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는 수의 선물을 받아들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 P의 얼굴을 수는 빤히 바라보았다.
"오빠가 이거 사달라고 했잖아요"
장화 신은 고양이가 오버랩되는 얼굴이었다.
"아.. 그러니까.. 사달라고 한적은.."
P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대화 중에 몰스킨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개인적 애정을 이야기한 것이 그녀에겐 다가올 생일선물에 대한 힌트로 번역되어 들렸던 것이다.
"난 새해가 시작될 때 마다 몰스킨을 사. 다이어리보다 그게 좋거든"
라는 식으로 얘기했던가?
P가 몰스킨에 대한 애착을 이야기한 건 다소 허세스러운 의도에서였다. 내가 애착을 갖는 브랜드를 통해 나라는 사람의 수준을 보여주려는 뻔한 작전. 몰스킨이라는 브랜드가 가지는 스토리는 '병약한 예술가' 이미지를 추구하는 P에게 딱 적절한 그것이었다.
몰스킨 노트는 헤밍웨이, 피카소, 반 고흐 등 과거의 유명한 소설가, 화가들이 써온 노트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브랜드 마케팅 측면에서 그런 매력적인 헤리티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헤밍웨이가 소설을 집필할 때 들고 다녔던 노트', '피카소가 애용했던 노트'처럼 이미지를 만들어 갔다. 그 결과 몰스킨은 예술적 감수성 높은 사람들이 번뜩이는 영감을 떠올렸을 때 슥슥 글을 적거나 스케치하는 노트의 대명사처럼 포지셔닝 되었다. 그것이 P와 같은 종류의 허세를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몰스킨에서 마케팅용으로 사용한 이런 역사는 실제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고 한다. 원조 몰스킨의 기원은 프랑스이지만 현재의 몰스킨은 1990년대에 설립된 이탈리아 회사이다. 지금의 몰스킨이라는 브랜드의 제품을 과거 유명한 예술가들이 썼다는 이야기는 사실 정확히 맞지는 않는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P는 크게 괘념치 않았다. 몰스킨이라는 브랜드를 애착하는 자신이 그런 예술가처럼 보이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P는 수가 선물한 몰스킨 노트를 예술 비슷한 용도로 요긴하게 사용하긴 했다. 지루한 회의 시간에는 열심히 메모하는 척하며 노트 한 귀퉁이에 부장의 돼지 같은 얼굴을 아이콘화해 스케치하기도 하고, 마감기한이 임박한 과제를 위한 처절한 고민을 꾹꾹 눌러 담기도 했다. 여행을 떠났을 때는 베스트셀러 여행작가가 되겠다는 목표로 여행지에서의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용도로 쓰기도 했다. 물론 그 여행기가 한 권의 책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수에게 선물 받은 몰스킨을 마지막 장까지 다 쓴 후에도 P는 똑같은 몰스킨을 계속 구입했다. 그리고 매일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과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이야기들, 세상을 바꿀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장대한 계획들을 적어대었다.
그렇게 10년쯤이 지난 후 P는 몰스킨 대신 아이패드를 쓰고 있다. 아이패드는 확실히 몰스킨 보다 다재다능하다. 펜이 없을 때에도 아이디어를 적어 넣을 수 있고, 글을 끄적이다 지루해지면 넷플릭스를 볼 수도 있다. 장 수에도 제한이 없으며, 지우고 복사하고 확대하고 줄일 수도 있다.
성능 면에서는 몰스킨의 완패였지만 P는 지금도 가끔 몰스킨을 떠올린다. 사각거리는 펜소리, 지울 수 없는 낯부끄러운 이야기들, 그 당시의 감정만큼 깊게 팬 펜 자국...만능의 아이패드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그런 것들을 몰스킨은 여전히 가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