다큐멘터리에서 꽤나 중요하다. 한 인간을 보여주는 데 있어 연출가가 키를 놓치는 것만큼 위험한 경우는 없다. 하지만 한 인간의 한 단면만 강조하는 다큐멘터리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한 차원 높은 다큐멘터리는 한 인간의 특정 행태를 통해서 한 인간의 다양한 감정과 철학 혹은 그로 인한 번뇌, 복잡한 감정 등 여러 모습이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확장이 영화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밥정>은 이 단계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 <밥정>은 셰프님의 내레이션, 장면 구성, 서사가 모두 한 목표를 겨냥하고 있다.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즉, <밥정>은 꽤나 정확하다. 정확한 목표를 지니고 있고 그 목표치를 충분히 능가한다. 임지호 셰프의 여정을 보고 있으면 그의 여정의 당위성, 그가 어머니에게 지니는 감정과 왜 여정에 그의 노력을 투여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는 <밥정>의 유효한 성취다. 다만 <밥정>은 여기서 멈춘다. 이 모습과 다른 혹은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는 모습이 지나치게 적게 혹은 부차적으로 제시되는 까닭에 영화는 이미 임지호 셰프에 대한 판단이 끝난 듯 보인다. 즉, 이 영화는 이미 임지호 셰프에 대한 판단이 끝난 상태다. 짧은 러닝타임이 아쉬운 이유다. 분명 연출가가 셰프에 대한 판단을 조금만 유예하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영화가 차지하는 사유의 폭이 굉장히 넓을 수 있는 사례였다. <밥정>은 분명 흥미로운 기획안에서 (제시된 경우만 살펴보면) 영화적인 여정을 하는 인물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하지만 그 인물에 대한 애정 탓에 목표가 한 차원 높게 설정되지 못했고, 태생적 한계를 지녔지만 확실한 성취도 일궈냈다.


movie_image.jpg 2020.03.05 개봉 예정. 충분히 관람할 가치가 있는 다큐멘터리

2020.02.19

메가박스 동대문에서 앨리캣 언론배급시사회로 관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