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는 이런 글을 절대 안쓰지요.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이지요.
<일기와 수필 사이>
나는 나의 판단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나의 발끝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가늠이 되지 않고, 나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나는 남들 앞에서는 짐짓 의연한 채 한다. 그리고 웃어준다. 그것도 쾌활하며 평온하게, 나의 불안함은 내가 해결해야 하는 것을 알기에, 아무리 지쳐 보이고 슬퍼 보인다고 누군가 대신 해결해주지 않기에, 할 수 있는 것보다 그 이상으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어본다.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자만심일까, 아니면 어른이 되고자 하는 어른아이의 치기 어린 혈기일까.
부모님에게도 이것이 자존심인지 혈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두 분에게도 그렇게 보이고 싶다. 그런데 부모님은 내가 스스로를 못 믿는 것만큼 믿지 않으시며, 내가 나를 믿는 만큼 나를 믿으신다. 그래서 부모님의 성화에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못 이기는 척하며 나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성벽이 되기도 한다. 그 성벽은 부모님의 믿음과 불신으로 만들어졌다. 내가 언젠가는 아이의 손과 다른 사람의 손을 함께 잡을 거라는 믿음과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나를 그대로 두어선 안 된다는 불신이 만들어 낸 견고한 벽이다. 그 성벽 안에서 나는 얼마든지 고귀한 척할 수 있으며, 의연한 채 할 수 있다. 자존심을 지키면서.
오늘 만나는 여자는 개띠냐, 돼지띠냐?
궁금하세요? 그나저나 아버지는 쉬는 날인데도 바쁘신가 봐요?
쉬는 날에도 아버지는 바쁘시다. 나의 기억이 맞다면, 아버지의 달력에는 휴일이 없었다. 직장을 다니시던 아버지는 97년쯤 출근할 곳이 사라졌다. 회사는 그대로 그곳에 있었지만, 그곳은 더 이상 아버지의 직장이 아니었다. 회사는 그간의 땀과 노력을 숫자로 계산해주었다. 많지 않았지만 모아두신 돈을 더 하여 친구들과 동업을 하셨고, 혼자서 크고 작은 일을 몇 차례 시도하셨다. 텔레비전과 뉴스에서의 세상과 달리 나는 달라진 게 없었다. 전쟁이 나거나 흉년이 든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학교를 안 보내주신 것도 아니고, 용돈을 줄이시지도 않았다. 오히려 해를 거듭할 때마다 용돈은 조금씩 올라갔다. 유일하게 달라진 건, 97년을 기점으로 수학여행지가 제주도에서 설악산으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갔다는 것이다. 어디에선가 분명히 규모가 큰 지진이 발생했지만, 잔물결만 일렁일 뿐 파도는 없었다. 쓰나미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방파제요, 자식을 보호해준 성벽이었다. 그래서 그때도 친구들에게 자존심을 구길 필요가 없었던 건, 아버지의 바쁜 달력 덕분이었다.
쉬는 날 없이 바쁘셨던 아버지는 그간의 일들을 정리하시고, 지금의 일을 시작하셨다. 벌이는 많지 않지만, 그럭저럭 하실 만하고 괜찮다고 하신다. 사실 한 번도 나에게 안 괜찮은 적은 없으셨다. 나이가 드셔서까지 여전히 무언가를 하셔야 되는 그 태생적 고행에는 죄스럽지만, 그래도 집에만 계시지 않고 바쁘시다는 것에는 안도감을 가진다.
이런 아버지의 삶에 어머니는 장녀로서 묘한 동질감을 가지면서 한편으론 아내로서의 피곤함은 감출 수가 없어 보인다. 너희 아버지는 원래가 바쁜 양반이다. 쉬는 날인데 잠이나 주무시지, 새벽에 일어나서 보니 식탁에 밥그릇 하나만 있고 사람은 온데간데없다. 시장에 가서 장도 봐야 하고, 날이 좋아 이불도 털고, 손녀 옷도 사러 가려고 했는데, 뭘 시킬까 봐 일부러 일찍이 나가신 게 틀림없어,라고 하시니 말이다. 내가 봐도 그러신 거 같다. 내가 서른 넘어서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선생 노릇과 간간히 하는 책 읽기 밖에 없는데, 고희를 몇 해 앞두고서도 모든 일을 스스로 하시려니 그 피로감은 무디신 아버지에도 꾀를 내시게 만드나 보다.
너희 아버지가 토끼띠라서 그런 게야.
아버지는 거창 양민학살이 벌어졌던 해에 태어나셨다. 이념의 차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던 그 시절, 잘 사는 것보단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부지런하고 바쁘게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가 토끼가 한참 먹이를 찾아서 굴 밖을 돌아다닐 시간에 태어나셨다고, 그래서 한평생 바삐 사셔야 할 팔자라고, 아버지의 꾀에 어머니는 결국 그렇게 피곤함을 드러내셨다. 그게 무슨 해괴한 논리냐고, 웃으니 오래간만에 아들의 웃음에 신이 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아들인 나는 닭띠인데 닭이 할 일을 다 하고 모이를 먹는 시간에 태어나서 내 팔자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자꾸 학교 그만 나간다는 생각 말고, 착실히 학교 나가서 선생 노릇이나 열심히 하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와 띠가 같은 어머니는 닭이 우는 시간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처럼 열심히 살아야 할 팔자였단다. 그래서 한평생 동생들 뒷바라지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랐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한국전쟁과 이념의 학살 속에서 살아남고, 극빈의 삶 속에도 생명의 불씨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 세대의 태생적 고난일 뿐일 텐데, 연신 두 분이 바삐 살았던 것은 다 그 시(時)에 태어나서 그렇다고 하셨다.
노년엔 몇 번의 풍파를 겪고 나서는 더 이상 바삐 살기 싫어 다 내려놓긴 했지만, 어머니 여전히 바쁘시다. 밖으론 아버지, 안으론 어머니, 지금의 나같은 이가 누리는 여유는 우리 부모님에겐 사치에 지나지 않을 듯하다.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일 테니 말이다.
바삐 사셨던 그 모습은 지금 손녀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볼 수 있다. 시장에서 내 딸아이 옷을 한번 사 오시면, 그걸로 끝이 아니다. 사 오신 옷을 손녀에게 입히고는 앞과 뒤 그리고 옆의 태를 확인하고, 그 다음날에 다시 가서 치수를 교환하시고, 저녁에 다시 입히시고 또 한번 색상을 교환하며 또 다른 한벌을 사 오신다. 그리고는 사 오신 옷의 치수와 색상을 고민하시며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다. 너는 바쁠 테니, 아버지 쉬는 날에 옷 바꾸러 시장에나 가자고 해야겠다,라고 말이다. 만오천짜리 옷 한 벌에 드는 수고는 그 값을 훌쩍 넘어 아이에게 사랑으로 덧입혀진다. 그것마저 우리 어머니에게는 닭이 태어난 시간에 따른 팔자라고 생각하신다. 어머니에게는 그것은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나와 아이가 어머니 말씀에 재미있어 서로 웃으며 얼굴을 비벼대자 쉬지 않고 아이에게로 넘어간다.
우리 손녀는 범띠 아니냐?
할머니, 나 범이 아니고 호랑이야.
그래, 범이 호랑이야.
아니야, 나 호랑이야!
아내는 출산일이 다가오자 배가 불러 제대로 눕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인근 운동장을 꾸준히 걸으면서 반드시 자연분만을 할 거라 했다. 그래야 산모의 회복이 빠르고, 무엇보다 아이에게 여러모로 좋기 때문에 어떻게든 제왕절개만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였다. 학수고대하며 아이를 기다리던 그때, 나는 시골 학교에 근무 했었다. 당시 교감선생님께서 시골에 일할 기간제 교원을 구할 수 없다고 출산휴가 5일 중에서 이틀만 쉬자고 했었다. 속은 조금 상했지만, 출산 휴가 임박해서 제출할 보고서를 끝내지 못해 핀잔을 들은 터라 고개만 주억거렸었다. 그리고 산부인과 입원 전날 밤, 꼬박 밤을 새우면서 보고서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병원에 들어가 아이와의 첫인사를 기다렸다. 아내에게 아이를 만나기 전에 샤워하고 정장을 입을까, 넥타이는 어떻게 할까, 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딸아이는 자정이 되어서야 우리를 보러 나오려고 했었다.
여보, 나 먼저 내려가 있을게, 이따 간호사가 전화하면 곧바로 내려와, 했다. 난 걱정 말라고 텔레비전 보다가 전화 오면 곧장 내려갈 거라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간호사가 보호자분 일어나시라고 날 깨웠다. 출산 후 아내의 말에 의하면, 간호사의 전화에 나는 보호자 아니라고 말하고는 잤다고 한다. 무심한 건지 무식한 건지 그랬단다. 그렇게 겨우 일어나 새벽 내내 아내 곁을 지키며 아내의 손을 잡았다. 아이 엄마에게 미안함에 아침을 거르며, 배고픔과 미안함을 잊고서 그 산고를 고스란히 내 눈과 귀 그리고 손 끝으로 만지고 나서야 나는 아이의 탯줄을 자를 수 있었다.
딸아이는 호랑이가 먹이를 구하러 다니는 시간이 아니라, 햇살이 뜨거워지려는, 그래서 그늘에서 쉬어야 하는 그때 태어났다. 그래서 어머니는 내 아이 역시 한평생을 걱정 없이 살 수 있다고 하셨다.
그래요. 그럴 수만 있다면 참 좋겠어요. 어머니 고마워요.
아들아, 너무 걱정 말아라. 너희 아버지와 나는 바삐 살았고, 그리 살아도 된다. 그런데 너와 네 딸은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
어머니 미안합니다. 아버지 미안합니다. 두 분의 노고로 나와 내 아이가 그리 살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어요,라고 속으로 말을 삼키며 웃었다. 미안함은 어색한 웃음으로, 죄송함은 아이와 눈 맞춤으로 감췄지만, 내 마음을 왜 모르실까, 나 역시 당신이 며칠의 산고 끝에 나는 자식이며 나의 말 못 할 고민마저 세어보시는 어머니실 텐데. 그저 미안함에 나는 모른 척하고 싶고, 그걸 아시기에 모른 척하시는 하시는 어머니는 이내 말을 돌리셨다.
그런데, 아들아. 며느리는 몇 시에 태어났노?
어머니, 나도 궁금해요. 처가에 전화드려서 물어볼까요. 궁금하네요. 항상 바쁘게 살았으니, 닭이 우는 시간에 태어났겠지요. 그래서 피곤해도 바쁘게 살았겠지요. 학교일에, 교회일에 몸이 부서지며 일을 했겠지요. 궁금하네요. 전화를 한번 드려볼까요. 그건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안다고 달라지는 게 없어서 끝내 속으로 아쉬움, 그리움을 삼키며 웃어야 하니 하지 않을래요. 어머니도 제 마음을 아시고, 하지 말라고 하시네요. 그래서 어머니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