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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May 15. 2017

오늘이 네 기억에 꼭 남길 바란다.

네 기억 보단 내 기억에 확실히 남을 것 같구나.

<일기와 수필 사이>

아빠, 작년 내 생일에 준 선물이 뭐예요?

기억이 안 났다.


아내와 지내며 열세 번의 생일을 함께 했지만 무얼 선물했는지 기억이 선명하지 못하다.

물론 전부 흐린 것은 아니다. 스무 살 첫 생일엔 예쁜 종이 상자에 안드레아 보첼리의 CD를 넣어 선물했었다. 피아노 연주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아내가 정작 음악 감상엔 소질이 없다고 말해 '아차차' 싶었다. 그 당혹감에 그 선물은 기억을 한다.

우리가 만난 후 두 번째 아내의 생일에는 생일을 코 앞에 두고 크게 다퉜다. 사과하는 마음으로 큰 도화지를 우리 두 사람이 찍은 사진으로 꾸며서 그걸 선물했다. 미안한 마음에 그 선물 역시 기억을 한다.

그 이후로도 아내의 생일을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다. 직장을 가지고 지갑에 카드가 생기고 나서는 조금 더 큰 선물을 주었지만, 언제 어떤 선물을 했는지는 정확한 기억이 없다.

우리가 만난 지 3000일이 되었을 때 백화점에 들러 십만 원이 넘는 머리핀을 선물로 샀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내에게 건냈다. 그런데 아내는 그 머리핀을 도저히 꼽고 다닐 수 없다며 같이 환불하러 가자고 나와 실랑이를 벌였고, 머리핀이 아까워 결국 케이스에 보관만 하다가 그걸 잃어버렸다. 아내가 겁도 없이 비싼 걸 샀다고 나를 나무랐고, 그 모습이 귀엽고 한편으로 서운해서 그것 역시 기억을 한다.

기억이라는 게 어떤 건 나고 어떤 건 안 나고 그런다. 그런데 그걸 기억을 하게 하는 건 선물이 아니라 그 당시의 사건 때문인 것 같다. 그 사건에서 발생하는 감정으로 인해서 내 기억 속에 각인이 된다.

또한 그 기억은 그걸 동시에 겪은 사람마다 다르게 각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갑자기 작년 네 생일 선물은 왜 물어본 거야?

음. 이번 어린이날에는 뭘 주실지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어린이날, 그러고 보니 나는 어린이날 뭘 받았었는지 궁금해졌다. 내 부모님이 매년 어린이날을 그냥 보냈을 리가 없는데 받은 선물은 기억이 안 났다. 그리고 내 기억 속, 그 많았던 어린이날 중에서 딱 하루가 기억이 났다. 그때 나는 어린이회관 꿈누리관 앞에서 아버지 목말을 타고 가로등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거리 공연을 보았다. 그런데 음악 소리가 잠시 작아지더니 가로등 스피커에서 어린이 댄스 시간이라는 안내가 나왔다. 아버지는 나를 바닥으로 내려주며 등을 떠밀며 나가보라고 했고, 나는 너무 부끄러워 짜증을 냈다. 그리고는 혼이 났다.

그런데 이 사건을, 혼냈던 아버지나 혼내는 아버지를 나무라던 어머니는 까맣게 잊고 기억을 못 하신다. 나만 기억을 한다. 그 사건이 나에게는 하나의 감정으로 기억이 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이야기를 하면, 성탄절 선물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님은 성탄절마다 레고를 사주셨다고 하는데 나는 받은 것 같지만 그다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가장 기억하는 성탄절 선물은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맡에 놓여 있던 단팥 도넛이었다. 밤새 산타를 기다리다 늦게 잠들어 눈을 뜨고 보니 머리맡에 놓인 흰 종이봉투, 그 봉투로 밖으로 배어 나온 도넛의 기름, 빈 속에 한입 베어 물었던 설탕 한 가득한 단팥 도넛에 너무나 행복했다. 그날 성탄절은 맛있는 도넛으로 아쉽지만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람의 뇌는 3층 구조로 구성되어있다. 생명뇌라고 불리는 뇌간, 감정뇌라고 불리는 변연계, 생각뇌라고 불리는 대뇌피질, 아마 기억을 관할하는 역할이 대뇌피질인데 대뇌피질이 3층이라면 기억이 저장되기 위해서 곧바로 3층까지 갈 수가 없다. 기억이 저장되기 위해서 1층부터 차근차근 거쳐가야 한다. 생명의 안전이 확보되는 1층 뇌간에서 감정을 관할하는 2층 변연계를 거쳐 3층 대뇌피질로 갈 수 있다. 그러니 기억, 사고, 인지 등을 관할하는 대뇌피질은 2층의 변연계의 감정이 충족되어야 하며 그 감정에 따라서 기억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내의 생일 선물, 나의 어린이날, 성탄절 등은 내가 겪은 사건에서 기인하는 감정들로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당시 감정이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면 그 기억은 어딘가에 찾을 수 없는 곳에 보관되어 있거나 폐기되었을 것이다.


그럼 이번 어린이날에는 뭘 받고 싶어?

장난감이요. 믹서기 사주세요. 믹서기로 요리하고 싶어요.


고민이 되었다. 분명 그 장난감을 사주면 아이와 나는 그 선물을 기억하지 못할 게 뻔하다. 장난감을 사주면 며칠은 굉장히 좋아하며 가지고 놀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몇번은 잘 가지고 놀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 장난감이 어린이날 산 것인지 아니면 생일에 사준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아빠 기분에 사준 건지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번 어린이 날은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아이에게는 생각해 보자고 말했다.


학교에 입학하며 피아노 학원을 제외한 나머지 사교육을 모두 정리한 아이는 방과 후에 할 일이 없다. 아니해야 할 일이 없는 거지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수히 많다. 아이는 그간 하고 싶은 것들을 어떻게 참고 몇 군데의 사교육을 받았는지 신기할 만큼 방과 후에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마냥 아이를 놀릴 수는 없기에 나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기로 했다. 이 시간을 아이가 어떻게 기억할지는 시간이 흘러봐야겠지만 이 시간이 아이의 기억 속에 설탕이 듬뿍 들어간 행복으로 각인되기를 바란다. 어린이날 선물 이야기가 있은지 며칠 뒤에 아이와 [갈치 사이소] 그림책을 읽게 되었다. 그림책을 읽으며 아이는 자갈치 시장에 대해 약간의 관심을 가졌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아이에게 말했다.


어린이날 선물로 아빠가 디지털카메라를 사주면 어떨까, 그 사진기 들고 아빠랑 자갈치 시장에 가서 사진도 찍고 갈치도 먹고 경매장 구경도 하면 어떨까, 이왕 가는 거 기차도 타보자. 너 기차는 한 번도 안 타봤잖아. 어때?


사실 자갈치 시장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곳이다. 큼직하게 잘라서 구운 갈치 한 도막을 입에 넣어 씹다가 한잔 마시는 맥주는 그냥 말로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안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람다운 풍미가 넘치는 안주이다. 아이는 아주 잠깐 고민했다. 믹서기로 요리하는 자신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는지, 그럼 믹서기는 못 사죠,라고 물었다.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아이는 내 답변은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스스로 결정하고 좋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 부녀는, 어린이날 부산 자갈치 시장을 가게 되었다.


아이에게 어린이날이 평생의 즐거움으로 반드시 남기를 소망하며 말이다. 그런데 30년뒤 내 아이는 이 날을 기억할까, 아마도 아이 기억보다는 내 기억에 확실히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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