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의 펭귄북스

by 이백구십칠

'사고 외주화'

이따금 생경한 표현이나 날카로운 문장을 보았을 때 두려움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표현하자면 '사고 외주화'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 P는 몸이 으슬으슬해지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그리고 P는 일상적으로 해왔던 사고를 철저하게 외주에 맡기고 있다. 업무적으로 필요한 계산, 정리, 체계화를 AI에게 맡기는 것은 물론이고 마땅히 인간의 영역이어야 할 창작의 영역조차 AI에게 이관시켰다. 심지어 인간관계에서 오는 미묘하고 골치 아픈 상황들, 이를테면 말실수한 상사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와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할지도 AI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사고를 외주화한다는 것은 업무를 외주 업체에 맡기는 것만큼이나 안락하다. 골머리를 싸매고 몇 시간 동안 끙끙 앓아야 했던 문제를 너무나 쉽게 해결할 수 있고 관자놀이가 욱신욱신해질 때까지 집중해야만 가능했던 일이 짧은 프롬프트를 입력하는 것만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외주 업체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우 일은 편해지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청구서가 되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고의 외주화에도 청구서가 존재할 것이다. 사고하는 방법 자체를 잃어버릴 것이고, 도움 없이는 일을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힘들게 고민해 사고의 단초를 얻어냈을 때의 기쁨도 잊혀 갈 것이다.

그러므로 사고의 외주화가 일상화되어 갈 수록 사고의 근육이 무뎌지지 않도록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P가 선택한 훈련법은 읽고 쓰는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인류의 무기다. 읽고 쓰는 행위는 상상의 두뇌와 논리의 두뇌와 분석의 두뇌를 고루 자극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어떤 마음으로 살게 되었을까?’하고 타인의 감정을 헤아려 보게 되고, 한 문장 다음 어떤 문장이 위치해야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 더듬어 보게 되고, 얽혀있는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추리하게 된다. 현재 P에겐 읽고 쓰는 것이 AI의 거대한 파도에 대항하기 위한 유일하고 빈약한 해답이다.


P는 오랜만에 펭귄북스의 '위대한 개츠비'를 집어 들었다. 스무 살 무렵, 또렷하고 귀여운 로고에 반해 수입했던 이 책은 여전히 책장 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펭귄북스의 본래 취지는 '대중에게 좋은 책을 읽히자'라는 것이었으므로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누구나 접근 가능한 수준이겠지만 요즘의 P에게는 이 정도 수준의 텍스트를 읽는 것도 고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글자 한 글자를 곱씹으며 '닉'의 시선으로 '개츠비'를 만나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펭귄북스 하면 특유의 펭귄 로고가 가장 먼저 시선을 끈다. 이 귀여운 로고와 디자인이 P에게 그랬던 것처럼 펭귄북스의 대중적 확산에 한몫했지만,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P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위태롭게 삼엄한 세상을 걸어가는 미약한 인간의 모습. 짧은 다리로 미끄러운 남극을 뒤뚱뒤뚱 위태롭게 걸어가는 펭귄의 모습이 마치 점점 사고하는 방법을 잊어가는 인류가 위태롭지만, 꾸준히 나아가는 모습이 겹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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