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만한 사람이 책 읽는 방법

by 단단지

나는 산만하다.

굳이 구체적으로 표현을 하자면, 본능적으로 재미없다고 판단되면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해진다.


그런 점에서 책은 아주 재밌지는 않다. 단지, 흐트러진 집중력을 다시 쌓게해주는 데에 도움이 되고, 에세이를 즐기는 나에게 타인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접할 수 있는 매체다. 그러나 매번 독서의 시간이되면 스스로 시험에 든다. 모든 문장이 재미있을 수 없고, 모든 챕터가 날 흥분시킬 순 없다. 그런 점에서 유독 눈으로조차 문장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집중력이 사라질 때면 한 문장도 이해 못한다. 한 없이 쉬운 문장을 반복해서 주어만 읽을 때가 있다.


과거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집중의 시간이라 함은 중간&기말 고사라고 불리우는 시즌이었다. 앞 문단에서 나열한 것처럼 집중은 늘 박살났다. 그럴때면 집중 못하는 내가 한탄스러웠다. 그 당시에는 ‘왜 집중 못할까?’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변을 못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재미없어서라기 보단 산만함이 강해서 참아내는 능력이 부족한가 싶었다.


그런데 그런 놈이 아이러니하게도 신방과에 진학해서 신문을 전공했고, 우리 대학교 최초의 문예창작학과 복수전공 졸업생이 됐다. 그리곤 게임기자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독서를 그렇게나 두려워하면서 이렇게까지 오랜 기간 텍스트와 씨름한 사람은 정말 없다고 자부한다. 오랜 기간 텍스트와 애증의 관계를 이어가다보면 그래도 좋아하게는 된다. 그래서 여전히 지금도 텍스트에 집중을 잘 못하지만, 산만한 사람이 합리화할 수 있는 독서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됐다.


그 방법은 단순하다. 독서를 하는 그 상황에 집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책을 읽다보면 텍스트와 벗어난 생각을 하면서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당연히 독서를 하면 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모르는 단어의 뜻을 추론하기위해 생각을 많이한다. 그러나 산만한 사람들의 ‘텍스트 길 잃음’은 차원이 다르다. 예를 들어보자. 최근 읽고 있는 이슬아 작가의 ‘갈등하는 눈동자’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상황 설명에 몰두한 사람들은 자신과 배경이 맺고 있는 관계를 해석하고 전달할 여유가 없잖아요”


해당 문장의 앞뒤 맥락은 ‘작가라는 직업은 그냥 상황을 나열하는 것이 아닌 상황이라는 좋은 재료를 이야기로 만들어 독자로 하여금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사람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예시 문장은 어려운 문장은 아니다. 단순하게 해석하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무언가 썰을 풀 때 말하는 데에 몰두해서 자신과 배경이 맺고 있는 설명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문장을 이해하는 데, 꼬박 지하철 서너 정거장이 지날 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이유는 역시나 산만해서다. 먼저 “상황 설명에 몰두한 사람”까지는 머리와 눈으로 읽었다. 그리곤 머리는 ‘와 이거 나아냐? 상황 설명하는 거 진짜 재밌지’라고 생각하면서 다음 뒷 텍스트로 가지 않는다. 사실 독서는 머리와 눈이 같이 한다. 근데 머리가 본체다. 그래서 먼저 문장 끝까지 가버린 눈은 다시 머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글을 읽는다. 내가 집중을 못하는 이유는 바로 대부분의 문장을 이렇게 읽기 때문이다.


그나마 해당 문장에서는 상황과 관련된 잡념에 머물렀기에 망정이지, 여기서 나아가 잡념이 꼬리를 물면 끝도 없이 나아간다. 대충 이런식이다. ‘나는 썰 푸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지, 아닌가? 그냥 말만 많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들은 어찌 생각하려나, 좋아하는 사람도 있던데. 그러면 유튜브나 해볼까? 나 썰 많은데, 아 뚱딴지같은 상상하고 있네? 다시 읽어야지’와 같은 답도 없는 흐름이다. 이어서 문장의 중반, 후반에도 비슷한 잡념이 더해지면 서너 정거장만에 해당 문장을 이해한 이유가 충분히 됐으리라 본다.


특히나 꼴에 문학도 였다고 작가들의 시그니처 문체나 문장을 만들어내는 기술들까지 이해해보겠다고 거의 사골 고아 먹듯 문장을 녹여 먹는 고약한 독서 버릇까지 있으니 내 독서 속도는 말 다 했다. 물론 모든 문장을 이래 읽진 않지만 아무튼 그렇다.


과거에 이런 식의 독서는 명백히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책을 다 읽는 것이 목표인데, 집중하지 못하고 잡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주 한 권의 소설을 읽어야 했던 문예창작학과 시절에 독서는 정말 도를 닦는 심정이었다. 그러니 읽고는 싶지만 무서운 게 책이었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과거에 내가 하는 텍스트의 해석 혹은 독서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단순하게는 시험 문제이기에, 읽기로 마음먹었으니 마지막 페이지를 봐야하기에 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압박 주지 않는다. 그저 선택했고 그저 읽을 뿐이다. 보다 말아도 그만이다. 마치 휴일이면 10시간이고 뭐고 할것같아 잔뜩 구매한 게임들이 정작 대부분 2~3시간 즐기고 스팀 라이브러리에 묵혀둔 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내 지금의 독서는 상황 자체를 독서라고 정의했다. 공부 못 하는 애들이 하는 소리같다. 맞다. 그러나 이 합리화를 들어보시라. 여기서 깜박한 정의가 있다. 늦었지만 읽고 내려가야 한다. 지금 내가 다룰 독서하는 방법은 사실 정보글을 빠르게 이해하고 습득하는 데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이 독서 방법은 수영으로 비유하자면 생존 수영이 아니다. 수영을 잘 못하지만 물에서 놀고 싶은 산만한 맥주병들에게 바치는 내용이다.


산만한 맥주병들은 독서를 하다보면 다양한 잡념들이 생겨난다. 이때 이를 자책하지 말고 그냥 잡념을 이용하면 된다. 우리의 목적은 책을 끝까지 읽는 게아니다. 독서하고 있는 상황 자체를 독서라 보면된다. 문장을 읽다 생겨나는 잡담을 계속 꼬리 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시라. 그것이 내가 하는 독서다. 그리하다 보면 무언가의 압박없이 자연스레 끝까지 책을 읽을 수 있게 된다. 남들보단 독서량에서 밀릴 수는 있지만 누구보다 알찬 독서를 할 수 있으리라 장담한다. 다만, 너무 글에서 동떨어진 잡념만 주의하면 된다. 갑자기 문장과 전혀 상관없는 전기 장판을 코드를 빼고 왔는지에 대한 걱정이나, 오늘 점심 고민따위는 참아야 한다.


또, 지속 강조하지만 후르륵 문장을 눈으로만 읽다가 ‘무슨 내용이었지?’라는 생각이 들면 집중 못 했다고 자책하지마라. 그냥 다시 주어로 돌아가서 또다시 새로운 잡념들과 함께 문장을 읽으면 된다.


이런 방식으로 나도 독서를 다시 시작한 지 우여곡절의 약 2년이 흘렀고, 한 달에 한 권 정도 읽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만족스러운 성공이라 보긴 어렵다. 왜냐하면 다시 책을 펴면 한 권은 일주일 안에는 완독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즘 다시 책을 폈다. 지금은 위와 같은 방법으로 책 읽는 데에 부담을 덜려고 편하게 읽고있다. 덕분에 여전히 느린 독서로 속독과 빠른 이해로 무장한 와이프에게 “너는 무슨 유치원생이냐? 왜 이렇게 늦게 읽어”라는 소릴 듣지만 말이다.


다시금 요약하면 산만한 사람이 책 읽는 방법은 독서 중 생기는 잡념마저도 독서의 일환이라 생각하고 즐기면 된다. 완독할 필요 없다. 한 문장을 읽어도 잡념과 함께 글을 바라보자. 자연스레 독서는 학습 독서가 아니라 여가 독서가 된다. 나는 여가 독서 덕분에 다양한 잡념과 아이디어, 스스로의 성찰, 생각의 확장 등이라는 즐거운 재미를 얻었다.


산만한 누군가가 집중이 어려워 독서를 두려워한다면, 나는 말하고 싶다. 잡념과 함께 글을 읽으라고. 지금 말한 잡념은 수능을 앞둔 고요한 독서실에서 절대 안 되는 그런 게 아니다. 순수히 잡념 자체도 독서의 과정과 일환으로 보며 독서를 좀 더 친근하게 접해 보시라. 나는 그렇게 잡념을 한가득 채워 독서를 한다. 한 문장 읽는 데 지하철 몇 정거장이 걸리더라도 그냥 본다. 오늘도 몇 페이지 집중 못 하고 딴 길로 샜다면 차라리 더 멋진 길로 새자. 그러곤 생각하자. "아, 오늘도 독서 알찼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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