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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Mar 14. 2016

농담

이 책이 출판된지도 반세기가 넘었을 텐데, 여전히 그 농담은 유효한듯하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농담으로 쓴 편지가 화근이 되어 인생의 방향이 다르게 흘러간다면 어떨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고 계획한 인생대로 살기는 어렵다. 대부분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는 무관하게 흘러갈 것이고 어떤 이들은 운 좋게 얼추 비슷하게는 살아갈 것이다. 아니면 중간중간 방향을 수정하며 마치 자신이 그것을 모두 계획한 듯 착각하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인생을 살게 되는 남자가 여기 있다. 여기라고 하니 마치 나 같지만,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이야기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잘 알려진 밀란 쿤데라의 처녀작 "농담"은 농담으로 인생이 달라진 남자의 사랑과 다소 웃지 못할 복수극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루비딕과 그의 주변인인 야로슬라브, 헬레나, 코스트카 4명의 화자가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솔직히 말해 나 같은 교양 독서인으로서 처음엔 읽어내기 어려웠다. 화자의 독백이 다소 많아 그 생각을 읽어내기가 어려웠고 체코의 시대적 상황을 몰라 찾아보며 읽어야 했다. 그래서 글자만 읽어내는 상황, 말 그대로 활자를 읽어내기만 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며 지나가기를 수십 차례 겪었다. 아차 싶어 다시 돌아가 읽어보아도 쉽게 다가오지 않는 부분이 꽤 많았다. 원래 고전문학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럼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건 이야기 구성의 치밀함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문학적 비평과 대중의 수용을 모두 이끌어낼 수 있었나보다.


  "농담"은 루비딕이 고향인 모라비아로 돌아오며 시작된다.


  여러 해 동안 나를 내 고향으로 이끌어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 도시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 같았다. 벌서 15년부터 다른 곳에 살고 있었고, 이곳에는 이제 아는 사람도 친구도 몇 없었던 것이다(남아 있는 친구도 피하고 싶다). 어머니도 내가 돌보지 않는 낯선 무덤 속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내가 무관심이라 불렀던 것은 실은 원한이었던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른 모든 도시에서나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서도 좋은 일 나쁜 일들이 내게 일어났던 것뿐이었는데. 아무튼 원한이 있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그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를 이곳에 오게 한 일, 그 일은 어쨌든 프라하에서도 충분히 실행할 수 있었는데, 내 고향에서 그 일을 수행할 기회가 주어지자 느닷없이 억누를 수 없는 유혹을 느꼈던 것이다. 바로 그 일이 추잡하고 저속한 일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p.9-10


  15년간 찾지 않았던 고향, 그는 무언가를 계획하였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그에게 갚을 빚이 있는 고스트카의 의도하지 않은 도움으로 그 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헬레나, 그녀는 남편을 두고도 간절히 다른 남자, 루비딕을 만나고 싶어 한다. 도대체 무슨 사이일까라는 궁금함을 가질쯤, 나는 15년 전 루비딕을 만나게 된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마르게타.


  잘 생각해 보면 나도 실은 마르케타가 주장했던 것 하나하나마다 모두 같은 의견이었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서유럽의 혁명을 믿고 있었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 나는 그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는데 그녀는 만족스럽고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엽서를 한 장 사서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충격을 주고, 혼란에 빠지게 하려고) 이렇게 썼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빅 p.51


 자신보다 공산당 연수에 심취한 20살의 마르케타에게 화가 난 21살의 루비딕은 그녀에게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고 건전한 정신은 악취를 풍긴다며 마르케타를 도발한다. 사랑하는 남자는 잊어버리고 공산당 연수로 공산당원으로서의 건전한 의식을 쌓아가고 있는 그녀가 그는 얄미웠을 테다. 사회주의 건설에 반드시 필요한 낙관주의마저 마르크스가 말한 종교는 인류의 아편이라는 문구를 빌려서 비난한다. 마지막에는 트로츠키 만세라고 일침을 가하기까지 한다.

  체코는 소련에 의해서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을 받게 된다. 그리고 체코에는 소련 공산당이 들어오게 되는데 당시 소련에는 스탈린주의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루비딕이 만세라고 외쳤던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와는 달리 소련을 후진국으로 보며 세계적인 공산주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결국 그는 당의 제명과 국외 추방 그리고 암살된다. 그런 그를 지지했으니 아무리 농담이라고 해도 당시 소련에 의해 해방을 받은 체코인들에게는 천인공노할 죄로 보였을 테다.

   

  이 모든 것이 내가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근본적인 이유는 그녀가 나의 지평 안에 있는 유일한 여자였다는 것, 여자 친구 없이 혼자 지내는 내 상황이 견딜 수 없다는 데 있다. 하지만 마르케타는 내 편지들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p.52

 

 하지만 루드빅이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21살의 남자이기에 마르게타가 유일한 여자이며 그녀 없이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감안한다면 그는 공산당 연수에 심취해있는 그녀를 도발하기 위해 스탈린 욕까지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심코 한 농담으로 인해 당에서 축출되고 탄광으로 가게 된다. 더군다나 도움을 줄 거라고 굳게 믿었던 친구 제마닉의 배신은 그를 더 안타깝게 만든다. 사실 난 여기까지 읽으면서도 크게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배경지식이 부족했기에 내용 파악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저 줄거리를 파악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15년 전 루비딕의 이야기가 끝나고 복수를 위해 돌아온 고향에서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거침없이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읽으면서 내내 알 수 없었던 인물들과의 관계가 하나둘씩 밝혀지면서 이야기의 진행도 점차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것이 바로 나와 같은 대중의 수용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구성의 치밀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둘씩 그 베일이 밝혀지자 흥분되기 시작했다. 마치 관심 있는 여자의 문자를 주고받는 긴장감과 두근거림으로 끝까지 재미있게 읽었다.


  15년 전의 어처구니없는 농담으로 삶의 방향이 달라진 그는 복수마저 다소 농담에 비등할만한 것으로 계획한다. 그는 자신의 복수를 추잡하고 저속하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헬레나의 마지막 해프닝은 민망하기 그지없다. 밀란 쿤데라는 당시 전체주의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마디 농담으로 인생의 방향이 틀어진 남자의 불행을 다루면서 오히려 우리의 인생이 복잡하고 무거운 것이 아니라 다소 "농담"처럼 간단하고 가벼운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또한 무거웠던 사회적 풍토와 전체주의를 비꼬기 위해 가벼운 농담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농담만큼 권위에 쉽게 도전할 수 있는 도구 또한 없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밀란 쿤테라는 당시 체코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쓸데없이 이념을 가르고 그 잣대로 칼질을 하는 인간들을 비꼬기 위해 농담을 했을 테다. 이 책이 출판된지도 반세기가 넘었을 텐데, 여전히 그 농담은 유효한듯하다. 시대가 변하여도 그런 대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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