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회 +67

효사관학교 7기생

by 천우

옛말에 여우를 피하면 호랑이를 만난다는 속담이 틀리지 않았음을 실감한 것은, 7기생을 맞이하던 시기였다.

6기생이 겪었던 어려운 역경과 난관을 겨우 극복하고 나니, 또 다른 시련이 이미 앞에 도사리고 있었다.

7기생은 홀수 기수라 다시 모덕청소년회관 강의장을 자비로 대관하여 준비해야 했다. 그렇게 대관료를 부담하며 2011년 9월 8일 입교식을 거행하고 7기생을 맞이하였다.

이때부터는 부산뿐 아니라 타 지역에서도 ‘효’사관학교 소식을 듣고 부산까지 찾아와 교육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중 한 명인 울산에서 온 군 장교 출신 남성이, 7기 입교 전에 3기로 임관한 여성과 함께 찾아왔다. 그는 무릎까지 꿇은 채 사정을 하며 꼭 입교를 시켜달라고 애원하였다.

나이가 있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간절히 부탁하는 모습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체면이나 상황을 전혀 개의치 않고, 오직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와 함께 온 여성은 그의 첩이었고, 그는 울산 보훈회관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효’사관학교에 대한 정보를 듣고 부산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울산에서 연대장까지 지낸 육군 대령 출신이었지만, 그의 삶은 협잡으로 이어져 왔고 결국 그로 인해 보훈회관에서도 쫓겨난 상태였다.

그가 7기로 입교한 이유는 단순했다. ‘효’사관학교에서 교육을 수료한 뒤 이를 이용해 생계를 이어가려는 목적이었다. 그는 울산에서 부산까지 매번 내려오며 교육에 성실히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7기생 중 부회장이라는 직함까지 맡은 그는 학교의 모든 것을 파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효’사관학교에 대한 정보를 세세히 익혀 나갔다.

2011년 10월 30일 7기생으로 임관한 이후, 11월 1일 제113회 매월 1일 ‘효’생각 시민운동에도 참여하며 겉으로는 누구보다 순수한 효운동가처럼 행동하였다.

그의 숨은 의도를 전혀 알지 못했던 우리는, 그가 원하는 것을 대부분 들어주었다.

그는 울산에서도 매월 1일 ‘효’생각 시민운동을 펼치고, 효행 장려를 확산하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그 말을 믿고 우리는 울산에서도 ‘효’사관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부산에서 진행하던 모든 교육과 운영 방식을 그대로 전수하였다.

심지어 울산까지 직접 올라가 설립을 도와주며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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