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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Apr 04. 2016

나에게 독서란 여전히 지루하고 난 그곳에서 지독하게 비루하다.

  <일기와 수필 사이>

  3월 말에 일필휘지(一筆揮之)라고 생각하고 쓴 글인데, 읽어보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유머도 감동도 없다. 애석하지만 몇 번을 다시 읽고 고쳐쓰기를 하고 나니, 며칠이 흘렀다. 그래도 맘에 안 들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싶다. 고치다 보니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내용이 바뀌었다. 나는 항상 내 글이 자기연민은 아니었으면 한다. 그럼에도 나는 즐겁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읽어주실 분들에게는 나의 신변잡기에서 그것이 연민이 되었든, 기쁨, 행복, 슬픔 그 무엇을 찾으셨더라도 상관없다. 그저 읽어주셨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참 감사하다.



  교사로서 가장 바쁜 시기는 아마 학교가 개학하는 3월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일반 직장을 다니는 친구들에게 바쁘다는 말을 잘 안 한다. 괜히 했다가 배부른 소리하는 공무원으로 몰리고 말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을 고려하더라도 1년 중 몇 차례는 바쁠 때가 있다. 시험문제 출제, 성적처리, 진학 및 졸업, 상담기간, 공개수업, 각종 학생 출전 대회 등 말이다. 이런 것들이 연간 고루 분포되어 있으니 '나도 연중 바쁘다.' 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야근을 벗 삼아 나와는 멀찌감치 멀어진 친구들에게 몰매를 맞기 십상이다. 여하튼 3월은 학급, 학년, 학교 교육과정 수립, 상담 및 공개수업, 각종 부서별 업무 계획 수립 등으로 비교적 바쁜 시즌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3월에는 교사들끼리 의례적으로 "3월이라 바쁘죠? 4월쯤에 밥이나 먹읍시다."라고 인사를 하기도 한다. 그러니 이 바쁜 와중에 여유롭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다지 올바른 선택이 아니고 설사 읽으려 해도 실천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읽었다. 그것도 평상시 대비 반년치 정도의 책을 읽었다.

  개학 전날 여유롭게 시작한 독서는 개학과 동시에 치열하게 바뀌었지만, 잠이 부족하다는 것 말고는 힘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두어 장, 점심 먹고 서너 장, 저녁 먹고 아홉 시 넘어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여 잠들기 전까지 읽었다.

  솔직히 나는 글을 빨리 읽는 편이 절대 아니고, 그렇다고 활자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독해력은 평균치를 하회 한다. 그러나 노력은 능력에 정비례하지 않는다. 어떤 날은 꾸벅꾸벅 졸면서 책을 읽었는가 하면, 어떤 날은 회식을 다녀와 취기가 가시기 전에 그 기분 그대로 읽기도 했다. 출장이 있는 날은 책을 읽기 위해서 지하철을 이용하였고, 가끔은 온 가족이 잠든 고즈넉한 밤에 책은 읽지 않고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었다. 그렇게 책을 읽었다.


  그런데 3월에 딱히 무슨 이유가 있어서 평상 시보다 훨씬 많은 책을 읽은 건 아니다. 평상시 즐겨하던 달리기랑 글쓰기를 할 수 없어서, 마음이 곤고하여 위로받기 위해서, 유난스럽게 가져다 붙일 이유는 아주 많지만 무엇 하나 이것 때문에 읽었다고 할만한 건 없다. 그냥 읽었다. 속되게 보일지 모르나, "산이 거기에 있어 오른다."는 한 산악인의 유명한 말처럼 난 "책이 있어서 읽었다."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러니 나에게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책이 마냥 재미가 있어서 또는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가끔은 가슴 설레는 문장을 만나 행복한 찰나(특히, 설국의 첫 소절이 그러했다.)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따위 책을 고전이라고 칭하는 무리들을 욕하기 바빴다. 그러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는 여운이 남아 혼자서 독후감을 쓰고 나의 무지몽매함을 포장하는 자기기만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니 나의 경우는, 독서가 재미있기는 하나 재미있어서 책을 읽었다고 하기 어렵다. 또 유익하기는 하나 유익해서 읽었다고도 못하겠다. 그저 책이 있어서 읽었다가 맞을 테다.

  그러나 그저 책이 있어서 읽었다는 건, 목적이 없는 행위다. 그건 허무이며 기만이다. 빈자들의 엄마였던, 마더 테레사 또한 그녀의 숭고한 희생에 보편적 사랑이라는 목적이 있지 않았던가. 목적의 가치를 떠나 반드시 행위에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도 눈이 퀭해지며까지 책을 읽었던 것이지. 다만 여기서 나는 나의 급작스런 독서를 하게 된 행위의 까닭에는 그다지 이유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있으나, 행위를 일으킨 의지나 까닭은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행위가 있었으니 결과의 발생은 당연지사이다.


  산이 거기에 있어 오른다는 산악인은 산을 올라 그것이 돈이든, 건강이든, 명성이든 무언가를 얻었을 건데, 나 역시 얻는 게 있어야 될 것이 아닌가. 얻는 것도 없이 눈그늘만 쳐져있으면 책을 뭐하러 읽겠는가. 내가 무슨 도가사상의 노자나 장자도 아니고 말이다. 나는 어느 누구와 비교해 보아도 아주 세속적인 인간인데.


  그렇다면 난 책을 읽고 무엇을 얻었는가. 내 주변의 사물을 꿰뚫어보는 통찰과 삶의 전반을 볼 수 있는 성찰,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책을 읽으면서, 유레카를 외쳤던 아르키메데스의 기쁨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굳이 꼽자면, 그냥 책 한 권을 다 읽었다는 자기만족 정도이다.예전에는 오백 쪽이 넘어가는 책이나 어려운 책은 읽다가 금세 지치고 이내 포기했다. 그러나 근래의 경험으로 지금은 어떻게든 읽어내려는 억지 같은 게 생겼다. 바로 책을 읽는 근육이 조금 발달했다. 억지가 먼저 생겼는지 근육이 먼저 발달했는지는 모르겠고, 중요하지 않다. 책을 읽어가며 나도 의식하지 않은 사이에, 독서 근육이 발달하였고 그 덕분에 매번 읽다가 포기했던 책들을 완독 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번에 읽은 책 중에 <인간의 굴레에서>, <달과 6펜스>, <1984>는 몇 해 전부터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의 창작물을 내가 만몇천원의 돈을 지불하고 엿본다는 것이지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난 그저 활자를 읽어낼 뿐이었고, 작가에게 돈만 지불했지 감히 엿볼 수가 없었다. 그랬던 책들을 이번엔 읽었다. 읽으면서 내내 즐거웠다거나, 손에 땀을 쥘 만큼 푹 빠져 들었다거나, 다 읽고 나서는 가슴속이 후련해진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소가 논밭을 쟁기로 갈듯이, 그냥 묵묵히 읽었다. 그러고 나니 즐겁지 않더라도 읽을 수 있는 능력, 독서 근육이 조금 발달한 것 같다.

  독서 근육의 발달은 완독의 기쁨을 선물해 주었고, 완독의 기쁨은 다시 독서 근육의 발달을 가져온다. 달리기로 치자면 아직 마라톤은 무리고, 5km 정도를 완주하고 심폐지구력이 향상되었다고 보면 된다. 완주의 경험은 심폐지구력의 향상을 가져오고, 심폐지구력은 완주할 수 있도록 하니 상호 상승을 가능케한다. 독서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삶의 허무와 결핍, 고독한 문학 세계 속에서도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며 자유업을 선택한 무라카미 하루키와 달리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서글픈 현실 속에서 나는 자유롭지 않다. 낮에는 일을 해야 하고 저녁에는 아이랑 잠깐 놀고, 책을 읽거나 컴퓨터 자판을 툭툭 건드리거나, 아님 여자 사람 친구라도 만나야 하는데, 돈과 시간 그리고 능력이 따라주지 않으니 말이다. 자유업으로 아무 눈치 안 보고 살아 좋다는 하루키의 삶은 그의 능력에서 기인하는 개별성이 있으나, 난 그에 비해 보편성을 가진 사람이다. 돈과 능력은 차치하고 시간은 내가 조절할 수 있으니 결국 난 수면 시간을 줄이기로 했다. 처음에는 상당히 고역이었다. 아침에는 눈이 잘 떠지지 않고, 저녁식사 후에는 식곤증으로 잠시 잠을 청해야 했고, 저녁엔 눈그늘을 늘어뜨린 채 책을 봤다. 나는 잠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 이르고 말았고 결국 학교에서 사고를 하나 치고 말았다.

  학년 부장 교사로서 학생들 현장체험학습을 계획하던 중 공문서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그 바람에 행정실에서는 나로 인해 곤혹스럽게도 일을 다시 해야 했다. 담당 주무관이 사색이 되어 나에게 핀잔을 주었는데, 무안했지만 나로서도 답답하기만 했다. 내가 대신 해결할 수 없으니,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곤 고개 숙여 사과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런데 핀잔이 면박이 되고 그것이 거듭되니, 내가 횡령을 한 것도 아니고,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이리 면박을 줘도 되는가 싶으며, 사람의 생명이 오가는 전쟁터에서도 실수는 생긴다고 자위하고는 끝내는 내 잘못마저 새까맣게 잊고 말았다. 앞에서는 죄송하다, 면목이 없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를 떠올렸으니 내 모습은 실로 당나라 현종 재위 시 이임보(양두구육:羊頭狗肉)와 다를 바가 없었다.

  책을 읽으며 독서 근육은 키웠는지 몰라도, 여전히 글은 글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따로 노는 것이었다. 지행(知行)이 합일(合一)을 이루지 못하니 구태어 시간을 내어 읽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책은 실컷 읽어놓고 나의 잘못은 온데간데없으니 말이다.  

  고작 몇 권 아니었지만 책을 읽고 세상을 바라보는 혜안이나, 고매한 인격을 바라는 건 아주 가당치 않다. 그러나 책 몇 권 읽었답시고 건방지고 시답잖은 인간이 되어버리니 이건 또 무슨 인과관계가 이럴까. 심지어 주변 사람에겐 이 바쁜 시기에 일은 제대로 안 하고 책을 가지고 다니는 나의 모습이 무척 가증스럽거나 위태 위태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하여 나에게 독서란 여전히 지루하고 난 그곳에서 지독하게 비루하다.


책이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나는 나의 비루함을 스스로 알기에 계속 책을 읽어볼 참이다. 다만 책을 읽었다고 건방지고 시답잖은 언행을 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무슨 지식인처럼 책을 손에 끼고 다니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그러려면 작은 책 전용 가방을 하나 사야 하는데, 이달에만 주변의 결혼식이 네 건이니 지갑 열기가 두렵다. 더군다나 워낙에 까다로워 마음에 딱 드는 가방을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글을 마무리하며 근래에 읽은 것 중에 가장 좋았던 책을 소개한다.

  책을 읽으면서 단락단락을 잘라 행간의 의미를 찾는 것을 비평이라 한다면 내가 쓴 글은 말 그대로 독후감상문에 지나지 않으며, 감히 북리뷰나 서평이라고 하기에도 진심으로 부끄럽다. 뭐 그리 구분하는 게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그리고 나 좋으라고 읽은 책을 사진 찍어 대문에 거는 거며, 나 좋으라고 쓴 글을 이렇게 나누는 건 무슨 심보인고 하니 나 이만큼 읽었소 하고 자랑하고픈 내면의 욕망이 있다는 것을 숨길 수 없다. 그렇지만 좋은 책을 읽고 나니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지는 건 어떤 까닭일까. 부디 나의 독후감은 무시하고, 이 책을 통해서 일, 돈, 사랑, 육아는 잊고 망중한을 누리시길 바란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 https://brunch.co.kr/@skyhope61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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