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할머니,
꿈에서도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병원을 다니신다.
그곳에서도 나는 아프기만 한 손녀딸인가 보다.
올해 초에 꾼 꿈에서는,
할머니가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가셨는데 나는 처음 보는 의사인데 의사는 마치 나를 여러 번 봤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내 뒷목에다 주삿바늘을 찔러 넣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프다고 미리 소리를 질렀지만 할머니는 아직 꺼내지도 않았는데 소리부터 지른다고 뭐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하나도 아프지 않게 쌀 알 만한 것이 두 방울이 나왔다. 할머니가 그걸 내게 건네셨다. 그걸 받아 들고 내가 잠에서 깼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할머니는 또 나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셨다.
이번에는 주사를 맞기 위해서였는데 간호사가 따끔할 거라는 생생한 소리와 함께 바늘을 팔에 찔러 넣는데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지난번 꿈에서 아프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랬다.
꿈에서 나는 생각했다. '지난번에 뭔가 빠진 자리를 메우시려고 하시나?' 너무도 생생하게 수액이 팔을 타고 흘러들어 가는 느낌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할머니와 어떤 얘기를 나누다가 잠에서 깼다.
올해만 두 번이나 할머니 꿈을 꾸었다.
돌아가시고 그 해에 한번 꿈에 나타나시곤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두 번이나 할머니꿈을 꾸었다.
십수 년 전 엄마와 함께 어디를 가는 중이었는데 할머니의 부고를 서울 사는 고모에게서 들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핸들을 마구 내려치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엄마가 유난 떤다라며 나에게 핀잔을 줬다. (유난요? 할머니 임종을 못 본 것도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고모집에만 가지 않으셨어도... 여기 우리 집에만 계셨어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은 생전에 우리와 함께 찍은 사진도,
할머니 휴대폰 번호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꿈에 나오시기 전까지 나는 그랬다. 아니 모르긴 해도 다른 가족들도 그랬을 것이라 짐작한다.
돌아가시고 몇 달 뒤 어느 날 너무도 곱게 한복을 차려입으신 할머니가 꿈에 오셨다.
짧은 생머리 곱게 빗으시고(내 기억에 할머니는 파마를 하지 않으셨었다.), 유난히도 고운 공단 한복을 곱게 입고, 나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셨다. 이곳에서의 시름은 한 줄도 보이지 않는 맑고 고운 얼굴이셨다.
할아버지 묘지에 합장을 해드려서 아마 그곳에서 할아버지를 만나신 듯했다.
할머니의 편안한 모습을 꿈에서라도 뵙고 나니 마음이 놓여서 할머니의 흔적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나에게 할머니는 내 삶 그 자체였다. 어느 것 하나 할머니 것이 아닌 것이 없다.
엄마의 부재로 인해 할머니는 우리에게 엄마 같은 존재였지만 엄마이상의 존재였음을 나와 동생들은 알고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우리들은 마음 놓고 할머니를 꺼내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흔히들 부모님을 이야기할 때 "엄마", "아버지"라는 말에도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그 시점에서 우리는 "할머니"를 부를 때가 그때인 것이다.
목이 메어 할머니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숨을 한번 고르고 나서야 할 수 있는 그런 존재셨다.
할머니의 젊은 시절에는 군대 가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세 살 된 아들(울 아버지), 뱃속의 딸(울 고모)을 키우며 평생 홀로 사셨다. 아들, 딸 번듯하게 키우시고 큰 재산 일구시며 돌아가실 때까지 홀로 그 많은 것들을 지켜내신 분이다. 150센티미터도 안 되는 키에 매일 물동이이며 밤에는 남의 집 삯바느질해 가며 살림을 키워내셨다고 한다. 그리고 두 자녀 공부도 번듯하게 시켜서 훌륭하게 키워내신 剛斷(강단) 있는 분이셨다.
간단한 몇 줄 요약으로 할머니의 곡절 많았던 삶을 정의할 수 없지만 그런 분이셨다.
할머니께 또 한 줄의 시름을 보태드린 건 우리였다.
엄마의 부재로 우리 셋은 할머니손에 맡겨졌다. (내가 여덟 살, 네 살, 세 살의 남동생 둘)
그렇지만 우리 할머니는 어린 우리들이 배고플까 봐, 추울까 봐, 어디 가서 기죽을까 봐 여느 부모 못지않게 노심초사 우리를 키워주셨다.
할머니의 다하지 못한 말들을, 그 깊은 속내를,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음을 안다.
효도 한번 해드리지 못하고 할머니를 보냈다는 안타까운 마음은 나 나 동생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와 함께 있을 때만 온전히 내가 될 수 있는, 그냥 내가 되어도 되는...
나의 눈물, 나의 설움, 나의 고통을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알아주시는 그런 분이셨다.
이렇게 몇 글자의 서툰 표현으로 미화해서는 안 되는 할머니는 나에게 그런 존재인 것이다.
할머니의 냄새, 따뜻한 품속,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내 삶을 지탱해 주는 마법 같은 무엇이었다.
내가 어렸을 적 여러 가지 이유로 나 자신을 학대하던 시절, 적잖이 병치레하는 나를 할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지극정성으로 돌보셨다.
항상 머리가 아프다고 소리 지를 때마다 귀하디 귀한 우황청심원을 궤짝에서 하나씩 꺼내주셨고 병원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할머니는 나를 한의원으로 무당집으로 자주 데려가시곤 했다.
방법이야 어떻든 할머니의 그런 정성으로 나는 곱이곱이 잘 버티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 할머니가 아직도 나를 데리고 병원을 가신다.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숙제가 남아있으셨나 보다.
그렇게 애달프게 보고 싶을 때는 꿈에도 한번 오시지 않더니 왜 올해만 두 번째 나를 데리고 병원을 가셨는지 모르겠다.
할머니가 먼 곳에 계시면서도 아직 나를 놓지 못하고 계시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또 한 번 마음이 아려온다.
할머니께서 살아계시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못 해 드렸다.
언제나 괜찮다고만 하시는 할머니 말씀을 진심인양 받아들이고는 다음에 해드리지 뭐! 라며 외면했다.
다음에, 다음에.... 그리고 그다음은 없었다.
내 의식이 기억하고 있는 할머니의 恨(한) 많은 삶도 녹록지 않은 삶이었는데, 그 전의 삶이야 오죽했을까..
내가 작가가 돼서 많은 분들께 할머니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면 우리 할머니 얼마나 기뻐하실까.
언젠가 할머니의 恨(한) 많았던 삶을 글로 써서 오직 할머니만을 위한 책을 써드리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할머니께 받은 사랑과 정성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할머니께 獻書(헌서)를 하면 나의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덜어내지지 않을까.
할머니께서 내가 보고 싶어서 간밤에 다녀가셨나 보다.
우리 할머니 닮은 국화꽃 풍성하게 사들고 할머니께 다녀와야겠다.
이번엔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도 해드려야겠다.
"할머니, 저는 이제 아프지 않고 잘 지내고 있어요.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니 제 걱정 그만하세요."
"국화꽃 닮은 우리 할머니 많이 많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많이 많이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