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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Jun 16. 2016

삶이 고귀한 만큼 죽음 역시 가치롭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발견한 죽음의 가치

셀리 케이건, <죽음이란 무엇인가>


삶은 아주 소중하다.

그런데 그 삶을 소중하게 만들어 주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삶을 박탈하는 죽음 때문이다.

죽음이 없다면 삶은 소중하지 않다.

프란츠 카프카는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고 했다. 만약에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우리의 삶은 절대 소중하지 않다. 정말 그럴까? 삶이 소중하다고는 알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삶의 소중함만큼 살지 못한다. 매일 마시고 있는 물이 소중한 것은 알고 있지만, 그 물의 소중함을 깨닫는 건 타는 목마름을 느낄 때다.그러니 삶 역시 죽음이 없다면 결코 소중하지 않다.

그렇다면 삶을 소중하게 만들어 주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 질문을 멈추면 안 된다.

윌이 루이자에게 안주 하지 말라고 한 것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이다. .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질문을 해야 한다.

죽음은 중요한 문제이다.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절대 멈추면 안 된다. 그리고 피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바로 삶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이다. 어렵다고 두렵다고 귀찮다고 넘어가서는 절대 안 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의 문제이다. 우리 모두는 죽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죽음에 대해서는 알고자 하지 않는다. 삶이 이토록 고귀한데, 그 삶을 박탈하는 죽음을 외면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알아야 한다. 알기 위해서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질문을 던저야 한다. 그 질문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


셀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쉽게 끝나지 않는데, 달리 말하면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죽음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필요한 질문은 이런 거다. 죽음 이후의 삶은 있을까, 사후 세계는 존재할까, 죽고 나서도 내가 존재할까? 그런데 죽음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삶에 대한 질문도 해봐야 한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 같지만, 결코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삶과 죽음은 연장선상에서 존재한다. 그러니 죽음 이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삶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바로 삶을 사는 인간에 대해 질문을 해야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무엇이 인간을 구성하고 있을까, 에 대한 답을 구하면서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인간은 육체, 영혼으로 구성된다. 이 구성요소에 의해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구분된다.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보는 관점을 우리는 이원론이라고 보고, 육체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관점을 일원론, 물리주의라고 한다. 그리고 영혼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유심론도 있지만, 셀리 케이건은 죽음에 대해서 논의하기 위해선 불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제외하였다.


그런데 철저한 물리주의자인 셀리 케이건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에 정신으로 그것을 대체한다. 그렇다면 정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감정이나 생각과 같은 것들이다. 그는 영혼의 존재가 없다고 믿기 때문에 사후 세계 역시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질문을 던진다. 정신과 육체는 구분되는가? 이 질문의 의미는 육체 없이도 정신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는 정신과 육체는 하나라고 한다. 하나이기 때문에 육체 없이 정신만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육체와 정신은 하나라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인간을 하나의 기계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기계는 아주 뛰어난 아니 위대한 기계이다.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며 성장하는 기계 말이다.

 

그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원론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한다. 읽으면서 다소 편협한 사고 또는 편향적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혼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영혼이 있다는 것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으로 영혼이 없음을 확인한다고 말이다.


셀리 케이건은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만약에 있다고 한다면 그 영혼이 불멸할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그는 절대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영혼이라는 건 형이상학에 관한 것이다. 영혼과 같은 것은 눈으로 확인이 되지 않으며, 만질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을 플라톤은 이데라라고 했었고, 그는 형태(形態)가 없는 형상(形象)이라고 한다. 그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형상중 하나인 음악의 예를 든다. 음악은 영혼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음악은 악기가 있어야 연주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에 악기가 사라진다면 음악의 여운은 남아있지만 그 소리가 불멸할까? 소리는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형상은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영혼이 있다고 하더라도 불멸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이성과 논리로서 삶과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설명하지만 절대 오만하지 않다.


강조하지만 나는 영혼이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사실 영혼의 존재를 완벽하게 부정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영혼이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물론 영혼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철학자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p.148


그는 영혼을 믿지 않는 것은 믿을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뿐이다. 그는 철학자이다. 철학자의 숙명적 과제는 이렇게 무서울 수밖에 없다. 차가운 이성과 논리로서 무언가를 증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쉽기는 하지만 나와 견해가 다를 뿐, 나는 그가 오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리주의자들처럼 인간을 육체적 존재로 바라볼 때 죽음에 대해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깨닫는 것이다. p.149


이원론자인 내가 그의 책을 읽는 것은 나에게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 더 깊이 들여다 보고 삶의 가치를 깨닫고 나의 생각을 더 확고히 다지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신의 존재를 믿는 나,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셀리 케이건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삶과 죽음이란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 두 사람의 견해는 극명하게 갈리지만 중요한 것은 의견 차이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질문을 한다는 거다. 그리고 더 잘 살기 위해서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중요하다.



❖ 죽음을 통해서 알게 된 삶에 대한 우리의 기만

삶의 진정한 가치는 부와 명예 같은 성공이 아니다. 그리고 죽음을 외면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인간은 죽는다. 그러니깐 인간인 우리 역시 죽음의 가변성, 불확실성, 필연성, 편재성 앞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자신이 죽지 않을 거라고 믿거나 또는 영원히 살 거라고 생각한다. 당최 이게 무슨 말인가 할 것이다. 여러 가지 논의가 있지만, 셀리 케이건의 마지막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접하게 된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전의 삶과는 다른 삶 살게 되는데, 삶의 가치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삶과 인생에서 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에머슨의 유명한 시를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지성인들에게 존경받고,
아이들로부터 호의를 얻는 것

정직한 비평가들의 인정을 받고,
친구들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분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을 발견하는 것

아이를 건강하게 기르거나, 한 뙈기 정원을 가꾸거나,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러한 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위인이란 무엇인가/자기 신념의 철학  p.388


에머슨의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인생에서 가장 큰 가치는 명성을 얻거나 부를 창출하거나 하는 것보다 자기 주변의 사람들과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을 것이며 그리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음에도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지 않으며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고 있다. 단지 별생각 없이 뭔가를 믿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자기기만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의식적인 믿음과 무의식적인 믿음으로 구분되기 때문에, 의식적인 차원에서는 우리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고 믿고 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불멸성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문제를 생각하며, 우리는 죽음 앞에서 정작 중요한 것들을 알고 있지만 실행하지 않는 자기기만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죽는다. 그러니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일 것이다.


❖ 죽음의 가치, 죽음은 삶을 고귀하게 한다.

존엄사에 대해 도덕적인가, 합리적인가 논의해봐야 한다. 죽음이 가치롭다면 삶은 더 고귀해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서 당당한 자가 과연 70억 명 인구 중에서 몇 명이나 될까, 아무리 그 수를 넉넉하게 잡더라도 소도시의 인구만큼도 안 될 것이다. 왜 우리는 이토록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사실 생각해 보면, 죽음은 아무런 고통을 주지 않는다. 사람이 늙어가거나 아프거나 하는 것은 삶에서 파생되는 것이지, 죽음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투병 중이라면, 삶의 끝에 맞이하게 되는 죽음은 안식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죽음이 삶의 쾌락을 박탈하기 때문일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수 없고, 자연에서 망중한을 누릴 수 없다. 죽음은 우리가 누리던 삶을 박탈한다. 죽음이 삶의 즐거움을 박탈하는 것은 맞지만. 죽음 자체가 두려운 것은 절대 아니다.


이원론자인 나는 죽음 이후에 구원이라는 축복이 있다고 생각하고, 일원론자인 셀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 이후에 비존재로서 존재를 상실하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리주의자들의 경우, 죽음은 존재의 상실, 그러니깐 비존재가 되는 것이다.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무엇이 두렵고 무섭다는 것인가.

그러니 죽기 싫은 것은 당연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서 만약 죽지 않는다면 어떨까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과연 불멸은 축복일까, 그는 불멸은 형벌이라고 한다. 그래서 죽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한다. 영생의 축복을 믿는 나와는 견해가 다르지만. 삶에서 죽음은 삶을 고귀하게 만들어 주기에 차안(此岸)에서는 죽음이 있어야 된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죽음은 그 자체만으로는 가치가 없다. 죽음이 가치로운 것은 삶을 더욱더 고귀하게 만들어 주고 더 살고 싶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삶이 고귀한 것은 죽음 덕분이다. 그렇다면 죽음 역시 고귀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질문을 던져야 할까?

전복의 철학자 니체는 더 극단적으로 나가라고 했다. 멈추지 말라고. 우리는 더 잘 살고자 할 때, 반드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죽음이 가치롭다고 자살과 존엄사을 옹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인가, 합리적인가에 대해 앞으로 계속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삶은 소중하다. 그리고 고귀하다. 그 삶을 소중하고 고귀하게 만들어 주는 죽음 역시 애석하겠지만 가치롭다. 더 잘 살아야 한다. 죽음 앞에서 내가 살았던 삶을 한번 더 똑같이 살고 싶을 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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