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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의 레더라

by 이백구십칠

P는 늘 유예하는 편이었다.

결정을 유예했다. 그 결정이 틀리지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만남을 유예했다. 관계가 끊어지기 직전에 이르를 때까지.

평온을 유예했다. 불행의 단초가 조금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빈틈없이 방어적인 삶의 태도였다. 하지만 P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유예한다 한들 상황이 완벽해질리는 없다는 걸. 가장 좋아하는 책을 가장 완벽히 평온한 상황에서 읽고자 미루다가 책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질 때가 있었고, 가장 보고 싶었던 영화를 가장 여유로운 주말에 보려고 미루다가 스포일러를 당해버린 적도 있었다.


P가 유예하는 습관을 조금씩 버리게 된 것은 초콜릿 덕분이었다. 누군가 선물로 준비한 레더라 초콜릿 8구 4박스가 사무실로 도착한 날이었다. (누가 무슨 이유로 선물한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레더라 초콜릿을 한 박스씩 들고 아이처럼 기분이 들뜬 4인의 팀원들은 커피를 한 잔씩 내려 회의실에 둘러앉았다. 그리고 의미 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상자를 열고 초콜릿을 하나씩 꺼내 음미하기 시작했다.

P는 각기 다른 8개의 초콜릿 중 캐러멜이 올라간 초콜릿을 가장 먼저 집어 들었다. P는 캐러멜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싫어하는 선택지를 먼저 치워버리는 P 특유의 패턴이었다. P와는 달리 신입사원이었던 R은 눈을 반짝이며 아몬드가 올라간 다크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초콜릿을 베어 물었다. P는 스몰토크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질문했다.

"R씨는 제일 좋아하는 걸 먼저 먹어요? 아니면 제일 좋아하는 걸 나중에 먹어요?"

R이 대답했다.

"당연히 제일 좋아하는 걸 먼저 먹죠. 그러면 매번 제일 좋아하는 걸 먹게 되잖아요"

R의 해맑은 대답에 P는 피식 웃어버렸다. 지금 가장 좋은 걸 취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으면 매번 가장 좋은 걸 취하게 된다는 명제는 가장 안 좋은 걸 먼저 취함으로써 미래의 불행을 제거하는 P의 방식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그러나 R의 말을 쉬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P는 종종 레더라 초콜릿을 샀다. 선물용이 아닌 자신을 위해서. 주로 커피와 함께 먹었지만 위스키를 곁들일 때도 있었다. 8개의 각기 다른 초콜릿을 신중하게 들여다보다가 다크 트러플 필링이 들어간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지금 가장 끌리는 초콜릿을 고민 없이 입에 넣고 천천히 음미했다. 위스크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선택의 시간. 이번엔 바삭한 와플 조각이 들어간 '포일레틴'이라는 이름의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Pure Delight From Switzerland'

레더라의 슬로건처럼 P는 순수한 기쁨을 미루지 않고 바로 입에 머금었다. P는 레더라와 함께 관성처럼 쌓여온 삶의 방식을 미세하게나마 재조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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