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1일 "효"사관학교 제1기생 입교
돌이켜보면, 그 모든 과정은 결코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기억이 늘 함께했다.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는 서면재건 중·고등학교를 세워 운영하셨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학생 모집을 위해 홍보물을 한 아름 안고 공장 앞에 서 있었다. 국제고무공장 정문에서 여공들에게 땀을 흘리며 종이를 건네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이들이 다시 배움을 이어갈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모습이 내 안에서 되살아났다.
나 역시 경로당을 찾아다니고, 노인복지관을 방문하고, 지하철 개찰구 앞에 서서 어르신들에게 홍보물을 건넸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첫 입교식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날, 모덕 청소년회관에서 “효”사관학교의 첫 삽이 떠졌다.
"효"사관학교 제1기생들의 모습은 지금도 또렷하다.
교사, 경찰, 군 장교, 사업가… 살아온 길은 달랐지만, 얼굴에는 공통된 표정이 있었다. 부모의 고마움을 알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실천하며 살고 싶다는 다짐이었다.
“효”사관학교는 겉으로 보면 부족한 것이 너무 많은 곳이었다. 독립된 교실도, 상근 교직원도, 전임 교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히 다른 무엇이 있었다.
졸업 후에는 후세대에게 “효”를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노후를 의미 있게 보내며 봉사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이 전액 무료로 이루어졌다.
그곳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었다.
삶의 방향을 다시 찾는 공간이었다.
그중에서도 잊히지 않는 한 사람이 있다.
부산16개 자치구 중에서 부산 남구에서 온 한 공직자 출신의 수료생이었다.
그는 선천적 장애를 가진 딸을 돌보며 살아가고 있었다. 늘 자식에 대한 걱정과 아버지로서의 아픔을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딸의 손을 잡고 “효”사관학교에 나왔다.
함께 수업을 듣던 그들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말없이 서로를 지켜보던 눈빛, 그 안에 담겨 있던 마음은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 장면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효”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아마도 그때의 모습이 하나의 답일 것이다.
“효”사관학교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금 25기생도들도, 그날의 마음으로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