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라흐마니노프와 러시아의 겨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들

러시아의 겨울이라고 제목을 붙였지만 나는 러시아에 가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분위기는 나름 느껴봤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영화 '닥터 지바고'의 설원을 연상시키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들을 들어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곡의 도입부가, 얼어붙은 북극의 강 아래 파도치는 물결을 연상시키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가 않으며, 역동적이고 힘찬 타건을 요구하기로 유명한(악명높은!)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들을 때마다 그 테크닉에 놀라게 된다.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역시, 광고로도 많이 쓰인 바 있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변주 18번 때문에 자주 듣는 곡이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생전 처음 들었을 때에는 다소 낯설고 어려운 느낌이었다. (바흐 같은 바로크 음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음악들은 기본적으로 멜로디가 단선적으로 흘러가는데, 라흐마니노프는 복잡하고 다성적인 화음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음악이론은 하나도 모르지만, 라흐마니노프의 복합성은 바흐가 사용하는 대위법적인 복합성과는 좀 다른 것 같다. 바흐는 주로 같은 선율을 캐논처럼 반복하고 병치시킴으로써 곡에 변화를 주는 반면, 라흐마니노프는 주된 선율에 변조된 음을 붙이거나 한 손가락으로 여러 음을 동시에 짚게 만듦으로써 음색을 풍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라흐마니노프의 화음은 뚱뚱하다.


협주곡은 아니지만 라흐마니노흐의 '애가'와 '악흥의 순간'도 좋아하는데, '환상적 소품'에 포함되어 있는 '애가 Op.3-1'은 그 처절하고(진짜 가슴 찢어지는 느낌이 난다) 애수 띤 멜로디 때문에 강한 인상을 남기며, '악흥의 순간' 6곡 중 내가 좋아하는 4번은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 같은) 빠른 템포와 피아니스트가 보여주는 고난도 테크닉 때문에 흥미진진하게 감상하게 된다.


물론 라흐마니노프는 20세기 작곡가인지라 바흐나 헨델 같은 바로크 작곡가들이 보여주었던 신에 대한 경외감이라던가 거룩한 찬양에의 느낌은 없다. 그렇지만 동시대의 많은 작곡가들이 조성 음악의 규칙들에 반기를 들고 그것들을 해체하면서 현대음악의 방향으로 흘러갔을 때, 라흐마니노프는 (조금 난해하긴 하지만) 여전히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조성 음악을 고수하면서 대중과의 교감을 유지하려고 했다는 것은 높이 사줘야 할 것 같다. 결론적으로 라흐마니노프는 쇼팽과 더불어 멜랑콜리한 낭만성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 유명한,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변주 18번의 링크를 올려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g23umCq9z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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