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식사 준비를 하며...

by odbel

점심때가 되어 음식을 준비해 간단히 요기를 하고, 남아 있던 찬밥을 싹 덜어 낸 압력솥에 다시금 쌀을 씻어 넣어 밥을 할 준비를 한다. 오전에는 집에 머물고 이른 오후에 나가 늦은 밤이 돼야 들어오기 때문에, 저녁 준비를 미리 해놓는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밑반찬이 몇 있어, 다른 찬 준비는 필요 없고, 국이나 하나 끓이면 될 것 같다. 특별한 재료가 없어, 남아 있는 두부와 감자, 양파 등을 가지고 된장국을 생각에 두고 물을 냄비에 넣고 불에 얹는다.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육수를 우려내고, 된장과 고추장을 약간 넣고 간을 좀 보고, 입에 맞다 싶으면 나머지 채소들을 다 쏟아 넣는다. 한국의 서민 음식 된장 찌개. 대부분 국 종류는 가난했던 서민들의 대표 음식이다. 재료가 적으니 국물로 최대한 우려내어 많은 수가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런 서민 음식에도 삶의 지침이 되는 과정이 있다. 아무리 한 냄비에 재료를 쏟아 넣는다 해도 서로의 맛이 조화를 이루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미역국이든 된장국이든, 재료를 넣고 한번 정도 끊었다 해서 요리가 끝난 게 아니다. 요리를 하다 보면 왠지 요리가 다 된 거 같아 수저로 맛을 보아도 뭔가 빠진 듯한 맛이고 각 재료의 맛이 다 개별적으로 느껴진다. 그렇다고 소금을 넉넉하게 넣으면 그저 소금 국이 될 뿐이다. 국 종류의 조리법을 보면, “중불”로 충분히 우려내라는 글귀를 많이 보게 된다. 하지만 뒷정리를 하고 서둘러 나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음식이 준비가 되기 무섭게 얼른 차려서 국과 함께 한술 뜨고 나간다. 맛을 음미해봐야 아무 특색 없는 식재료를 입에 넣는 기분이다.


점심때 준비해서 혼자 식사를 할 때는 요리가 맛이 좋지 않아. 저녁 먹기 전에 문자 메시지로 집사람에게 별로 맛이 없으니 감안하고 먹으라고 언질을 넣는다. 그러나 가족들은 너무 맛있다는 반응을 보인다. 아마도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 완성된 요리가 저녁때까지 그 맛이 우러나와 제대로 된 맛의 조합을 이루어 낸 거 같다. 하기에 정작 요리를 한 당사자는 그 참 맛을 맛보는 경우가 별로 없다. 다음날이 되어서는 이미 남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기다림이라는 순서는 꼭 필요하다. 아이들의 배꼽시계가 요동을 치더라도, 짓던 밥은 항상 뜸을 들여 마무리를 해야 하고, 국은 특별한 조리법이 있지 않는 한 맛을 충분히 우려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나물 무침도 역시 양념이 잘 배이도록 시간을 주어야 한다. 이런 요리처럼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에서도 너무 성급하지 않아야 한다. 아이들에게 너무 빠른 결과를 바라고, 자신 앞에 있는 일들을 알아서 번듯하게 하기를 바란다. 처음에는 실수와 시행착오가 있고 어리숙하게 보이지만, 느긋한 시간을 가지고 기다려 주면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 낼 수 있지 않을까?


기다림은 시간을 내는 일이다. 미리 조율된 시간에 약속된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누군가는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는 시간에 누군가에게는 지루한 시간 일수 있고, 초조할 수도 있고, 또한 분노 속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만남이 이루어진 시간부터는 과거의 불안했던 시간은 그리 문제 되지 않는다. 또한 아이들의 성장에 관한 문제는 좀 다른 성격을 지녔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지속이 될 수 있다. 삶의 한 자리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들을 성취하는 것을 기다려 주며, 슬픔에 빠졌을 때도 그것을 털고 일어 나는 과정을 기다려 주며,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재촉하지 않고 멈춰 서서 기다려 줄 수 있다. 내가 살아온 과정, 그 세월을 바라보며, 걸음이 늦은 아이가 총총걸음으로 부모를 따라가는 것처럼 우리가 지나온 인생을 어떤 모습으로 살아 갈지 언제나 기다려 줄 수 있다. 오늘 길에 넘어지고 다치더라도 툴 툴 털고 일어나 우리에게 오는 그 과정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세상을 창조한 신의 입장에서도 마찬 가지 일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마주 하며 수많은 변수와 부딪혀 가며 보이지 않는 수풀을 헤쳐 가는 모습처럼 한 목표점을 향해 갈 때, 그 자리에서 끝없는 기다림으로 우리는 마주 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