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의 넷플릭스

by 이백구십칠

'과잉은 죄악이다.'

P가 이런 명제를 떠올린 것은 랍스터 뷔페에 처음 갔을 때였다. 희귀한 식재료에 속하는 랍스터를 100달러 남짓의 가격에 무한정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P는 입장과 동시에 지불 가격에 본전을 뽑으려면 몇 마리쯤 먹어야 할지 랍스터 시가까지 검색해 가며 전투적으로 식사에 임했다. 그러나 랍스터는 생각보다 느끼했고 두 마리쯤 먹고 나니 더는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껏 먹을 기회가 쉽게 오는 것은 아니기에 더부룩한 배속 신호를 무시하며 꾸역꾸역 랍스터를 집어 먹었는데 어느 순간 그런 자신의 모습이 정말 추하다고 느껴졌다.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심지어 맛있다고 느껴지지도 않는데 산더미처럼 쌓인 음식을 억지로 욱여넣는 모습이 기괴했다. 고도화된 지옥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뒤로 P는 '무한'이라는 이름이 붙은 어떤 음식점도 잘 찾지 않게 되었다.


'과잉은 현혹한다.'

옷장 안을 꽉 채운 수많은 옷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마치 패셔니스타라도 된 양 옷의 가짓수가 멋의 척도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과잉된 옷들은 전혀 멋스럽지 않았다. 겹겹이 겹친 옷들 사이에 어떤 재킷이 있었는지 망각하게 되었고, 큰맘 먹고 산 니트를 제대로 관리 못해 폐기해야 했던 일도 있었다. 가진 옷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자 비슷한 옷을 새로 산 후 한참 후에야 중복되는 스타일이 두세 벌은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고, 계절에 따라 꺼내고 분류하는 일은 쉬이 엄두를 내지 못할 중노동이 되었다. 의류 기부업체를 통해 한바탕 정리를 하고 난 후에야 계절에, 외출 목적에 적확한 옷에 손이 닿기 시작했고 좋아하는 옷을 소중히 관리해 오래 입는 당연한 루틴을 실행하게 되었다.


'과잉은 지루하다.'

가끔 넷플릭스를 켤 때마다 이런 명제를 떠올린다. 넷플릭스 안에는 그야말로 수만 가지 콘텐츠들이 존재한다. 콘텐츠의 역사박물관처럼 과거부터 존재했던 수많은 명작이 입점해 있는 것은 물론이고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의 가장 반짝이는 신규 콘텐츠들이 앞다투어 입점하고 있다. 넷플릭스를 통해 보고 좋아하는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빠짐없이 감상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전이라면 존재 자체를 몰랐을 다른 나라의 콘텐츠를 경계 없이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넷플릭스는 시청이라는 경험을 한 차원 격상시킨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넷플릭스 탄생 초기의 흥분과는 달리 최근에는 넷플릭스라는 플랫폼 안에서 크게 흥분되는 감정을 느꼈던 기억이 없다. 수많은 콘텐츠 중 어떤 것을 볼지 스크롤링하다가 결국 고르지 못하고 꺼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넷플릭스 증후군'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이니 이는 P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닌 듯하다.


과거의 콘텐츠 소비는 확실히 총체적인 무엇이었다. 다시 말해 그 콘텐츠를 경험하는 순간뿐 아니라 그 콘텐츠를 찾아내는 여정, 그 콘텐츠를 감상하는 장소, 실패와 성공을 오가는 경험의 축적이 콘텐츠 자체를 넘어선 통합적 기억으로 각인되어 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요즘의 콘텐츠 소비는 원하면 언제든 볼 수 있고, 심지어 실패의 확률까지 줄여주는 규격화된 무엇으로 변질되어 있다. 분명한 발전의 방향이나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감정에 휩싸일 때가 있다.


'결핍은 경험의 농도를 높이는 조미료다.'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을 경험하고 나서야 떠올린 새로운 명제다. 적당한 결핍이 존재해야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게 되고, 결핍의 과정에 손에 넣은 경험은 그 밀도가 더 높다. 결핍을 지워야 할 얼룩처럼 대해왔던 과거가 안타까워졌다. P는 이제야 자신에게 남아있는 결핍이 무엇인지 유심히 찾아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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