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만큼 나이가 들었던가? 나이 들어간다는 걸 잊고 있었다.
김진국, <나이듦의 길> / 그림, 임종식
나는 살아가면서, 내 삶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에 생각하지 않는다. 일초, 일분, 한 시간, 하루, 한 달, 일 년 그렇게 무한히 반복되는 영원성에 갇혀서 일까, 아니면 나의 감각이 무뎌서일까. 나는 일상에 매몰되어 삶의 끝이 죽음이라는 것을, 삶의 완성을 위해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늙어간다는 것을 잊고 산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고 살거나,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것이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 생각하며 사는 탓일 겁니다. 지금의 현실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는 늙음과 죽음이란 것이 내 삶과 무관한,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p.6
물론 나 자신이 죽을 거라는 사실을 매일 떠 올리며 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아무리 죽음이 삶의 완성이며 불멸에 이르는 길이라지만, 그것은 지금이라는 시간을 온전하게 살 수 없는,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조차도 바람직하지 않다.
다행히 우리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죽음을 잊고 산다. 망각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현재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만드는 아이러니와 같다. 그러니 어제의 등신 같은 짓을 잊고,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지금 입고 있는 속옷의 색깔과 아침 식탁에 올려진 반찬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는 소중한 축복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나이가 들어가고 있으며, 늙어가고 있다. 죽음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의 내 상태마저 외면해서는 안 된다. 내가 늙어감과 나이듦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현재 나의 삶을 살필 수 있는 것이고, 더 잘 살자고 하는 생존의 욕구와 같은 것이다.
❖ 늙어가는 그 서글픔
"나이가 들어간다"와 "늙어간다"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느낌이 아주 다르다.
"나이가 들다"는 철없는 어린이가 성장한다는 의미로 보이고, "늙다"는 전자와는 다르게 서글픔을 준다. 그 서글픔은, "나이듦"의 끝은 성찰일 것이고, "늙음"의 끝은 죽음이기에 때문에, 그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정말 서글프고, 허무한 것일까?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죽음이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그 사실 자체가 죽음은 나쁘지 않고 그러니까 서글프지도 허무하지도 않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늙어간다는 건 어째 쓸쓸하기만 하다.
아마도 늙어가며 만나게 되는 질병이 한몫을 톡톡하게 해서 일 테다.
사람에 따라서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영면하는 사람이 있지만, 죽음 문턱에서 그리고 삶이 불멸에 가까워질수록 한두 군데 아픈 사람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늙는다는 것은 몸의 쇠퇴와 흡사하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몸과 달리 여전히 젊으며 힘이 넘친다. 뜨거운 마음과 차가워진 육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부조화는 "늙어감"에 대해 아쉽기만 할 것이다.
제 아무리 "장자"가 죽음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바라보았고, 그리고 현자들이 무한히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과 치열한 삶 속에서 불멸로 가는 유일한 문이 죽음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관념 속에서 죽음이지 실제에서 느끼는 것과는 아주 다르기만 하다.
❖ 늙음에 대한 가치의 변화
죽는 것이 두렵고, 늙어가는 것이 아쉬운 것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
그런데 현대인이 가지는 "늙음"에 대한 시각이 예전에는 어땠을까?
먼 옛날로 가지 않더라도, 노인에 대한 사회의 시각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늙어서 노인 된다는 것은 작게는 집안의 중대한 사안을 결정하는 최종 결정권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고, 크게는 마을에서 덕망 높은 어른이 되는 것이나, 더 넓게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현자가 되는 길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며, 늙어가며 경험을 통해 얻는 지혜들이 축적되어 있는 노인은 자녀들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해줄 힘이 있었다. 그러나 문명화 시대에 급격한 발전은 노인들의 지혜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예전에는 아이가 아프면, 아이를 길러본 어른들에게 물었지만, 이제는 손 안에 든 스마트 폰에 묻는 것이 더 편리하고 정확해졌다. 날씨 또한 어른들의 경험보다는 일기예보가 정확하며, 오히려 옛날에는 이라고 시작하는 어른들을 꼰대라고 비아냥 거리기까지 한다.
아마도 현대인이 느끼는 늙음의 부정적 시각은 급성장한 한국의 경제성장 때문일 것이다.
서구사회가 이삼백 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한 문명화를 우리는 고작 반백년만에 이룩하였다. 급성장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예법들을 근대화시키고 못한 채 버리고, 몸만 근대화 문명화하였다. 우리의 정신을 낡았다고 여겼고, 그 낡은 정신은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근대화되며 어른이 되었겠지만, 그 정신은 퇴화되고 사라졌다.
그렇게 빨리 성장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다이내믹 코리아라고 부른다. 역동적인 대한민국 말이다. 역동적인 사회의 시류는 급물살처럼 빠르다. 그런 사회에서 노인들의 경험은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다. 아쉽고 서글프지만 어쩔 수가 없다.
❖ 나이들어가는 길
저자는 경산의 한 요양병원의 의사로서 나이가 들어가는, 늙어가는, 죽어가는 노인들을 치료하며 돌보고,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하며 "나이듦"에 대해 생각했다.
늙음에 대한 서글픔, 우리 사회에서 늙음을 바라보는 시선, 유가 사상의 맹점, 노인문제 등과 같이 늙음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을 다양한 시선을 가지고 조명한다. 그리고 그의 생각들은 늙음, 죽음, 자연으로 점철된다.
늙으면 종국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의 끝은 자연이라고 한다. 출세하려던 젊은 날의 모습에서 벗어나, 늙어갈 때는 물러나는 지혜를 가지라고 한다. 물러나는 것은 자연의 모습과 같다. 아침이 오고, 그리고 햇볕이 뜨거운 정오를 지나, 붉은 노을의 석양을 맞이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그 자연의 섭리대로 살자. 뜨거운 정오의 햇살만 기억하면 석양의 빛은 쓸쓸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며,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이다.
쨍쨍한 햇빛이 아니라 저녁놀에 물드는 삶이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가지기 위해서는 일상의 타성과 관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고독이 필요합니다. 그 고독이 비록 괴롭고 힘든 것이겠지만 새로운 세계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마땅히 감내하고 견뎌내야 하는 고통입니다. <중략> 학문과 재산은 매일매일 더해감으로써 이루는 것이지만, 도는 덜어내고 비움으로써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p. 265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비단 노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늙음에 대한 사회적 평가 역시 노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태어남은 죽음을 반드시 수반하기에, "나이듦과 늙음"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그렇다고 꿈 많고 열정 넘치는 젊은이들에게 자연의 섭리만을 강요할 수 없다. 직장을 가지려는 젊은이와 여전히 왕성한 중년에게 안빈낙도는 그들의 지금을 뺏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무조건 물러남의 지혜를 설파하는 건 꼰대 짓과 다르지 않다. 젊음과 늙음의 조화, 채움과 버림, 유가 사상와 도가 사상의 상호보완 그것이 획일화된 문명사회에서 늙음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고, 역동적인 대한민국에서 시대의 속도에 맞춰갈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그것이 늙음, 죽음, 자연으로 가는 제대로 된 "나이듦"의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