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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Mar 29. 2016

아이 숙제

딸아이 숙제를 보고 뜨거운 탕에 몸을 불리며 생각했고,

  <일기와 수필 사이>


  실로 오래간만에 쓰는 것 같다. 더군다나 쓰고 보니 참으로 길어 읽어줄 누군가에게 미안하다.


  작년 가을, 아이 녀석이 유치원에 가서 아빠는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고 잘 놀아주지도 않고, 밤에는 밖에 나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 이야기를 담임선생님을 통해 전해 들었는데, 녀석이 날 정확하게 파악하고 본 그대로를 말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다만 매일 아침에 등원시키며 유치원 현관에서 아이를 꼭 안아주는 걸 생각하면 꽤나 내 모습이 가식적으로 보였을 테다. 그래서 이번 3월 교직원 모임을 빌려, 유치원 선생님께 사정을 설명하였다. 사실은 아이가 좋아하는 소꿉놀이는 너무 어렵다. 그리고 텔레비전은 녀석이 좋아하는 걸 같이 봤었고, 밤에는 녀석이 자러 갈 때쯤 달리기 하러 30분 정도 다녀온다고 말이다. 그랬더니 아이의 말은 믿지만, 분명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그 답변에 나는 그 길고 깊은 사연까지는 다 말할 수가 없어 오히려 더 민망해졌다. 내 얼굴을 감추고자 다시 말을 이었다. 최근엔 일주일에 1번 한글과 셈을 가르치고, 텔레비전 대신에 책을 보고 있다고 물론 소꿉놀이는 여전히 어렵다고 말하고 급히 자리를 옮겼다.


  작년, 2015년에는 거의 매일, 집을 나갔었다. 베란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기슭에 땅거미가 내리면, 어슴푸레 내 안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그래서 난 집을 뛰쳐나갔다. 뛰쳐나간 길바닥엔 땅거미만 보일뿐, 아무것도 없었다. 어차피 내가 찾고자 하는 건 길바닥에 있는 게 아닌데, 그 길바닥에서 잃어버린 걸 찾기 위해 아님 무언가를 떨쳐버리기 위해 달리고 헤매었다.


  부모님이 내 집에 들어오시고 난 다음부터 몸은 편해졌지만, 마음은 한쪽이 아리고 불편하다. 노년에 자식한테 봉양받지는 못할망정 왠지 자식과 손주 새끼 부양하느라 등꼴이 빠지는 것 같아 보여 옆에 있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부모님 옆에 같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게 반복이 되다 보니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진다. 내 나이가 서른 중반인데, 부모님과 살고 있는 나 자신이 부모님의 자식으로 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딸아이의 아빠로 살고 있는 건지 그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 둘 다의 인생을 사는 거지만, 그 매개체가 사라진 지금은 동시에 두 명의 내가 존립하는 것이 상당히 혼란스럽다.


  그렇게 밤마다 길바닥에 날 던지며 달리던 그쯤, 주말엔 영어연수를 받게 되었다. 연수 첫날에 간단한 자기소개를 위해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 자기소개도 연수과정이다 보니 나는 이런 사람이오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고 영어로 묻고 답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내 나이쯤 되어 보이는 사람에게 반드시 묻는 질문이 하나 있다. 사실 나도 누굴 만나면 이게 제일 궁금하니, 그 질문을 받는다고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다만 이제는 곤란할 뿐이다.

  그때 한분이 나에게 결혼을 했냐고 물었다. 그런데 결혼을 했었으니 했다고 하는 게 맞긴 한데, 왠지 했다고 하면 상대가 궁금한 것과 내가 답하는 것이 상충하는 것 같아서 그냥 딸아이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그 옆에서 한참을 멍 때리고 있던 사람이 질문을 했다.  

  "아내가 있나요?"

  분명 딸아이가 있다고 했는데, 아내가 있냐고 묻는 건 틀린 질문은 아니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이겠지만, 나에게는 대답이 가능한 질문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모든 분이 가가대소하는 바람에 다행히 대답은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질문을 한 연수생은 연수 내내 가끔 맥락에 맞지 않는 걸 묻거나,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이따금씩 보였다.

  딸아이는 있지만 아내는 없는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아들로서 삶을 버티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아빠로서 인생을 견디고 있는 건지 내 모습을 찾지 못한다. 나에게서 아들이 베어나면 난 그저 어머니께 기대고픈 약한 꼬마이고 싶고, 아빠가 배어나면 딸에게 듬직한 어른이고 싶다. 아들과 아빠의 모습은 서로 거둬들이고 몰아내는게 출렁이는 바닷물 같다. 분명 같은 바닷물이지만 밀물과 썰물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듯이 지금 내게 그 둘은 병존하지 않는다. 다 큰 성인이 부모와 함께 살다 보니 난 여전히 아들인 것 같은데, 한편으론 아빠이고 그런데 아이는 있되, 아이의 엄마는 없으니 그로 인한 자아분열은 비단 나의 탓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게 내가 원해서 이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사별의 아픔이 바닷가의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사라진다고 하나 이제 겨우 3년밖에 되지 않아 그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단지 그때의 기억이 아픔으로 남아는 있지만 그걸로 인해 눈물이 나는 날도 있고 담담하게 받아 들릴 때도 있을 뿐이다. 아들로서 아빠로서 갈 곳을 잃을 때면, 나는 나를 길바닥에 던지거나 아니면 아이의 엄마를 떠올린다. 뽀얗고 동그란 얼굴에 누가 봐도 모나지 않은 눈매와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오뚝한 콧날과 늘 입꼬리가 올라가 있어서 웃는 얼굴이었던 그 모습을 말이다. 당장이라도 어디선가 "여보"하고 부를 것 같은 한 때 내 여자였던 "아내"의 모습. 그렇게 그 모습이 그리워 글을 쓰다 보면 슬픔과 원망 그리고 허전함과 그리움은 융화되어 글로서 남게 되고, 난 이전의 내가 아닌 지금의 나로 조금이나마 홀가분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난 프란츠 카프카가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처럼 글을 쓰고, 아들로서의 길과 아빠로서의 길을 찾기 위해 쉼 없이 뛰었다고 믿는다. 그런 나의 행동들은 포기하고 죽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살아보겠다는 의지였고, 돼먹지 못한 인생의 굴레에서 견디고 버텨보겠다는 아빠와 아들로서의 말없는 고백이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한 달에 100km 정도를 뛰었고, 며칠에 한편씩 글 따위를 쓸 수 있었다. 그해 겨울, 아이와 함께 집으로 가는 길에 먹은 붕어빵은 참 맛있었다. 그 붕어빵을 보니 아이는 물러가고 아내가 다가왔다. 다가온 아내를 맞이하고 싶었지만, 어디에서도 남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남편이 되려면 아내가 있어야 하는데, 다가온 아내는 있어도 남편은 없고, 남편이 아내를 마중 가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다. 사라진 남편의 모습을 찾고 싶어 쓴 글이 <붕어빵>이었다.

  그런데 그 글을 쓰고 하루쯤 지나자 휴대폰에서 끝없이 알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붕어빵 조회수가 1000회를 넘었다. 2000회, 3000회,  그러다 10000회를 가볍게 넘기더니 급기야 그 조회수가 이십만을 넘겼다. 부박하기 그지없는 내가 쓴 글이 사람의 관심을 받게 되자 두려웠다. 그저 이도 저도 아닌 날 위해, 어쩌면 세월의 풍화로 사라져버릴 아내의 기억을 남기기 위해 쓴 글이었는데 그걸 다른 이가 읽으니, 그 글은 읽히고 알려졌지만 난 쓰는 것이 두려워 숨게 되었다.  

  어떤 연유로 그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알아보니 그 글이 카카오 채널과 브런치 메인에 올라간 것을 알게 되었다. 계절이 겨울이다 보니 붕어빵이라는 소재가 썩 나쁘지는 않았다고 판단해서 그랬을까? 그 글이 카카오 채널 제일 상단에 올라갔던 것이다. 아마 <브런치>를 알리고자 내 글을 낚시 미끼로 사용했는 것 같은데, 결과는 그 글이 270,000 넘게 읽혔으니 미끼로서는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일기에 지나지 않는 글을 미끼로 사용했으니 입질만 270,000건이 넘었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테다. 그리고 내 글이 불특정 다수에 읽히는 건 불쾌하지 않았다. 그럴 거라면 애당초 여기에 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내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읽고 칭찬과 위로를 하니 부끄럽고 겁이 났다. 글로서의 가치보다 나 개인에게 의미 있는 글일뿐그들에게는 광고 전단지에 정도일테니 말이다. 그래서 글을 쓰지 못했다. 더군다나 붕어빵에 올린 사진은 어디서 가져왔으니 그것 또한 겁이 났다. 붕어빵을 먹을 때, 이거 글로 써야지 하고 먹은 게 아니니 사진이 있을 리 있겠는가? 붕어빵을 다 먹고 나니 글을 써야겠다 싶었는데. 그렇게 나의 짧았던 글쓰기는 끝이 났다.


  글을 쓰지 못하니 풍랑에 흔들리는 돛단배 마냥 흔들리고 마음 잡기가 어려워 길바닥에 날 더 던지게 되었다. 새벽이고 밤이고 난 길바닥에서 멈추지 않고 뛰었다. 그러다 결국 난 운동장 한복판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진 그 찰나에 하해와 같은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었을 것이다. 뚝 하는 소리가 들렸고 식은땀이 났지만, 내가 소지품을 악착같이 챙긴 걸로 봐선 허약해빠진 내 정신력만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난 5분이면 뛰어갈 거리를 자그마치 50분 동안 살 얼름을 걷는 심정으로 걸었다. 줄꾼이 줄타기를 하듯 한발 한발 신중하게 걸었다. 줄꾼에게는 발을 헛디뎌도 되었지만 난 그러면 안 되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날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걸을수록 숨이 가파지고 허리에서 시작된 통증은 위로 아래로 번져 나를 바닥으로 잡아당겼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 나를 향해 달려오는 자전거를 보면 숨을 참고 벽을 부여잡고 그 시간을 견뎌야 했다. 집에 도착했다는 안도는 금세 두려움으로 바뀌고 말았다. 난 현관에서 신발을 벗기는커녕 바닥에 누울 수도 없었다. 빠삐용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현관 바닥에 쓰러졌다. 그 길로 난 일어나지 못했고, 119 구급차에 실려 가까운 병원으로 갔다. 가는 길에 이런 일로 구급차를 불러 죄송하다고 눈물을 참으며 연신 사과를 했었다. 그렇게 인생을 견디게 해주었던 달리기마저 내뜻대로 안 되었다.


  몇 달이 지나고 다시 시작한 달리기는 무릎의 간헐적인 통증으로 일주일에 1회를 할까 말까 하고, 글쓰기는 자신이 없어 책 읽기로 바꿨다. 달리고 글 쓰는 것만큼 책 읽기는 나를 잡아주고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아빠인지 아들인지, 결혼은 했지만 아내가 없다든지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다만 이 또한 여기에만 빠져 아이와 소꿉장난은 못한다.


 며칠 전에 작년 사건이 생각나, 아이에게 요즘 아빠는 집에서 뭐하는 것 같아라고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빤 책만 읽고 놀아주지 않아라고 말했다. 미안함에 그래서 아빠 싫어라고 조심스레 묻자 그래도 아빠가 제일 좋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해주니 고마웠다. 사실 아직까지 난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아빠로서, 아들로서 정체성의 교집합을 구하지 못한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래도 우리 부녀의 관계는 아이의 밝은 기질로 인해서 흐트러지지 않고 단정함을 유지하고 있다. 아침마다 유치원 현관에서 가식의 포옹도 여전히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포옹은 부녀가 다정해서 한다기 보다는 아이에게 너무 미안한 내 마음을 그렇게 라도 전해주고 싶은 것이다. 또한 유치원에서 딸아이가 문득 남과 다른 자신을 발견했을 때, 아빠의 품을 기억하고 힘내기를 바라는 못난 아비의 간곡한 바람이기도 하다.


  봄이 되고 나니 날씨가 좋아져 유치원에서 주말 동안 꽃 사진을 찍든지, 봄과 관련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오라는 숙제를 주었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봄이 언저리만큼 왔음을 노랗게 핀 개나리와 수줍지만 당당하게 핀 살구꽃과 고귀한 자태를 뽐내는 목련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교회를 마치고 아이와 두류공원에 들러 이리저리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월요일, 못난 아빠는 찍은 사진은커녕 숙제가 있었다는 것도 잊고 아이와 포옹만 하고 유치원으로 들여보냈다. 아이 뒷모습을 보다가 그제야 생각이 나 선생님께 물어보니 내일까지라고 내면 된다고 했다. 퇴근하자마자 저녁을 먹으며 아이에게 어서 먹고 숙제를 하자고 말을 건넸다. 당장이라도 밥상을 치우고 부리나케 숙제를 할 태세로 이야기를 하였지만, 막상 밥을 먹고 나니 잠이 은하수같이 쏟아지고 한기가 들었다.

  밤을 새우며 책을 읽는 나에게 내린 저주 같았다. 그런 나에게 아이는 "피터팬"을 읽어주었다. 소리 내어 읽는 그 목소리는 영롱하기 그지없어 나에겐 엄마가 들려주는 자장가 같았다. 아이에게 춥다고 침대에 가자고 했고, 아이는 이불속에 들어간 나에게 천천히 책을 읽어주었다. 잠이 잠깐 들었는데, 아이는 진짜로 자면 안 된다고 이것도 소꿉놀이라고 눈을 부릅뜨고 단호하게 말했다. 미안한 마음에 기지개를 켜고 다시 거실 식탁에 앉았는데, 식탁 한편에 덩그러니 놓인 숙제 종이가 보였다.


  다시 다급해진 난 사진이라도 뽑아서 붙여야겠다고 말하며 책상에 앉아 포토전용 프런터 기를 켰다. 몇 년 만에 켜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작동방법을 잊었는지 휴대폰의 애플리케이션이 프린터기를 찾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해도 안 되어 설명서를 읽으며 아이에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그렇게 20분 정도를 끙끙 앓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아빠, 숙제 다했어라며 종이를 나에게 내보였다. 그곳엔 아이가 교회를 마치고 들렸던 두류공원의 봄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녀석이 보았던 봄이 상상의 세계로 종이에 다시 그려진 것이다. 따뜻한 봄 햇살, 만개한 꽃, 싱그런 나무, 어디에선가 보고 싶었을 나비, 그리고 한글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맞춤법이 틀린 진솔한 이야기를 하얀 A4 종이에 담았다. 너무 기쁜 나머지 연신 녀석을 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해주었다. 그리고 냉장고에 가서 초콜릿을 꺼내 주었다. 나의 기쁨이 녀석에서 온전히 전해졌는지 그 순간 아이의 눈엔 내가 아빠로서 보였을 것이다. 그런 날 보신 어머니 또한 그 순간만큼은 길을 잃은 양이 아닌 오롯이 내 길을 찾아 걷고 있는 손녀의 아빠였을 것이다. 작가 김훈이 <라면을 끓이며>에서 인용한 신경준의 "길에는 주인이 없어서 그 위를 걷는 자가 주인이라."라는 말처럼 그 순간만큼은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에서 난 주인이었다. 내 안에서 솟아나는 정신적 자아는 아빠였고, 더 이상 길바닥에서 어슬렁거리는 길을 잃어버린 영혼이 아니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고 나니, 미친 독서의 여파인지 다시 피로가 나를 엄습하였다. 그 피로를 금세 알아채는 건 어머니의 본능일 것이다. 아들이 매일 밤늦게 자는 것이 못마땅하셨겠지만, 그 마음을 아시기에 그저 묵묵히 바라만 보셨던 분이다. 그런 어머니가 나에게 오늘은 목욕이나 다녀오라고 하셨다. <목욕탕>에서 밝혔지만, 나의 어머니는 목욕탕이 민간요법 중에서 가장 효과가 좋은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하신다. 며칠이 아닌 십 수일을 밤을 새우다시피 책을 읽었기에 피곤하여 목욕을 가고 싶었으나, 또 밤에 나간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싫어 망설였다. 갈까말까 고민하며 어머니께 안 간다고 말씀을 드리니, 오래간만에 가서 때도 밀고 땀도 흘리고 오라고 하셨다. 그러면 저녁에 일찍 잠들 수 있을거라는 그 간곡함에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갔다 와도 되냐고 묻고 말았다.

  그런데 아이는 좀 전의 흥분이 남아있는지 평상시와 달리 "아빠, 다녀와 그리고 잠깐만 아빠한테 줄게 있어."라며 분홍색 공주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주었다. 그리고 식탁으로 달려가 난 한글 공부하고 있을 테니 얼른 다녀오라고 손짓을 했다. 내 아무리 무늬만 아빠일지는 모르나, 그 순간 녀석이 한글 공부를 하려고 하는 건 잠자기 싫어서이고, 아빠가 옆에 있으면 분명 때 쓰는 게 안될 테니, 아빠를 목욕탕에 보내고 할머니와 타협을 보려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녀석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고, 어머니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아무것도 한 건 없는데, 왠지 아들로서도 아빠로서도 무언가를 했는 것 같았다. 순간 이런 작은 행복들이 아빠로서의 나와 아들로서의 나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내를 대신해서 두개의 자아를 이어주는 매개체 말이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그럼 아빠 다녀올게, 할머니께 책 2권만 읽어달라고 하고 먼저 자!라고 말하고는 집을 나섰다. 밤공기가 선선하게 불어오는데 그 바람은 따뜻했다. 내가 기다리던 연인의 봄은 아닐 테지만, 봄은 이미 내 마음 언저리에 도착한 듯했다. 주머니 속에는 아이가 준 동전이 만져졌다. 하나, 둘, 셋, 아이가 손에 쥐어준 300원을 만지며 걸었다.

  딸아이 숙제를 보고 뜨거운 탕에 몸을 불리며 생각했고, 몸에서 죽은 각질이 떨어지고 살아있는 피부가 올라오듯, 내 삶도 아내 대신에 아이로 가득 채워지길 소망한다.



  정신없이 다 쓰고 보니 2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 어제보단 빠르지만, 눕는다고 바로 잠에 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요 며칠 작가 김훈의 글을 읽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는 것들을 그의 연필을 빌려 베껴 쓴 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알고 있다. 좋은 글은 사실을 진실되게 쓰는 거라고. 그래서 그 믿음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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