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고갱 레플리카전

군산예술의전당 2026.1.16(금)~ 3.1(일)

by 로즈릴리

고흐와 고갱 레플리카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고흐와 고갱, 파리에서의 만남

당시 파리는 젊은 화가들의 실험적 흐름과 함께 인상주의 화가들의 열풍으로 독자적인 화풍이 활기를 띠고 있었습니다.

두 화가의 만남은 후기 인상주의라는 이름으로 예술사의 새로운 전환을 마련하게 됩니다.


고갱.jpg 폴 고갱, 오스니의 퐁투아즈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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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60215_134924183_04.jpg 폴 고갱


파리에서 인정받는 증권회사에 다니던 고갱은 1873년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고갱은 인상주의 화풍에 깊이 매료되었고 화가들을 후원하던 화상 폴 뒤랑 루엘과 계약을 맺고

전시회에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출품합니다, 이렇게 화가로서의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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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고흐는 스물여덟살의 나이에 처음 붓을 잡고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고흐는 네덜란드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작품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노란집 1888.jpg 고흐, 노란 집 1888


아를의 환희와 아를의 비극


1888년 10월 23일 고흐와 고갱은 남프랑스 아를의 '노란 집'에서 함께 살면서

예술가 공통체를 꿈꿉니다.

고흐는 고갱과 협업을 통해 새로운 예술세계를 그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고갱은 현실적으로 이 작은 도시에서의 생활을 망설였습니다.

고흐의 동생 테오는 형을 위해 고갱의 작품을 구매하고 생활비를 주는 조건으로 그를 아를로 불러들였고

마침내 두 화가의 불꽃같은 동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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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겨울 고흐와 고갱의 예술적 긴장은 끝내 폭발합니다.

서로 다른 시선과 해석은 충돌을 반복했고 고갱은 아를을 떠나고

고흐는 깊은 혼란속에서 스스로의 귀를 잘라버리고 그렇게 비극의 순간으로 막을 내립니다.



요양원의 복도 1889.jpg 반 고흐, 요양원의 복도 1889 (저위의 글과 그림을 보는데 마음이 울컥 눈물이 나오려고 했습니다.ㅜㅜ)


고흐는 아를을 떠나 생레미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생레미의 병원에 머무는 동안 반복적인 발작을 겪었지만, 그의 작품에는 내면의 고통을 넘어서 찬란한 생명력과 감정이 뜨겁게 새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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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지상낙원, 타히티


도시를 떠난 고갱은 원시의 땅을 찾아 타이티로 향했다.

그 곳에서 원주민들과 어울려 살아가면서 문명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예술가로 남기를 꿈꿨습니다.

타히티의 자연과 사람들을 담은 작품들은 그의 마지막 10년을 채운 고갱의 또다른 언어였다.


폴 고갱은 단순한 풍경이나 인물 너머의 의미를 탐색하며 상징과 신화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화폭에 담아냈다. 어린 시절 페루에서 보낸 고갱은 유럽 중심의 시선과는 다른 감수성을 키웠다.


고갱은 파리에 정착하지 않고 1865년 선원이 되어 5년간 바다 위에서 세계를 누빕니다.

이후 안정적인 은행원으로 지내며 예술작품을 수집하고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다가 1882년

주식시장의 붕괴를 계기로 전업화가의 길에 들어섭니다.

고갱은 익숙한 틀을 벗어나 예술로 새로운 세계를 상상한 탐험가이자 문명을 벗어나 야생을 담고자 했으며

색채 너머에 숨은 상징과 삶의 질문을 남깁니다.




영혼의 화가 고흐


고흐는 인간 내면의 정서와 자연의 생명력을 거칠고 강렬한 붓질로 표현했습니다.

자연의 강렬한 색채를 담았고 소용돌이치는 듯한 폭발적인 붓질은 삶의 고통과 고독을 그려냈습니다.

살아 생전에는 단 한점의 유화 작품만을 판매했지만 오늘날 회화사에서 예술정신의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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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연작 해바라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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