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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May 09. 2016

나무 한 그루

내 집 앞마당에 치자나무를 심어야 할지, 이름 모를 나무를 심어야 할지.

<일기와 수필 사이>

맥주를 마시고 책을 읽더니, 이제는 맥주를 마시고 글을 쓰네요. 헉..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커피를 마시면 잠을 잘 못 자는 건 둘째이고, 사리분별이 안 된다. 예전에 커피를 즐겨마시던 사람이랑 같이 살았는데, 저녁에도 커피를 가끔 마셨다. 그래서 나 역시 같이 마셨는데, 그때는 괜찮았던 것 같다. 늦은 밤에 한잔을 마시더라도 잠마저 잘 잤었다. 그러니 그때는 사리분별 역시 문제가 없었다.

커피의 무엇이 좋았던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무엇보다 내가 커피잔을 들고 있는 모습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런데 커피를 마실 때는 절대 달콤한 시럽을 넣지 않았다. 그리고 헤이즐럿 커피도 마시지 않았다. 또 달콤한 캐러멜이 들어간 것이며 생크림이 올라간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무조건 그냥 커피였다. 로스팅되어있는 커피 원두를 곱게 갈아서 뜨거운 물에서 그 원두의 진액을 뽑아낸 에스프레소에 물의 희석하여 만든 그냥 커피가 제일 좋았다. 그렇게 고집스럽게 그냥 커피를 10년 넘게 마시며 커피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던 참에 커피를 그만 마시기로 하였다.

이유라면 그냥의 커피를 좋아하던 사람이 커피를 마실 수가 없어, 나 역시 마시지 않았다. 그렇게 1년가량을 마시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한 가지에 빠져있다 보면, 어느샌가 몸에 인이 박히게 된다. 특히 음식은 더 그러하다. 인이 빠지기 전에는 금단현상이 있기 마련인데, 당시 나의 생활에는 금단현상을 겪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인이 자연스럽게 빠졌다. 물론 난 그 인이 빠졌는지 내가 커피를 좋아했는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 커피 인이 빠졌구나. 그것도 자연스럽게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되었구나.'라고 느낄 뿐이다.


어느 날, 차를 마실 기회가 생겼는데 동행한 사람이 나에게 홍차를 권했다. 이 집 홍차가 대구에서 아주 유명하며, 그래서 즐겨마신다고 몇 차례 이야기했던 참이라 궁금했었다. 그래서 묘한 기분에 흔쾌히 홍차를 마셨다. 그런데 맛이 커피와 사뭇 달랐다. 달았다. 난 단 게 싫었다. 그냥의 커피가 좋은 것은 달지 않고, 그 쓴 맛이 목구멍에 넘어가며 식도를 아주 부드럽게 자극시켜주는데, 그분의 홍차는 달콤하고 부드러워 내 입맛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우유를 타서 마셨던 것 같은데, 이건 어른이 마셔서는 안 되는 어린아이의 분유 같은 밍밍한 맛이었다. 그렇게 홍차를 마셨다. 그런데 이상하게 맛과 향에는 매료가 되지 않았음에도 이상하게 볼이 발그스레지고 혈관이 넓어지며 심장이 쿵쿵거리지 않는가. 이건 마치 익명의 여성과 묘한 연관성을 찾고 그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주거나, 내가 그 사람을 남달리 보게 될 때 느끼는, 그러니깐 입술의 맞닿을 때 느낄 수 있는 그것이었다. 그 기분이 좋았다기보다는 흥분되었다는 게 더 적절할 만큼 참기 힘든 기분이었다.

그때 나는 홍차라는 것은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다음에는 커피를 마셔도 묘하게도 그 흥분이 재현되었다. 그냥의 커피든, 봉지커피든 매한가지였다. 몇 달간 몇 차례 마셨던 것 같은데, 반복이 되다 보니 곰같이 둔한 나도 그 이유가 궁금하였다. 그렇지만 궁금하다고 초록색 포털 사이트에 내 사연을 올리고 내공을 준다고 물어볼 수 없으니 그저 그런가 보다 했었다.


학교 일이라는 게 아주 가끔은 피곤을 몰고 올 때가 있는데, 그게 3월이다. 1학기를 활기차게 시작해야 1년이라는 교육과정 운영이 평탄할 텐데 그 시작 곤혹스럽다. 이거에 저거에 중구난방이다. 교육청이라는 곳은 매년 새로운 것을 만드는 창의적인 업체인가 본데, 그래서 매년 시책을 수립하여 학교에 보내준다. 그러면 그걸 교육과정 이곳저곳에 쑤셔 넣어야 한다. 넣다가 보면 이거 작년에 했던 건데, 이름만 다른 것 같고 내용은 비슷한 것 같은데 싶기도 하고, 몇 해 전에 했던 건데 잡음이 많아 없어졌던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여하튼 그 창의적인 시책을 학교, 학년 교육과정에 교묘하게 넣다가 보면 한두 주는 잠을 설쳐야 한다. 그 일을 누가 하냐면 학교의 연구부장이나 학년의 교육과정 연구담당 교사가 한다. 난 항상 후자였다.

지금 기억이 맞을 건데, 밤을 설치고 출근한 그날 피곤한 마음에 교무실에 들러 냉장고 문을 열었다. 여담이지만 나는 교무실 출입에 부담을 가지지 않는다. 냉장고 문도 벌컥벌컥 열어 본다. 예전에 처갓집에 가서 냉장고 문을 벌컥 열면, 장모님은 "이서방, 배고픈가?"하고 물어보셨다. 그러면 옆의 처형들은 웃으면서 "제부는 참 신기해. 우리 집에 장가 온 여섯 남자 중에서 냉장고 문을 여는 사람은 제부 밖에 없어."라며 말했었다. 나는 냉장고 문을 여는 것이 참 즐겁다. 이 집은 요즘 무얼 먹고 사는지 궁금하였고 궁금하다. 물론 아무 집이나 그러지는 않는다. 적어도 내가 어느 집에 가서 냉장고 문을 연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무언의 고백이다.

교무실에서 냉장고 문을 열고는 시원한 박카스 한 명을 꺼내 들고, 교감선생님께 제가 이거 마실게요. 하며 말하고 단숨에 들이키고는 교실로 가서 수업을 하였다.

아뿔싸, 수업을 해야 하는데 이게 홍차였던가, 그냥의 커피였던가, 아님 봉지커피였던가 머릿속에서 도대체 너 뭘 마신 거야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보통의 사람이라면 벌써 홍차 부분에서 그거 카페인 때문이잖아라고 하며 읽는 것을 그만뒀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아주 무딘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그제야 내가 느끼는 이 묘한 흥분감은 카페인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카페인이 든 음료를 조심한다. 카페인이 마치 어떤 성적 흥분제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에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 같은 연필"이라는 제목의 재미난 글이 있다. 한 번은 그가 잡지사의 관계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무라카미씨 F 심 연필을 보면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이 연상되지 않습니까라고 했단다. 평상시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후로 한동안 F 심 연필만 보면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이 연상이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물건에 이미지가 정착이 되면, 그다음부터는 그 이미지가 물건을 규정하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결국 연필 쥘 때마다 성욕을 자극받을 지도 모른다는 고백을 하며 글을 마무리 지었는데, 내가 비슷하다. 카페인을 마시면 이상하게 가슴이 콩콩 뛰는데 마치 사랑에 빠진 듯한 느낌을 가진다. 그런데 그 사실을 직시하고 난 다음부터는 "사랑의 묘약"이 바로 카페인 음료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걸 마시면 상대가 이졸데가 아니라도 나는 트리스탄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이 "사랑의 묘약"을 마시지 않는다. 특히, 여자를 만날 때는 말이다.

대신 그냥의 커피를 좋아하던 아이 엄마가 아이를 가지고 유일하게 즐겨 마셨던 루이보스를 마신다. 이건 마셔도 괜찮다. 마셔도 흥분이 되거나 묘한 느낌이 없이 평온하다. 카페인이 없기 때문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 글을 읽는다면, 무슨 재미로 살아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여기까지 읽었다는 가정이지만 말이다.

대신에 맥주를 가끔 마신다. 맥주는 카페인이 없어서 나를 흥분시키지는 않는 대신에 약간의 취기로 하여금 동종의 기분은 느끼되 묘약의 효과는 주지 않는다. 야, 그게 무슨 차이냐고 묻는다면. 고민이 조금 되는데.

맥주는 심장이 콩콩 뛰고 동공이 약간 풀리며 긴장이 느슨해지면서 아 내가 취기가 올라오는 구나라고 생각을 하는 반면에, 카페인 음료는 심장이 쿵쿵거리며 정신이 또력해지면서 집중을 하게 되는 것 정도이다. 사람이란 다양하니 나 같은 부류도 있단 말이다. 그걸 이해하기보다는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


내가 맥주를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이 적지 않다. 이걸 다 적으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자꾸 뒤로 밀릴 테고, 내가 유명 작가도 아니고, 나그네 같은 블로거이니 삼가고 다음 기회를 잡도록 해야겠다.

그런데 언제 마시는 게 좋으냐면, 저녁에 조깅을 마치고,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영화를 보면서, 늦은 밤 아파트 벤치에서 밤하늘을 보는 것처럼 저녁에 혼자서 마시는 것이 가장 좋다. 약간의 취기가 오른 그 느낌을 누군가와 공유하거나 간섭받는 것은 아주 별로이다. 그래서 혼자 조용히 마시는 게 좋다. 그중에서 단연 내가 손꼽는 맥주는 책을 읽으며 마시는 거다.

물론 종교 서적이나 자기 계발서보다는 재미난 소설이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시집 또는 응큼한 에세이가 맥주 안주로는 적격이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글을 읽으면 그 글자 한 자 한 자가 그렇게 소금기가 베어나는 안주가 되어준다. 재미난 소설은 감자류 과자같이 바삭바삭하고, 시집은 달콤한 과일 같고, 응큼한 에세이는 비릿한 향을 불냄새로 숨긴 고등어구이와 흡사하다. 아, 누군가가 이걸 읽고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보통 아이를 일찍 재워놓은 금요일 저녁이나 연휴를 시작하기 전날 밤에는 맥주 두어 캔을 준비하고 책을 읽는다.


이번 5월 5일, 어린이날 아이는 점심부터 저녁까지 신나게 어린이로서 대접을 받았다. 아이에게 뭐가 제일 좋았냐고 물어보니, 그 답이 참 우습다. "내 마음대로 다 할 수 있어서 제일 좋아."란다. 누가 들으면, 상당히 내가 고압적인 아빠인가 보다 할 테지만, 난 절제의 미덕을 주로 가르쳤을 뿐이었다. 그런데 녀석은 하루 종일 마음대로 해서 아주 좋았다면서 집에 와서 씻고는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어주셨다. 시간이 9시를 조금 넘겼는데, 난 지체 없이 방으로 들어가면 냉장고에서 330ml 맥주 투 캔과 잔을 준비했다. 캔맥주를 왜 잔에 따라 마시냐고 물을지 몰라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캔맥주가 병맥주와 맛이 다른지는 몰라도 이상하게 청량감이 잘 느껴진다. 그리고 잔에 따른 다음 마시면 입구가 넓어서 목 넘김이 한결 수월하다. 병맥주는 항상 마시다 보면, 입에서 맥주병을 떼고 난 다음 벌컥하고 입구 밖으로 흘러내리고 만다. 그래서 맥주는 가급적으로 캔맥주를 마셔야 하며, 이왕 마시는 거라면 잔이 준비되어 있으면 제일 좋다. 그리고 안주로는 목욕, 조깅, 영화, 야경도 좋지만 무엇보다 책이다.


요 며칠 3권의 책을 읽고 있는데, 하나는 천로역정이며, 또 하나는 오리지널스이고 마지막으로 여자는 허벅지이다. 종교서적과 자기계발서는 안주로는 부적격이나, 남녀의 습성에 관한 담론을 담고 있는 에세이는 맥주 안주로는 최상급에 해당될 터이다. 지체 없이 맥주를 한 캔 따서 잔에 거품이 3~4cm가 되고 따른 다음에 반 정도 들이키고 안주를 읽어내기 시작했다. "여자의 출격"에서는 그 순간을 대하는 여자의 곤란함, "정관수술"에서는 공포탄과 실탄, "스스럼없는 남자"에서는 중년의 무심함과 연륜, "내 사랑 조선인"에서는 같은 동양인게서 느끼는 외국인의 낯섦 따위를 내 마음대로 안주삼아 즐겁게 읽었다. 한참을 읽다가 보니 어느새 2캔을 다 마시고 말았는데, 한 캔을 더 먹으려니 진짜 안주도 먹고 싶어 지갑에서 연청색의 종이 몇 장을 급히 꺼내 주머니에 구겨 넣고 집 앞 슈퍼를 한걸음에 달려갔다. 뭘 살까 고민하며, 사장님 신당동 떡볶이 없어요?라고 물으니 찾는 사람이 없어서 들려오지 않는단다. 참나, 내가 찾는데 왜 찾는 사람이 없어라고 구시렁거리며 제대로 씹을 땅콩강정을 한 봉지 사서 급하게 집으로 돌아오다 무슨 생각에 그랬는지 아파트 뒤 벤치에 가고 싶어 졌다. 그래서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벤치로 가는데, 내가 이사 오고 4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꽃이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난 이 곳에 나무가 있는 것은 알았지만, 이 나무가 꽃을 피운다는 것도 몰랐고, 이 자그마한 나무를 볼품없이 왜 심었을까 하고 가끔 생각을 했으며, 더 정확히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나무에 꽃이 주렁주렁 피어었는데, 그 순간 매료되어 멍하니 바라보고 꽃에 코까지 대고는 킁킁거렸다. 아, 향이 예사롭지 않았다.

언젠가 단독주택에 이사를 가면 치자나무를 심고 싶은데, 치자나무가 어떤지는 전혀 모르고 그 향이 무척이나 달콤하기에 그냥 그런 생각을 가슴에 품고 산다. 그런데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나무가 내가 제일로 사랑하는 향과 비슷한 향기를 품고 있다니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아저씨가 담배를 물로 옆으로 지나가면서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술도 한잔 했겠다 싶어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그 향을 코에 주워 담았다. 그 자리에서 망부석이 되고 싶을 만큼 좋았다면 너무 심한 거짓말이겠지만 아주 마음에 들었다. 취기도 꽤 올랐었다. 어찌나 향이 좋았는지 한참을 그러고 집에 와서는 휴대폰을 챙겨 다시 내려가 그걸 찍고야 말았다. 야심한 밤에 별지랄스런 일을 다한다 싶겠지만, 난 이 나무의 꽃이 참으로 향기로웠다. 더군다나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면, 꽃망울 속에 뿜어져 나오는 향이 그야말로. 설명은 어렵지만 몇 해 전에 한번 맡에 보고 사랑하게 된 나의 치자나무와 아주 비슷하였다.


아, 내가 사람을 만나는지 궁금해하는 몇몇 사람들이 있을 테다. 묻기에는 그렇고 하니 내가 이 공간을 빌려서 말하면 만난다. 아주 가끔인데 나름의 단장을 하고 집을 나선다. 그런데 집을 나설 때의 '나를?'라는 의문형은 집을 들어올 때의 '어디엔가?'라는 의문형으로 바뀐다. 나를 좋아해줄 사람이 있을까라는 걱정을 가지고 나섰던 것은 기우였다. 내가 생각보다는 꽤 괜찮은 사람인가 보다. 웃자고 하는 소리는 아니고, 웃어도 좋은 소리다. 한때 학창 시절에 담임선생님께서 우리 반에서 누가 제일 잘 생겼니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러면 우리 반 안씨 여자애가 우리 반에서는 이씨 남자가 제일 멋지고 잘 생겼어라고 카랑카랑하게 말하곤 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그게 재미있어서 종종 그러셨다.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에는 가끔 책상 서랍에 여학생의 필체가 담긴 편지를 받곤 했다. 그 편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집으로 찾아든 적까지 있으니 나의 소싯적 연애담 치고는 꽤나 자랑거리가 될만하다. 심지어 길을 걷다가 두 번은 여중생에서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받기도 했다면 믿어지는가. 웃어도 좋지만 웃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지금의 나와는 전혀 거리가 멀지만, 사람 중에는 역변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그런데 몇 차례 사람을 만나니 그때만큼은 아니나, 내가 영 아니올시다는 아닌가 싶다. 왜냐면 나가보면, 상대의 눈빛에서 그걸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여자가 호감을 가질 때 하는 행동들이라는 글을 읽을 적이 있는데, 그 행동을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하니 말이다.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무슨 말만 하며 생긋이 웃어 주며, 무엇이든 좋다고 하며 집에 갈 생각을 안 한다. 내 나이가 서른 중반인데 그 글을 읽지 않았더라도 그 정도의 낌새를 충분히 챌 수 있다. 더군다나 걸을 때, 자꾸 옆에 붙는 바람에 내가 걸을 수가 없다.

"미안합니다. 한잔하고 글을 쓰다 보니 좀 솔직히 미친 척하고 씁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상대 여자분은 트리스탄을 만난 이졸데가 되기도 한다. 만약 내가 "사랑의 묘약"이라도 마신다면 분명 우리 두 사람은 한 쌍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래서 난 여자를 만나러 나갈 때, 절대 카페인이 든 음료를 마시지 않는다. 만약 마시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건 불 보듯 뻔한 결과를 연출할 것이니 말이다.

너무 자기기만적인 글인가, 사실이 이러하다. 그러나 더 적었다가 웃자고 하는 소리도 아닌데 웃음거리가 될 테니 그만한다. 웃는 건 상관이 없다. 하하하하하하 나도 즐겁다. 취기가 가시기 전에 글을 마무리해야 할 텐데.


그런데 그렇게 사람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여자도 "어디엔가?"는 있겠지라는 의문을 가지고 만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그분들에게서 꽃을 발견한 적이 없었다. 내가 평상시 그리워하고 좋아했던 치자나무의 꽃과 그 향기를 말이다. 이제까지 내 눈에는 그저 한 번도 꽃을 피우지 않았던 이름 모를 나무로 보였었고, 내 코에는 향기를 맡을 수 없는 나무이었다. 이 얼마나 오만한 사람인가.

그들 역시 꽃을 피우며 향기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보지 못했다고 꽃이 없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맡아보지 않았다고 향기가 없는 것이 아닌데. 분명 우리 아파트 한편에 심겨진 그 나무도 심은 사람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심은 것이고, 그 사람 역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단지 나에게는 그렇제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다.


나를 걱정하는 내 주변의 몇 사람들은 내가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하고 이런저런 조언들을 해준다. 그러다가 결국 내가 왜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곤 한다. 내가 찾는 사람은 이름 모를 나무의 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치자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는 내가 단독주택을 지어 살게 되면, 내 앞마당에 치자나무를 심을지 아니면 이름 모를 나무의 이름을 찾아 그걸 심을지 고민이 된다. 내 마음에 심을 나무마저도.


이 부박한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이런 생각 정도를 가지지 않을까?

야, 너 여자 만날 때 커피 꼭 마시고 나가란 말이야. 아주 웃기고 있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 나무 이름이 뭐죠? 궁금한데 어디다가 물어봐야 하나요? 초록색 검색 포털 사이트는 싫은데.


이 글은 쓴 건 순전히 이 책과 맥주 두어캔 때문입니다. https://brunch.co.kr/@skyhope617/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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