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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Oct 06. 2016

이미 망쳐버린 그림 한 장

그림이야 다시 그리면 된다지만 아닌 것 같아요.

<일기와 수필 사이>


향나무를 그려요.

나무의 크기가 눈대중으로 어림잡아 5m는 넘어 보여요.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고 있는데, 햇빛은 오른쪽에서 내리쬐고 있어요. 아마도 정오가 되기 전인 10시에서 11시 사이쯤이 아닐까 싶어요. 건물 뒤편에 있으면서도 그늘지지 않고 볕을 고스란히 쬐고 있는 걸로 봐선 반대편에 나무를 가리는 건물이 낮거나 아니면 해가 측면에서 비추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육안으로 보았다면 어디에서 빛이 들어오고 나무의 크기는 나와 비교해서 얼마나 큰지 더 잘 알 수 있을 텐데, 내가 본 건 향나무가 아니라 사진입니다. 그러니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향나무 사진을 보고 향나무를 그려요.


9월 20일에 시작한 향나무 그리기는. 


반사광을 띄지 않는 하얗고 두툼한 질감의 종이 위에 커터칼로 심을 길고 뾰족하게 깎은 2B용 연필을 사용해서 스케치를 했어요. 사진 속의 향나무 느낌을 살려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어요. 아마 한 시간은 아니 두 시간은 걸렸을 겁니다. 잘 그렸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잘하고 있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드는 밑그림을 완성했어요. 직접 보고 그린 것은 아니지만 사진으로 본 가이즈까 향나무를, 내가 그리고자 하는 느낌대로 최대한 비슷하게 흉내 내며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밑그림을 완성한 거지요.

이 밑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 사진을 아주 많이 봐야 했어요. 미술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 구도와 비율에 대해선 아는 게 없으니 할 수 있는 거라곤 보고 그리고 보고 다시 보고 지우고 이러한 일들을 반복했어요. 조금 더 괜찮은 그림을 그려볼 요량으로 수정을 한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나만의 향나무가 그려졌어요.

밑그림대로 채색을 하면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큼은 못되더라도 내가 만족할만한 그림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물감으로는 화방에서 전문가용으로 판매하는 20색 신한 수채화 물감을 사용했어요. 3 원색을 바탕으로 색을 섞어가며 채도를 낮추고 붓칠을 했어요.

눈에 보이는 색을 찾아가며, 보이지 않는 색을 생각하며, 사진 속의 향나무를 그리고 내가 그리고자 한 향나무를 완성하기 위해 밑그림에 색을 채웠어요. 하루, 이틀, 삼일을 물감으로 조금씩 아주 열심히 그렸어요.


향나무의 전체적인 몽글몽글한 느낌과 손질되지 못해 웃자란 잎의 삐쭉 튀어나온 느낌을 동시에 살리고, 잎이 자란 결대로 붓칠을 했어요. 원근감을 위해 멀리 보이는 부분은 채도를 더 낮췄어요. 그렇게 몇 시간을 며칠에 나눠서 그렸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잘 그리려고 하면 할수록, 물감을 덧입힐수록 그만 하고 싶어 졌어요. 처음 내가 바라본 사진의 멋진 향나무, 내가 그리고자 했던 향나무, 밑그림에서 상상했던 그 느낌의 향나무가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내가 노력하면 할수록 처음과는 점차 멀어지는 그림이 되었어요. 그래서 중간에 그만두려고 몇 번인가 고민을 했어요. 이 종이를 구겨버리고 새로 그리면 안 될까, 하고 밑그림과는 달라진 그림을 가만히 바라봤어요


여기서 더 그린다고 해서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았어요. 선생님이 그려준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만큼 그림은 내가 원했던 방향과는 맞지 않았어요.


나의 계획과는 전혀 다르게 그려진 그림 한 장, 의도하지 않은 실수들은 나의 실력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지만 그럼에도 화가 났어요. 더군다나 이걸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어요. 물론 이걸 대충 끝내고 다른 걸 그리면 되겠지만. 그럼 이 그림은 어떡할까, 그림 한 장이지만 이미 망쳐버린 이 그림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충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감은 오지만 그렇다고 한들 이미 그려버린 그 부분을 다시 지울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선택을 해야 했어요. 물감을 지우고 처음부터 그릴 수는 없으니 구겨서 버리거나 아니면 계속 그리거나 해야 했지요. 또 다른 선택이 있을까요.


나는 계속 그리기로 했어요. 이미 망쳐서 지금으로서는 괜찮은 그림이 나올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이고 사진에서 본 향나무를 그대로 그려낼 수는 없겠지만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기로 했어요. 부족한 그림이 될 수는 있겠지만 부끄러워하지는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쨌든 내 그림이니깐요.


그리고 다 그리고 나면 잘 그린 그림은 아닐 것 같지만 나 스스로는 잘했구나, 하고 나 스스로 위로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림이야 다시 그리면 된다지만 아닌 것 같아요. 인생처럼 그림도 한번 붓칠을 시작하면 다시 처음부터 그릴 수는 없어요. 그러니 그리던 그림은 계속 마저 그려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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