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상에 단연 기억에 남는 전화는 첫 취업 합격 통보 전화다. 여자 친구와 에버랜드에 가려고 구월동 인천 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날이다. 버스 시간이 다 되어 플랫폼 앞에서 줄을 서 있었다. 버스를 타려는 찰나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당시 면접을 약 3~4차례 본 후라 약간의 직감이 왔다. 부리나케 전화를 받았다.
"김훈기님 최종 합격하셨고요. 관련해서는 따로 메일에 안내드리겠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기분이었다. 대학 졸업 후 알바로 삶을 이어가며 약 반년을 취준생으로 지냈다. 말 잘하는 줄 알고 호기롭게 등록한 쇼호스트 학원에 모아둔 돈을 다 써서 돈도 없었다. 부모님에게 손 안 벌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스스로가 금전적으로 쪼그라들고 있었던 당시였다. 또, 와이프는 당시 직장인이었기에 나 스스로 알게 모르게 압박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미화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은 너무나 푸르른 가을이었고,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날이었다. 특히 그 순간부터 9년이 지난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는 와이프가 같이 있어서 더욱 뜻깊다. 그래서 단연 기억에 남는 전화는 2015년 9월 구월동 인천 터미널에서 버스 플랫폼에서 지금의 와이프와 손을 맞잡고 신나 했던 그날 아침 받았던 전화이다.
"김훈기님 최종 합격하셨고요. 메일로 자세한 내용 안내해 드릴게요"
어안이 벙벙하다. 몇 개월 동안 옅으면서도 사라지지 않던 스트레스가 싹 사라졌다. 취준생 생활을 6개월 넘게 했다. 취직은 해야 하는데 어디로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대기업은 힘들다고 판단하고 이름있는 오랜 작은 중소기업들을 찾았다. 신문방송학과 문예 창작을 복수 전공하면서 어렴풋하게 글 쓰는 일을 해야겠다고 느꼈다. 잠깐 쇼호스트 준비를 하면서 한눈을 팔았지만 결국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가 전문성을 가질만한 곳을 찾았고 E 스포츠 분야에서는 나름 알려진 게임 웹진에 지원했다. 그 전에 몇몇 군데 면접을 더 봤지만 결국 가장 희망하던 곳에 붙게 됐다. 막상 붙고 난 그 순간 기쁘면서 그간의 옅은 스트레스가 모두 사라졌다.
연락을 받은 아침 8~9시경 인천 구월동 버스터미널 플랫폼의 공기는 참 맑았다. 당시 여자 친구였던 지금의 와이프도 함께 신나 하며 축하해 주었다. 나는 넉넉하지 못한 주머니 사정으로 와이프에게 쪼잔하게 굴었다. 그럼에도 그런 모습까지도 잘 받아주던 와이프가 글을 쓰는 지금 새삼 더욱 고맙다고 느껴진다.
2024년 지금 벌써 나는 9년 차가 되었고, 와이프와 결혼 1년 차가 됐고, 팀장이 됐다. 그 시작 점이었던 그날의 전화는 지금도 인상적이었다.
"난 너 백수부터 다 봤어"
와이프랑 과거의 나날들을 뒤돌아보면 꼭 듣는 말이다. 쇼호스트 준비생으로 사실상 백수였던 나는 2015년 와이프와 처음 만났다. 그녀는 직장을 다녔고, 나는 백수였다.
백수의 주머니 형편은 당연히 넉넉하지 못했다. 그때마다 데이트 비용이 부담스러웠다. 천 원, 이 천 원에 스트레스받았으며 살았다. 당시 와이프는 내가 그렇게 돈 때문에 움츠러드는 것을 알았고, 당시 많이 얻어먹었다.
그러던 어느 9월, 에버랜드에 가려고 인천 터미널에 아침부터 일어나 도착했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든든하게 식당가서 한 상 차려 먹고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즐길 우리 부부지만, 당시에는 돈 한 푼 아끼자고 터미널 편의점에서 가볍게 끼니를 때웠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평소처럼 취직의 압박과 자연스레 따라오는 주머니 사정을 꾸역꾸역 뒤로 한 채 에버랜드 행 버스를 타려던 순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김훈기님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아름다운 말이었다. 그간 받아온 모든 압박은 한 순간에 사라졌다. 어렴풋하게 그날 에버랜드의 하늘과 나무들은 정말 푸르렀던 것 같다.
와이프는 그날로써 정말 나의 백수 시절부터 팀장이 된 지금까지를 모두 본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날 전화를 받았던 순간의 감상과 재질 등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