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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Mar 15. 2016

수레바퀴 아래서

우리는 한스 기벤트라의 자화상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에 대한 소회를 담담하게 쓴 칼럼에 대한 뉴스를 읽은 적이 있다. 그전까지 그가 누구인지 몰랐고 그리고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지만, 그가 기고했다는 글의 몇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그를 알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미국의 의과대학교수이자 다양한 책을 집필한 올리버 색스였다.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 1km 이상을 수영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였다지만 그의 삶은 거기까지였다. 9년 전 수술받았던 안구 흑색종이 간으로 전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기고했다는 글의 마지막 부분은 이랬다.


  무엇보다 저는 이 아름다운 지구에서 지각이 있는 존재였고, 생각하는 동물이었습니다. 이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모험을 즐겼다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이 분리될 수 없고, 오히려 때로는 죽음이 오히려 삶보다 더 장엄할 때가 있으며 종국에는 삶은 죽음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살았다는 건 특권"이라는 올리버 색스 교수의 말은 인생의 여정을 잘 마쳤다는 감동의 고백처럼 들렸다.

  하지만 우리에게 죽음이란 동네 불량배처럼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운명이다. 그 역시 죽음 앞에서 무서웠다지만 "두려움" 보다는 "감사"이 더 컸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충분히 사랑을 했고, 사랑을 받았고, 많은 것을 베풀었고, 받았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늘 사람과 사랑으로 소통하였던 걸로 보인다. 감히 누군가의 생애를 섣불리 판단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의 삶은 행복했을 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이 죽음의 문턱에서 그런 말을 남기고 싶지 않을까?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면서 나는 계속 올리버 색스 교수가 떠올랐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알려진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인 한스 기벤트라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그는 학생으로서, 아들로서 사랑을 받기보다는 학교, 가정 그리고 사회의 일방적인 요구에 맞춰야만 했다.


  학교와 아버지, 그리고 몇몇 선생들의 야비스러운 명예심이 연약한 어린 생명을 이처럼 무참하게 짓밟고 말았다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 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는가? 왜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버리고, 라틴어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료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는가? 왜 낚시하러 가거나 시내를 거닐어보는 것조차 금지했는가? 왜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 뿐인 하찮은 명예심을 부추겨 그에게 저속하고 공허한 이상을 심어주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응당 쉬어야 할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는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길가에 쓰러진 이 망아지는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P. 172, 173


  한스 기벤트라의 모습은 작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젊은이의 모습과 흡사하다. 기성사회의 무게에 눌려 힘들어하는 다포 세대의 젊은이, 꿈과 이상을 꿈꾸기보다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 맞춰서 살아가려고 하는 학생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헌신만 강요당하는 가장의 모습은 이 시대의 한스 기벤트라 라고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한스 기벤트라의 자화상일 것이다.

  삶이란 어렵고 긴 여행과 같다. 혼자서 아무리 열심히 가려고 해도 쓸쓸하고 어려운 아주 길고 긴 여행이다. 쉬어 보이는 인생은 있어도 쉬운 인생은 없다.

  어차피 가야 할 인생에서 수레 내지는 말이 되어 힘차게 나가야 한다. 그래서 한스 기벤트라처럼 삶의 무게에 지쳐 쓰러지지 않고 삶의 마지막에 올리버 색스 교수가 말한 것처럼, 축복이 넘치는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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